밖으로 나오자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벽에 의지한 채 멍한 표정으로 자기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동물이 쓰러지기 직전 비틀거리며 몇 걸음 옮기듯이 휘청거렸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여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불시에 무언가에 가격당한 듯 머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누가 가격 했을까? 분명 누군가 무슨 짓을 했다. 그녀를 해치고자 무슨 짓을 한 것이다. 그녀는 쫓겨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없었다.
- P217

무슨 일인지 애써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정신이 흐리멍덩하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방에 단단한 벽이 있어 그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축축하고 캄캄한 관보다 더 갑갑한 유리관 속에 파묻힌 듯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왜 나를 쫓아버리려고 하는거야?"
가슴에 묵직하게 전해지는 압박감과 적대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4백 명이나 되는 호텔 손님, 벽, 대들보, 거대한 지붕, 차갑고 눈부시게 빛나는 조명, 쾌적한 휴식을 위한 의자들, 행복한 표정을 비추어 보던 거울, 잘자라고 유혹하듯 꽃무늬로 장식된 보들보들한 깃털 이 - P217

불로 덮인 침대가 있는 침실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
의자에 계속 앉아 있으면 그대로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창문을 깨버리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큰 소리로 울어버려서 자는 사람들을 모두 깨울지도 몰랐다.
‘밖으로 나가자!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나가야겠어. 그러지 않으면 이 갑갑하고 적막한 곳에서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아. 어서 밖으로 나가야 해.‘
여자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무작정 밖으로 뛰어나갔다. 여자가 박차고 나간 문 뒤로 침실의 휘황한 불빛 아래 황동과 유리 장식들이 의미없이 빛나고 있었다. - P218

여자는 몽유병 환자처럼 공중을 떠다니듯 계단을 내려갔다. 카펫, 벽에 걸린 그림들, 호텔 가구들, 계단, 조명, 손님들, 웨이터, 여종업원들………. 
물체도 사람도 마치 유령처럼 여자를 스쳐 지나갔다. 아는 척해도 몰라보는 여자의 반응에 놀란 사람 몇몇이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여자의 시선은 텅 비어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어디로 왜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자의 두 다리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 P218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조절하는 몸의 어떤 기능이 마비된 것 같았다. 두려움에 쫓기면서 목적도 없이 무조건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듯 홀 입구에서 멈춰 섰다. 이곳에 앉아서 식사하고, 춤추고, 웃고, 즐거운 만남을 가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 P218

여자는 가공의 자신을 밀쳐내고 본래의 자신을 되찾으려고 했다.
어머니를 생각했다. 많이 편찮으시거나 어쩌면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생히 느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자극해도 격렬한 고통이나 불안에 몰입할 수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느낌이 다른 모든 느낌을 밀쳐냈다. 그것은 분노였다. 분출구도 없이 몸 안에 갇혀 부글부글 끓는 무력한 분노, 끝없이 솟구치는 분노였다. 그러나 여자는 그 분노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수 없었다. 이모인지, 어머니인지, 혹은 자신의 운명인지. 그것은 불공평한 처사로 억울하게 고통을 받아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분노였다. 여자의 상처받은 영혼은 온전했던 자신에게서 어느 한구석이 떨어져 나갔음을 느끼고 있었다. 축복받은 날개를 떼어버리고 이제는 땅바닥을 기는 눈먼 구더기가 되어야했다. 무엇인가가 영영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 P218

드디어 짐 정리가 끝났다. 여자는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았다. 야회복, 댄싱슈즈, 허리띠, 분홍색 셔츠, 장갑등 원래 그녀에게 속하지 않았던 것들이 침대에 널려있었다. 마치 환상이 만들어낸 허깨비 같은 존재였던 폰 볼렌 양이 폭발하고 남은 잔해처럼 보였다. 크리스티네는 몸서리쳤다. 자기 물건은 하나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여자의 소유물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침대에서 자게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 창문을 통해 황금빛 풍경을 바라보고, 이 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것이다. 이제 여자는 그 누군가가 절대로 될 수 없었다. - P230

그런데 또다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여자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호텔 데스크 직원이 전보 한 장을 흔들며 뛰어왔다.
"어제저녁에 온 전보입니다. 야간 근무자가 수취인이 누군지 몰라서 전해드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손님께서 체크아웃하셨다는 것을 방금 알았습니다."
크리스티네는 전보를 펼쳤다.
ㅡ어머니 상태 악화. 조속한 귀향 바람, 폭스탈러
기차가 출발한다. 끝났다. 이제 다 끝났어 - P234

ㅡ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 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 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 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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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
신데렐라의 호박마차처럼...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이제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츠바이크의 문장을 읽는 기쁨을 한껏 향유하고 있다!

밖으로 나오자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벽에 의지한 채 멍한 표정으로 자기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동물이 쓰러지기 직전 비틀거리며 몇 걸음 옮기듯이 휘청거렸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여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불시에 무언가에 가격당한 듯 머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누가 가격했을까? 분명 누군가 무슨 짓을 했다. 그녀를 해치고자 무슨 짓을 한 것이다. 그녀는 쫓겨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애써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정신이 흐리멍덩하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방에 단단한 벽이 있어 그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축축하고 캄캄한 관보다 더 갑갑한 유리관 속에파묻힌 듯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왜 나를 쫓아버리려고 하는거야?"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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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5-23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 책이 나왔군요~!! 표지부터 제목까지 완전 마음에 드네요~!!

은하수 2023-05-24 09:43   좋아요 1 | URL
책 내용도 흥미진진합니다^^
예전에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라는 제목으로 출판이 됐었다는군요
다락방님 서재 가서 봤답니다
아무튼 저는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eBook] 초월주의의 야생귀리 루이자 메이 올컷 선집 2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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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주의의 야생귀리>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재미보장!



   우리에게 <작은 아씨들>로 익히 알려진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초월주의의 야생귀리>를 읽었다. '병원스케치', '나의 콘트라밴드', '한 시간', '초월주의의 야생귀리'의 네 편의 단편으로 엮인 작품집이다. 

   여러가지 눈에 거슬리는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주 재밌게 읽었다.  '초월주의'가 대체 뭐지? '야생 귀리'는 알겠는데.... 라는 궁금증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흠흠, 일단 궁금증은 해소가 되었다.  '초월주의'는 한마디로 '이상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원시 공산주의의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착취'를 통하여 얻어지는 목화, 비단, 누에, 가축, 가축의 분뇨료 만들어지는 거름 등의 도움없이 농사를 짓고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극단적으로 윤리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공동체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식물에서 얻어지는 전혀 보온성, 실용성이라곤 없는 옷을 지어입고 극단적 채식의 식단을 유지하면서 극단적 윤리적인 삶이라니... 한마디로 전혀 가능하지 않은 웃기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이런 삶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도 백인 남자들이... 작가는 전혀 실현 가능하지 않는 삶의 방식, 무능하고 게으른 백인 남자 모두를  비판한 것이겠지만.



   작가의 아버지가 이러한 방식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1843년 가족을 데리고 자신의 이상 실현을 위하여 몇몇 친구들과 뉴 잉글랜드의 척박한 산골짜기 마을로 향한다. 있는 것이라곤 다 쓰러져가는 집?과 창고, 농토 뿐이었는데 대체 무얼 먹고 살 것인지에 대한 계획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있는 것은 원대한 이상 뿐.  농사라곤 지어본 적도 없는 남자들은 하나의 밭에 여러 가지 다른 씨앗을 뿌리기도 하고 곡식을 거둘 시기에 강연을 다니고 무엇을 할 줄 모르고 도구라곤 변변하지 않으니 강연이 없을 땐 그저 빈둥빈둥... '무엇도 착취하진 않는 삶'을 꿈꾼다면서 여성과 어린 아이들을 착취하는 건 착취가 아니란 말인가! 어린 자식들을 비롯한 가족의 생계는 온전히 올컷의 어머니의 몫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결국 공동체의 삶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몇몇 친구들이 다른 공동체로 떠나갔고 가족들의 생계는 온갖 삯 바느질과 남의 집 일을 봐주고 식모살이를 하는 등의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던. 여자들의 고통스런 삶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한심한 백인 남자들이여! 




   아주 읽다가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다.

   이것은 '초월주의의 야생귀리' 라는 단편의 내용이자 루이자 메이 올컷의 가족들의 삶, 어머니의 삶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자전적인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그런데도 사랑한다고?  사랑하고 존경했다고 한다. 그래서 비극인거다...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들었으니까)과 연민, 원망 사이에서 고뇌하지만,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려고 했을 것이다(어느 사회나 장녀는 고달프구나).  돈이라는 것을 버는 행위 자체를 경멸했으면서(얼씨구... 그럼 쓰지 말고 빚이라도 만들지 말든가) 끊임없이 빚을 만들어내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써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작품이 신문에 발표가 되거나 연재되는 형식이었으므로 독자의 순간적인 흥미를 끌지 못하면 발표를 할 수가 없었으니 작품성을 논하기는 어려움이 따를 것이고, 신문을 읽는 대다수의 백인 중산층의 의식 수준을 따를 수밖에 없었으므로, 아무리 작가가 철저한 노예 해방론자이고 사회 참여적인 페미니즘의 옹호자였다 할지라도 '글을 쓰는' 백인의 시각을 가진 여성이라는 시혜자적 입장을 포기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책의 단편 중 '한 시간'에 등장하는 백인 농장주인 개브리얼이나 주인공이 종군 간호사로 나오는 '병원 스케치'와 '나의 콘트라밴드(콘트라 밴드의 뜻 : 간호사가 개인적으로 부릴 수 있는,  스스로 일을 할 수 있는 흑인 환자를 말한다)'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에서 그런 입장을 찾아 볼 수 있다.  종군 간호사로 짧은 복무 경험이 있는 작가 자신의 경험이 작품에서 나타나는데, 열렬한 노예제 폐지론자이면서도 간호사의 개인 콘트라밴드와 동등하지 않고 여전히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노예와 같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50명의 흑인 노예를 거느린 백인 농장주인 개브리얼은 노예제 폐지론을 환영하는 청년이며,  북부에서 머물다 아버지의 병으로 농장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흑인 노예들이 폭력과 억압으로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마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대천사 가브리엘인 것처럼)인양  무장한 노예들 앞에 맨 몸으로 나타나 노예 해방을 선언한다. 아주 대 영웅이 등장 하신거다. 그러자 무장한 폭도들이었던 흑인 노예들이 그 말을 믿으며(심지어 흑인 노예들의 어르신을 통하여 밑 작업까지 미리 해놓았다. 젊은 주인 어르신은 주인님과는 다르다고) 어떠한 긴장감도 없이 수긍하며 환호하는 모습이라니... 이렇게 순식간에 환호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어이없을 무...!




   '구원자이자 해방자로서의 백인', 북군에 팽배해있었던 '노예제 폐지와 남북 전쟁에 대한 정당성의 부여' 라는 시각은 작가 자신의 개인적 시각이라기 보다는 미국 북부의 노예 해방론자들의 일반적인 시각을 작품에 구현한 대변자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작품에 등장하는 하나하나의 스토리들이 실감나면서도 흥미진진한 서사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최대 강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뒤죽박죽 엉망진창인 미국 워싱턴의 비능률적이고 관료주의적인 병원 운영을 유쾌한 시선으로 비웃기도 하고 여전히 흑인들은 자신들이 교화하고 해방시켜주어야만 할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들도 백인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으며 노예제 폐지 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그들을 따뜻한 시선과 인간의 밝은 점을 부각시켜 서술한 점이 이 소설을 읽으며 발견한 작가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역시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잘 읽히는 법이니까...  여러가지 눈에 거슬리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ㅡ 무엇보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1863년, 링컨 대통령이 그 해 1월 1일 노예 해방문을 발표하고 공식적으로 노예 해방을 이룬 해이다. 무려 160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 동안 세상은 아마 백만 번도 더 변화했을 것이다 ㅡ 분명 또 배울 점이 남는다는 것은 나름의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병원 스케치'와 '나의 콘트라밴드'는 사실 아주 재미 있었다. 왜 책 제목이 <초월주의의 야생귀리>인건지 이해가 안 될 만큼.

   아참참...... 도망친 남부의 노예를 북부로 도망시켜주는 비밀조직인 "지하철도(Underground Railfoad)"의 활약을 다룬 콜슨 화이트헤드의 소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읽었을 때 그 지하철도의 역으로 집을 제공해준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는데, 루이자 메이 올컷의 집도 잠시이긴 하지만 지하철도의 역으로 제공(1847년, 작가 연보 참조함)한 적이 있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노예제 폐지를 찬성한 작가에게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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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차일드》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가 있었던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단편 7편, 그리고 짧은 에세이까지 읽고 나서 작가에게 드는 이 친근감의 원인이 뭘까 잠시 생각해본다.
공통점이라고는 ‘여자라는 것‘ 한 가지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타비아 버틀러,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보다 훨씬 심한 부당한 대우 속에서 자란 약자 흑인 여성이었지만, ‘훗날 자신이 SF를 쓰는 작가가 될 거라는 것‘을 여섯 살 이후로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기어코 이루어 냈다는 것이 흑인 여성 작가로 우뚝 선 그녀의 대단함이 아닐런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읽고 매일 일정하게 쓰기를 행하고 워크숍이나 글쓰기 모임에 나가 기꺼이 자발적인 평가를 당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아무리 두려워도 거절 당하더라도 글은 꼭 출판사에 보내야하고, 영감이나 재능 따위는 잊어야하고 쓰는 습관으로 승부해야하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물고 늘어지기˝ 즉, 집요함을 가지는 것. 그것이 작가 자신과 우리를 얼마나 먼 곳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를 안다면 놀랄 것이라고 말했다.(작가는 이러한 사실을 작가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글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백퍼센트 작가의 경험이라는 것에 ... 뭘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이러한 긍정적인 집착, 물고 늘어지기, 집요함 등(프로르 시크리벤디)은 작가에게만 통용되는 법칙은 아닐 것이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ㅠㅠ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거라고요. 그래서 그게 제일 어려운 거고요...



7편의 소설에 작가의 후기가 있어서 내가 더 친근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번역된 말들이니까 작가가 직접적으로 하는 말과는 많은 부분에서 다르겠지만 어쨌든 옥타비아 버틀러 자신이 직접 쓴 후기라서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궁금증도 직접 말해주니 이중의 효과이기도 하다. 친밀감 증진과 궁금증 해소라는!

예를 들어, 소설 두번째 수록작인 <저녁과 아침과 밤>은 읽는 내내 조마조마하고 으스스 무서웠다. 거기에 나온 DGD(듀리에ㅡ고드 질환)라는 병은 자신을 죽이거나 심각한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그러나 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유전이 되는 무서운 질병이다. DGD의 원인은 ‘헤던코‘라고 하는 치료제의 일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헤던코‘는 세상에‘ 존재하는 암의 상당수와 많은 바이러스 질환의 치료제‘이자 DGD의 원인이다. 이 질환자들은 대부분 단명한다는 것이 통례였으나 ‘헤던코‘의 개발회사가 기증한 병원에서는 환자의 충동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다른 관심사에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환자가
평화로운 상태로 오래 사는 실험이 진행중이었다.



아무튼,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작가가 이런 병에 대한 아이디어는 대체 어디서 얻는지, 정말 이런 병이란 것이 생길 수 있는지, 우리가 많은 실험을 거치고 개발한 신약의 피해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등이었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후기에 설명이 붙어 있었다.~~



˝나는 세 가지 유전질환의 요소를 가지고 듀리에ㅡ고드 질환을 만들었다. 첫번째는 헌팅턴병이다. 유전되고, 우성이므로 부모 중 한 명에게 유전자가 있으면 피할 수 없다. 이 병은 단 하나의 비정상적 유전자에 기인한다. 또 헌팅턴병은 환자가 중년에 이르기 전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헌팅턴병에 더하여 페닐케톤뇨PKU 증을 이용했다. 유아가 특별한 규정식을 먹지 않으면 심각한 지적 장애를 유발하는 열성 유전 질환이다.
마지막으로는 심각한 지적 장애와 자해행위를 유발하는 레슈ㅡ니한 질환Lesch-Nyhan Disease을 이용했다.
나는 이 세 질환의 요소에 나만의 특별한 비틀기를 추가했다. 페로몬에 대한 민감성, 그리고 자기가 몸 안에 갇혀 있으며 그 살덩이는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환자의 지속적인 환각이 그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많은 종교와 철학에 나타나는 생각을 차용해서 극단으로 밀어 붙였다.˝ (169/459)


특별한 비틀기, 페로몬에 대한 민감성 ㅡ이 부분이 독특해서 인상적이었지 ㅡ 그리고 진정한 살덩이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극단적으로 자기 몸을 물어뜯는 환자들의 모습은 진짜 끔찍, 끔찍 그 자체였다. 이것은 지옥... 지금도 생각나.... 계속 생각날 듯 ㅠㅠ

                                  *********************************************************

이와 반대로 <마사의 책>은 소설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작가의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작가의 작품 속에서 유토피아를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 마지막 작품은 예외였다. 작가인 주인공 마사에게 어느 날 전지전능하신 ‘신‘이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네가 할 일은 이렇다. 너는 인류가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낭비 심한 청소년기에서 살아남도록 도울 것이다. 인류가 덜 파괴적이고, 더 평화롭고, 더 지속가능한 생활 방식을 찾아내도록 도와라. ˝


도와라!!!
한 마디로 인류의 미래에 대해 전권을 위임하겠단 말이다.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너무 무섭고도 두려운 어마무시한 권력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피해가 가지 않을 결정은 없을 것이므로.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더더더 무섭고 힘든 결정이 되는 것이다. 나라면 대체 뭘 선택할 수 있을까. 하나를 선택할 수나 있을까. 그것에 따를 피해를 상상할 수 없으니 어떠한 결정도 내리기가 진짜 어려울 거다. 신은 뜬금없이 왜 내게 이런 어마어마한 결정을 맡겨놓고 피하지도 못하게 하는건지 신을 원망하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겠지. 피할 길은 없는데도...


마사는 꿈으로 해답을 내놓는다. 사실 해답인지는 잘 모르겠다. 작가는, 마사는 그랬다. 제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꿈을 꾸게 하고, 개인의 관심이 바뀌면 꿈도 달라지게 하는 거다. 무엇을 욕망하든 자는 동안 꿈에서는 가질 수 있고, 그것을 물리치지도 피할 수도 없는데, 그 대신 그 꿈은 현실보다 훨씬 더 깊게, 속속들이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니까 만족이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시도에 있지 않고 그 꿈속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유토피아를 주고 싶˝은 것이 마사의 이유이다.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밤마다 자신만의 유토피아, 대립과 투쟁을 갈망하든 평화와 사랑을 원하든 꿈속에서 천국을 경험한다면 깨어있는 동안 파괴하거나 지배하거나 정복하려는 욕구를 줄어들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이 마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물론 이것의 폐해도 분명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작가는 조금도 유토피아를 믿지 않고, 내 유토피아는 누군가의 지옥일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내밀하고 개인적인 꿈속이 아니라면 달리 어디에서 유토피아가 가능하겠는가˝(418/459)라고 말한다.
이것이 옥타비아 버틀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이다. 냉정하지만 너무 맞는 말이라서 ‘반박불가‘로군! 이런 생각이 들었다가, 한편으론 따뜻하고 희망적인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많은 SF작품들도 있는데... 이렇게 살며시 입속말로 속삭여보다 말았다. 두고 떠나는 세계는 유토피아와 거리가 너무도 먼 세상일테니까.



난 유토피아라는 것에 대해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현실이기를, 좀만 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이기를 바랄 뿐이었지 이상적인 사회, 무릉도원식의 유토피아를 원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지만 유토피아가 실재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운 것은 아니다. 이미 난 유토피아는 인간 세상에선 있을 수 없는 상상 속의 산물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세상이 있을수가 있나. 꿈꾸고 있네? 이런 생각을 했었다.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은 나와 같은 것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그래서 꿈속에서나 경험해보라는 거겠지! 살짝 비틀린 듯한 작가의 허탈한 웃음 한 스푼 투척에 나도 그냥 웃을 밖에.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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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하는 작가 폴 오스터의 리커버 특별판이라니...
폴 오스터 책 세트 4권이 집에 다 있고(그러고보니 다 열책에서 출간된 책들이네! 표지는 좀 별로..)
<공중곡예사> 빼곤 다 읽은 책인데 사고 싶다!
리뷰 당첨금 받은거로 사고 싶다!
사서 다시 읽어 보고 싶어진다.
특히, <뉴욕 3부작>은 평론들과 달리 내겐 너무 별로였기 때문에 언젠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맘이 있었다. 대체 왜 별로였던건지...
언제나 문제는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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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5-12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로인 책들이 일으키는 마음은 신기하네요..이제 별로 읽고 싶지 않다…이기도 하고 아니 남들은 다 좋다는데 왜 나만 별로야? 하고 다시 읽기도 하고 ㅋㅋㅋ저도 둘다 느껴봤네요. 폴오스터는 좋다니까 막 몇 권 집에 어느새 모여 있긴 하던데 한 권도 안 읽은 게 새삼 신기합니다…신기함 남발해서 송구합니다…

은하수 2023-05-12 16:25   좋아요 1 | URL
제 마음을 딱 집어 표현하셨네요^^
근데 그래도 폴 오스터 꼭 읽어보셨으면 해요. 그것이 언젠가는일지라도요.
신기함 남발? 덕분에 웃었습니다~~

잠자냥 2023-05-12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공중곡예사>가 가장 좋던데, 그걸
안 읽으셨다니!

유수 2023-05-12 13:35   좋아요 1 | URL
저도 최애가 공중곡예사입니다!

은하수 2023-05-12 16:28   좋아요 1 | URL
정말요~~~???
전 달의 궁전이요. 초반엔 지루하다 중반부터 몰아치듯 전개되는 이야기에 푹 빠졌더랬죠~~
한동안 폴 오스터 책을 몰아서 계속 읽다보니 자꾸 밀리더라구요
책장에 꽂혀서 먼지만 쌓이고 있는데 이 참에 세트 구입해서 첫 책으로 읽어야겠단 생각이 부르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