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오자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벽에 의지한 채 멍한 표정으로 자기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동물이 쓰러지기 직전 비틀거리며 몇 걸음 옮기듯이 휘청거렸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여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불시에 무언가에 가격당한 듯 머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누가 가격 했을까? 분명 누군가 무슨 짓을 했다. 그녀를 해치고자 무슨 짓을 한 것이다. 그녀는 쫓겨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없었다. - P217
무슨 일인지 애써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정신이 흐리멍덩하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방에 단단한 벽이 있어 그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축축하고 캄캄한 관보다 더 갑갑한 유리관 속에 파묻힌 듯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왜 나를 쫓아버리려고 하는거야?" 가슴에 묵직하게 전해지는 압박감과 적대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4백 명이나 되는 호텔 손님, 벽, 대들보, 거대한 지붕, 차갑고 눈부시게 빛나는 조명, 쾌적한 휴식을 위한 의자들, 행복한 표정을 비추어 보던 거울, 잘자라고 유혹하듯 꽃무늬로 장식된 보들보들한 깃털 이 - P217
불로 덮인 침대가 있는 침실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 의자에 계속 앉아 있으면 그대로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창문을 깨버리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큰 소리로 울어버려서 자는 사람들을 모두 깨울지도 몰랐다. ‘밖으로 나가자!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나가야겠어. 그러지 않으면 이 갑갑하고 적막한 곳에서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아. 어서 밖으로 나가야 해.‘ 여자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무작정 밖으로 뛰어나갔다. 여자가 박차고 나간 문 뒤로 침실의 휘황한 불빛 아래 황동과 유리 장식들이 의미없이 빛나고 있었다. - P218
여자는 몽유병 환자처럼 공중을 떠다니듯 계단을 내려갔다. 카펫, 벽에 걸린 그림들, 호텔 가구들, 계단, 조명, 손님들, 웨이터, 여종업원들………. 물체도 사람도 마치 유령처럼 여자를 스쳐 지나갔다. 아는 척해도 몰라보는 여자의 반응에 놀란 사람 몇몇이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여자의 시선은 텅 비어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어디로 왜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자의 두 다리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 P218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조절하는 몸의 어떤 기능이 마비된 것 같았다. 두려움에 쫓기면서 목적도 없이 무조건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듯 홀 입구에서 멈춰 섰다. 이곳에 앉아서 식사하고, 춤추고, 웃고, 즐거운 만남을 가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 P218
여자는 가공의 자신을 밀쳐내고 본래의 자신을 되찾으려고 했다. 어머니를 생각했다. 많이 편찮으시거나 어쩌면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생히 느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자극해도 격렬한 고통이나 불안에 몰입할 수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느낌이 다른 모든 느낌을 밀쳐냈다. 그것은 분노였다. 분출구도 없이 몸 안에 갇혀 부글부글 끓는 무력한 분노, 끝없이 솟구치는 분노였다. 그러나 여자는 그 분노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수 없었다. 이모인지, 어머니인지, 혹은 자신의 운명인지. 그것은 불공평한 처사로 억울하게 고통을 받아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분노였다. 여자의 상처받은 영혼은 온전했던 자신에게서 어느 한구석이 떨어져 나갔음을 느끼고 있었다. 축복받은 날개를 떼어버리고 이제는 땅바닥을 기는 눈먼 구더기가 되어야했다. 무엇인가가 영영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 P218
드디어 짐 정리가 끝났다. 여자는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았다. 야회복, 댄싱슈즈, 허리띠, 분홍색 셔츠, 장갑등 원래 그녀에게 속하지 않았던 것들이 침대에 널려있었다. 마치 환상이 만들어낸 허깨비 같은 존재였던 폰 볼렌 양이 폭발하고 남은 잔해처럼 보였다. 크리스티네는 몸서리쳤다. 자기 물건은 하나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여자의 소유물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침대에서 자게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 창문을 통해 황금빛 풍경을 바라보고, 이 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것이다. 이제 여자는 그 누군가가 절대로 될 수 없었다. - P230
그런데 또다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여자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호텔 데스크 직원이 전보 한 장을 흔들며 뛰어왔다. "어제저녁에 온 전보입니다. 야간 근무자가 수취인이 누군지 몰라서 전해드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손님께서 체크아웃하셨다는 것을 방금 알았습니다." 크리스티네는 전보를 펼쳤다. ㅡ어머니 상태 악화. 조속한 귀향 바람, 폭스탈러 기차가 출발한다. 끝났다. 이제 다 끝났어 - P234
ㅡ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 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 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 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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