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차일드》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가 있었던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단편 7편, 그리고 짧은 에세이까지 읽고 나서 작가에게 드는 이 친근감의 원인이 뭘까 잠시 생각해본다.
공통점이라고는 ‘여자라는 것‘ 한 가지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타비아 버틀러,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보다 훨씬 심한 부당한 대우 속에서 자란 약자 흑인 여성이었지만, ‘훗날 자신이 SF를 쓰는 작가가 될 거라는 것‘을 여섯 살 이후로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기어코 이루어 냈다는 것이 흑인 여성 작가로 우뚝 선 그녀의 대단함이 아닐런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읽고 매일 일정하게 쓰기를 행하고 워크숍이나 글쓰기 모임에 나가 기꺼이 자발적인 평가를 당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아무리 두려워도 거절 당하더라도 글은 꼭 출판사에 보내야하고, 영감이나 재능 따위는 잊어야하고 쓰는 습관으로 승부해야하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물고 늘어지기˝ 즉, 집요함을 가지는 것. 그것이 작가 자신과 우리를 얼마나 먼 곳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를 안다면 놀랄 것이라고 말했다.(작가는 이러한 사실을 작가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글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백퍼센트 작가의 경험이라는 것에 ... 뭘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이러한 긍정적인 집착, 물고 늘어지기, 집요함 등(프로르 시크리벤디)은 작가에게만 통용되는 법칙은 아닐 것이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ㅠㅠ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거라고요. 그래서 그게 제일 어려운 거고요...



7편의 소설에 작가의 후기가 있어서 내가 더 친근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번역된 말들이니까 작가가 직접적으로 하는 말과는 많은 부분에서 다르겠지만 어쨌든 옥타비아 버틀러 자신이 직접 쓴 후기라서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궁금증도 직접 말해주니 이중의 효과이기도 하다. 친밀감 증진과 궁금증 해소라는!

예를 들어, 소설 두번째 수록작인 <저녁과 아침과 밤>은 읽는 내내 조마조마하고 으스스 무서웠다. 거기에 나온 DGD(듀리에ㅡ고드 질환)라는 병은 자신을 죽이거나 심각한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그러나 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유전이 되는 무서운 질병이다. DGD의 원인은 ‘헤던코‘라고 하는 치료제의 일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헤던코‘는 세상에‘ 존재하는 암의 상당수와 많은 바이러스 질환의 치료제‘이자 DGD의 원인이다. 이 질환자들은 대부분 단명한다는 것이 통례였으나 ‘헤던코‘의 개발회사가 기증한 병원에서는 환자의 충동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다른 관심사에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환자가
평화로운 상태로 오래 사는 실험이 진행중이었다.



아무튼,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작가가 이런 병에 대한 아이디어는 대체 어디서 얻는지, 정말 이런 병이란 것이 생길 수 있는지, 우리가 많은 실험을 거치고 개발한 신약의 피해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등이었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후기에 설명이 붙어 있었다.~~



˝나는 세 가지 유전질환의 요소를 가지고 듀리에ㅡ고드 질환을 만들었다. 첫번째는 헌팅턴병이다. 유전되고, 우성이므로 부모 중 한 명에게 유전자가 있으면 피할 수 없다. 이 병은 단 하나의 비정상적 유전자에 기인한다. 또 헌팅턴병은 환자가 중년에 이르기 전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헌팅턴병에 더하여 페닐케톤뇨PKU 증을 이용했다. 유아가 특별한 규정식을 먹지 않으면 심각한 지적 장애를 유발하는 열성 유전 질환이다.
마지막으로는 심각한 지적 장애와 자해행위를 유발하는 레슈ㅡ니한 질환Lesch-Nyhan Disease을 이용했다.
나는 이 세 질환의 요소에 나만의 특별한 비틀기를 추가했다. 페로몬에 대한 민감성, 그리고 자기가 몸 안에 갇혀 있으며 그 살덩이는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환자의 지속적인 환각이 그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많은 종교와 철학에 나타나는 생각을 차용해서 극단으로 밀어 붙였다.˝ (169/459)


특별한 비틀기, 페로몬에 대한 민감성 ㅡ이 부분이 독특해서 인상적이었지 ㅡ 그리고 진정한 살덩이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극단적으로 자기 몸을 물어뜯는 환자들의 모습은 진짜 끔찍, 끔찍 그 자체였다. 이것은 지옥... 지금도 생각나.... 계속 생각날 듯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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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반대로 <마사의 책>은 소설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작가의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작가의 작품 속에서 유토피아를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 마지막 작품은 예외였다. 작가인 주인공 마사에게 어느 날 전지전능하신 ‘신‘이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네가 할 일은 이렇다. 너는 인류가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낭비 심한 청소년기에서 살아남도록 도울 것이다. 인류가 덜 파괴적이고, 더 평화롭고, 더 지속가능한 생활 방식을 찾아내도록 도와라. ˝


도와라!!!
한 마디로 인류의 미래에 대해 전권을 위임하겠단 말이다.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너무 무섭고도 두려운 어마무시한 권력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피해가 가지 않을 결정은 없을 것이므로.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더더더 무섭고 힘든 결정이 되는 것이다. 나라면 대체 뭘 선택할 수 있을까. 하나를 선택할 수나 있을까. 그것에 따를 피해를 상상할 수 없으니 어떠한 결정도 내리기가 진짜 어려울 거다. 신은 뜬금없이 왜 내게 이런 어마어마한 결정을 맡겨놓고 피하지도 못하게 하는건지 신을 원망하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겠지. 피할 길은 없는데도...


마사는 꿈으로 해답을 내놓는다. 사실 해답인지는 잘 모르겠다. 작가는, 마사는 그랬다. 제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꿈을 꾸게 하고, 개인의 관심이 바뀌면 꿈도 달라지게 하는 거다. 무엇을 욕망하든 자는 동안 꿈에서는 가질 수 있고, 그것을 물리치지도 피할 수도 없는데, 그 대신 그 꿈은 현실보다 훨씬 더 깊게, 속속들이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니까 만족이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시도에 있지 않고 그 꿈속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유토피아를 주고 싶˝은 것이 마사의 이유이다.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밤마다 자신만의 유토피아, 대립과 투쟁을 갈망하든 평화와 사랑을 원하든 꿈속에서 천국을 경험한다면 깨어있는 동안 파괴하거나 지배하거나 정복하려는 욕구를 줄어들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이 마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물론 이것의 폐해도 분명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작가는 조금도 유토피아를 믿지 않고, 내 유토피아는 누군가의 지옥일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내밀하고 개인적인 꿈속이 아니라면 달리 어디에서 유토피아가 가능하겠는가˝(418/459)라고 말한다.
이것이 옥타비아 버틀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이다. 냉정하지만 너무 맞는 말이라서 ‘반박불가‘로군! 이런 생각이 들었다가, 한편으론 따뜻하고 희망적인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많은 SF작품들도 있는데... 이렇게 살며시 입속말로 속삭여보다 말았다. 두고 떠나는 세계는 유토피아와 거리가 너무도 먼 세상일테니까.



난 유토피아라는 것에 대해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현실이기를, 좀만 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이기를 바랄 뿐이었지 이상적인 사회, 무릉도원식의 유토피아를 원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지만 유토피아가 실재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운 것은 아니다. 이미 난 유토피아는 인간 세상에선 있을 수 없는 상상 속의 산물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세상이 있을수가 있나. 꿈꾸고 있네? 이런 생각을 했었다.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은 나와 같은 것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그래서 꿈속에서나 경험해보라는 거겠지! 살짝 비틀린 듯한 작가의 허탈한 웃음 한 스푼 투척에 나도 그냥 웃을 밖에.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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