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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초월주의의 야생귀리 ㅣ 루이자 메이 올컷 선집 2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평점 :
<초월주의의 야생귀리>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재미보장!
우리에게 <작은 아씨들>로 익히 알려진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초월주의의 야생귀리>를 읽었다. '병원스케치', '나의 콘트라밴드', '한 시간', '초월주의의 야생귀리'의 네 편의 단편으로 엮인 작품집이다.
여러가지 눈에 거슬리는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주 재밌게 읽었다. '초월주의'가 대체 뭐지? '야생 귀리'는 알겠는데.... 라는 궁금증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흠흠, 일단 궁금증은 해소가 되었다. '초월주의'는 한마디로 '이상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원시 공산주의의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착취'를 통하여 얻어지는 목화, 비단, 누에, 가축, 가축의 분뇨료 만들어지는 거름 등의 도움없이 농사를 짓고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극단적으로 윤리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공동체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식물에서 얻어지는 전혀 보온성, 실용성이라곤 없는 옷을 지어입고 극단적 채식의 식단을 유지하면서 극단적 윤리적인 삶이라니... 한마디로 전혀 가능하지 않은 웃기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이런 삶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도 백인 남자들이... 작가는 전혀 실현 가능하지 않는 삶의 방식, 무능하고 게으른 백인 남자 모두를 비판한 것이겠지만.
작가의 아버지가 이러한 방식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1843년 가족을 데리고 자신의 이상 실현을 위하여 몇몇 친구들과 뉴 잉글랜드의 척박한 산골짜기 마을로 향한다. 있는 것이라곤 다 쓰러져가는 집?과 창고, 농토 뿐이었는데 대체 무얼 먹고 살 것인지에 대한 계획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있는 것은 원대한 이상 뿐. 농사라곤 지어본 적도 없는 남자들은 하나의 밭에 여러 가지 다른 씨앗을 뿌리기도 하고 곡식을 거둘 시기에 강연을 다니고 무엇을 할 줄 모르고 도구라곤 변변하지 않으니 강연이 없을 땐 그저 빈둥빈둥... '무엇도 착취하진 않는 삶'을 꿈꾼다면서 여성과 어린 아이들을 착취하는 건 착취가 아니란 말인가! 어린 자식들을 비롯한 가족의 생계는 온전히 올컷의 어머니의 몫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결국 공동체의 삶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몇몇 친구들이 다른 공동체로 떠나갔고 가족들의 생계는 온갖 삯 바느질과 남의 집 일을 봐주고 식모살이를 하는 등의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던. 여자들의 고통스런 삶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한심한 백인 남자들이여!
아주 읽다가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다.
이것은 '초월주의의 야생귀리' 라는 단편의 내용이자 루이자 메이 올컷의 가족들의 삶, 어머니의 삶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자전적인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그런데도 사랑한다고? 사랑하고 존경했다고 한다. 그래서 비극인거다...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들었으니까)과 연민, 원망 사이에서 고뇌하지만,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려고 했을 것이다(어느 사회나 장녀는 고달프구나). 돈이라는 것을 버는 행위 자체를 경멸했으면서(얼씨구... 그럼 쓰지 말고 빚이라도 만들지 말든가) 끊임없이 빚을 만들어내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써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작품이 신문에 발표가 되거나 연재되는 형식이었으므로 독자의 순간적인 흥미를 끌지 못하면 발표를 할 수가 없었으니 작품성을 논하기는 어려움이 따를 것이고, 신문을 읽는 대다수의 백인 중산층의 의식 수준을 따를 수밖에 없었으므로, 아무리 작가가 철저한 노예 해방론자이고 사회 참여적인 페미니즘의 옹호자였다 할지라도 '글을 쓰는' 백인의 시각을 가진 여성이라는 시혜자적 입장을 포기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책의 단편 중 '한 시간'에 등장하는 백인 농장주인 개브리얼이나 주인공이 종군 간호사로 나오는 '병원 스케치'와 '나의 콘트라밴드(콘트라 밴드의 뜻 : 간호사가 개인적으로 부릴 수 있는, 스스로 일을 할 수 있는 흑인 환자를 말한다)'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에서 그런 입장을 찾아 볼 수 있다. 종군 간호사로 짧은 복무 경험이 있는 작가 자신의 경험이 작품에서 나타나는데, 열렬한 노예제 폐지론자이면서도 간호사의 개인 콘트라밴드와 동등하지 않고 여전히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노예와 같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50명의 흑인 노예를 거느린 백인 농장주인 개브리얼은 노예제 폐지론을 환영하는 청년이며, 북부에서 머물다 아버지의 병으로 농장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흑인 노예들이 폭력과 억압으로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마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대천사 가브리엘인 것처럼)인양 무장한 노예들 앞에 맨 몸으로 나타나 노예 해방을 선언한다. 아주 대 영웅이 등장 하신거다. 그러자 무장한 폭도들이었던 흑인 노예들이 그 말을 믿으며(심지어 흑인 노예들의 어르신을 통하여 밑 작업까지 미리 해놓았다. 젊은 주인 어르신은 주인님과는 다르다고) 어떠한 긴장감도 없이 수긍하며 환호하는 모습이라니... 이렇게 순식간에 환호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어이없을 무...!
'구원자이자 해방자로서의 백인', 북군에 팽배해있었던 '노예제 폐지와 남북 전쟁에 대한 정당성의 부여' 라는 시각은 작가 자신의 개인적 시각이라기 보다는 미국 북부의 노예 해방론자들의 일반적인 시각을 작품에 구현한 대변자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작품에 등장하는 하나하나의 스토리들이 실감나면서도 흥미진진한 서사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최대 강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뒤죽박죽 엉망진창인 미국 워싱턴의 비능률적이고 관료주의적인 병원 운영을 유쾌한 시선으로 비웃기도 하고 여전히 흑인들은 자신들이 교화하고 해방시켜주어야만 할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들도 백인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으며 노예제 폐지 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그들을 따뜻한 시선과 인간의 밝은 점을 부각시켜 서술한 점이 이 소설을 읽으며 발견한 작가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역시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잘 읽히는 법이니까... 여러가지 눈에 거슬리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ㅡ 무엇보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1863년, 링컨 대통령이 그 해 1월 1일 노예 해방문을 발표하고 공식적으로 노예 해방을 이룬 해이다. 무려 160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 동안 세상은 아마 백만 번도 더 변화했을 것이다 ㅡ 분명 또 배울 점이 남는다는 것은 나름의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병원 스케치'와 '나의 콘트라밴드'는 사실 아주 재미 있었다. 왜 책 제목이 <초월주의의 야생귀리>인건지 이해가 안 될 만큼.
아참참...... 도망친 남부의 노예를 북부로 도망시켜주는 비밀조직인 "지하철도(Underground Railfoad)"의 활약을 다룬 콜슨 화이트헤드의 소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읽었을 때 그 지하철도의 역으로 집을 제공해준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는데, 루이자 메이 올컷의 집도 잠시이긴 하지만 지하철도의 역으로 제공(1847년, 작가 연보 참조함)한 적이 있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노예제 폐지를 찬성한 작가에게 감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