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곧 법이라는 그럴듯한 착각
스티븐 러벳 지음, 조은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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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에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라는 영화를 봤다. 미국의 유명한 스릴러 작가 마이클 코넬리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는데, 영화 속의 주인공은 그야말로 링컨 차를 타는 소위 잘나가는 변호사다. 이 멋쟁이 변호사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주장하는 부유한 의뢰인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법정 스릴러 영화였다. 문제는 의뢰인이 억울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그리고 의뢰인은 철저하게 이 유능한 변호사를 이용해 먹는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을 실감나게 만들어주는 멋진 영화였다. 마침내 변호사는 법의 테두리 언저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이 악당을 응징한다. 내가 보기에 변호사의 행위는 통쾌했는데 과연 그가 생각한 정의가 법이었을까? 미국 법학계의 전설로 불리는 스티븐 러벳 교수는 자신의 저서 <정의가 곧 법이라는 그럴듯한 착각>에서 독자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도대체 무엇이 정의인가라고.

 

초반에 나오는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악명을 떨친 빌 클린턴 대통령의 에피소드에서 이 책의 원제인 정직의 중요성을 러벳 교수는 강조한다. 자신이 아칸소 변호사였던 젊은 대통령은 탄핵위기에 몰려 사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보호할 유능한 변호인을 선임한다. 문제는 클린턴이 작금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속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그는 심지어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줄 변호인에게까지 거짓말을 했다. 결국 케네스 검사의 리포트를 통해 치욕적인 사실들이 폭로됐고, 대통령 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사실 스캔들보다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빌 클린턴이 전 미국인을 상대로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러벳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사법 시스템의 이모저모를 독자에게 들려준다. 사실 우리나라 같이 보통의 사람이 사법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법이란 그저 다른 세계의 일처럼 들린다. 그래서 정작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에 법정에 서게 되는 경우, 그야말로 패닉에 빠지는 것이 보통이다. 영화 목장의 결투>의 주인공인 와이어트 어프 형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이 사건에서 우리는 난폭한 무법자들을 보안관 어프 형제가 멋진 권총 실력으로 제압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건 직후 이 용감한 형제는 바로 살인죄로 체포됐고 법정에 서게 됐다. 저자는 고도로 훈련받은 이들만이 제대로 된 법정 증언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얼마 전에 본 영국 드라마 <셜록 홈즈>에서도 결정적 순간에 대한 기억력이 62% 밖에 되지 않는다고 잘난 셜록이 말했다. 법정에서 사건에 대한 재구성을 시도하지만, 아쉽게도 자신이 가진 관점, 시야, 예상, 편견 그리고 희망 같은 다양한 요소로 진실을 말하는 증인들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반대심문이야말로 과거의 재구성에 있어 중요한 법적 동력이 될 수 있다고 그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바로 뒤따라 나오는 글은 6년 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과 인지오류에 대한 저자의 냉철한 분석이다. 이 사건은 총격 사건의 범인이 한국계 조승희였다는 점에서 우리의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저자는 그런 인종/민족적 관심이 아니라 사건의 초동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해 더 큰 재앙을 초래한 경찰의 인지오류를 지적한다. 사건 초기에 경찰은 체계적인 방식대로 수사를 진행했지만, ‘탐색만족오류에 빠져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진짜 범인을 방치해둔 것이 범인에게 2차 총격을 시행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주었다고 지적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글은 <사법체계가 야구라면 판사는 심판>이다. 무척이나 야구를 좋아하는데, 나도 직접 본 경기를 예로 들어서인지 정말 쏙쏙 이해가 갔다. 20051012,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인 US 셀룰라 필드에서 LA 에인절스와의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결정전 2차전이 벌어졌다. 9회 말 현재 스코어는 1:1 동점 상황 그리고 에인절스에게 첫 경기를 내준 화이트삭스는 홈에서 이 경기마저 내준다면 월드시리즈 진출은 물 건너 가는 상황이었다. 이미 투아웃 상황에서 AJ 피어진스키가 타석에 들어섰다. 피어진스키는 마지막 공을 헛스윙을 하고, 에인절스 수비진은 이닝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덕아웃으로 뛰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에딩스 주심은 아웃 판정을 하지 않았고, 약삭 빠른 피어진스키는 1루까지 내달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선수가 아닌 심판이 플레이어가 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의심스러운 상황이라면 주심은 다른 부심이나 혹은 비디오 판독을 통해 아웃인지 아니면 그의 주장대로 인플레이 상황인지 물었어야 했다. 이 플레이 하나로 화이트삭스는 기사회생하며 결국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하게 됐다. 오심도 야구 경기의 일부라지만, 사법체계에서는 심판/판사의 오심으로 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러벳 교수는 경고한다.

 

판사들의 연봉 인상 주장에 대해서도 저자는 한 쪽 편에 치우친 주장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사실 공직에 복무하는 판사의 월급이 잘나가는 로펌 변호사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사법집행을 맡은 판사의 사기 진작 차원에서 보상 제도를 손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단순한 접근 방식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날선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호사들의 직업 불만족도를 지적하면서,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실을 지적한다. 반면, 연방판사들은 독립적인 법질서 수호를 위해 탄핵과 정치적 간섭 혹은 보복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안전장치가 준비되어있다. 그리고 예전 로마 시대 공직자들이 그랬듯이 물질적 보상이 아닌 시민에 대한 봉사 차원에서 여전히 판사직을 희망하는 젊고 유능한 변호사들이 많다는 건 그만큼 미국 사회가 건강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사법체계란 정말 따분하고 지루할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재밌고 신선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나같은 법에 문외한도 쉽게 읽을 수 있고 또 생활에 유용한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정보들이 반가웠다. 여전히 우리는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 지배하는 원더랜드에 살고 있지만, 공명한 디케의 눈이 우리를 진실의 세계로 인도하리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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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 - 이현수 장편소설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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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현충일이었다. 63년 전, 한국전쟁에서 그리고 그보다 앞선 독립운동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친 호국영령들을 다시 한 번 새겨 보는 시간에, 나는 이현수 작가의 <나흘>을 읽고 있었다. 미국 정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노근리 학살사건을 전면에 내세운 <나흘>의 힘은 정말 위력적이었다. 사실 그동안 짧은 뉴스를 통해 피상적으로만 접해 오던 노근리 학살사건의 실상을 소설로 다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하고 싶다. W.G. 제발트의 주장대로, 문학의 순기능이 제대로 발현되었고나 할까.

 

저자가 말미에서 밝힌 대로, 노근리 학살만으로는 서사의 진행이 쉽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반세기 전에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일어섰던 동학혁명에서 시작해서 국권상실, 식민지 지배 그리고 한국전쟁에 이르는 그야말로 치열했던 한국 현대사를 소설 <나흘>은 관통하고 있다. 양세계보를 중시하는 내시 가문 출신의 김진경은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황간 출신의 다큐작가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 그녀에게 황간/노근리라는 공간은 다시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장소로 등장한다. 하지만, 연어가 자신의 뿌리를 거부할 수 없듯이 그녀 역시 소설적 장치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와 모두가 숨기고 싶어하는 19507월의 노근리의 진실을 파헤치는 임무가 주어진다.

 

제발트의 조국이자 패망한 독일 사람들이 그랬듯이, 당시 노근리 학살을 직접 체험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발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찢어 버린다. 진경의 끈질긴 추적 끝에 조금씩 베일을 벗기 시작하는 사실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이현수 작가는 이런 역사적 사실에, 두 세대를 건너 뛰어 내시 가문의 양자로 들어와 이제는 역사의 증인이 된 김태혁에게 진실을 밝히는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한다. 모든 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이들은 자신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

 

진경과 그녀의 할아버지 태혁의 교차되는 서사 구조는 작가가 말하고 싶은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사실감과 집중도를 극대화시킨다. 물론, 중간 중간에 끼어드는 부정확한 기억 혹은 원한에 의한 의도적 왜곡도 있지만 도대체 노근리의 쌍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진실 탐구의 여정인 쉼 없이 계속된다. 진경이 없었더라면, 황간 사람들의 태생적 외지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서울에서 내려온 다큐팀만으로는 진경이 소설에서 파헤쳤던 것처럼 사실의 본질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 부채의식처럼 남은 상호간의 죄의식 때문에, 집단적 기억상실로 처리된 과거사는 더더욱 주민들의 발목을 잡는 장치로 작동한다.

 

개인적으로 전쟁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이현수 작가가 다룬 한국전 초기의 상황에 대한 기술은 자못 흥미를 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의 군세를 얕본 미군의 판단 착오로 남진하는 북한군을 대전에서 막겠다는 윌리엄 딘 소장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자신마저 북한군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는다. 설상가상으로 북한 정규군 일부가 피란민으로 위장해서 후방을 교란한다는 첩보 때문에 전쟁 당시 한국에 대해 무지한 미군은 양민과 북한 게릴라를 구분하지 못하고, 마침내 노근리 쌍굴의 비극을 잉태하게 된다. 당시 기록을 보면 여자와 아이들도 전선을 넘지 못하게 하라는 명확한 명령이 기재되어 있다. 도대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미군은 여자와 아이들도 모두 북한군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최소한의 상식도 먹히지 않는 전쟁의 비참함이 느껴졌다.

 

예의 노근리에서 지옥 같았던 나흘을 보낸 이들은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의 행로를 걷게 된다. 피해자였던 이들은 총상과 화상으로 신체가 훼손되어 자발적으로 격리된 삶을 살거나, 살기 위해 해서는 안될 짓을 한 업보로 폐인이 되거나,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기억의 한 페이지를 삭제해 버린 다수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비극이었다. 가해자 대표로 나오는 버디 웬젤(Buddy Wenzel) 역시 마찬가지다. 장기판의 졸처럼 부려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마지막가지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한 청년의 이야기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소설에도 등장하는 BBC 다큐멘터리 <Kill Them All>에도 직접 출연해서 지난 과거에 대해 괴로워하는 그의 양심적인 행동이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물론 또 한편에서는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한 전쟁범죄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속도감 넘치는 소설의 중반부의 전개에 비해 이 모든 이야기의 대단원을 맺어야 하는 결말이 좀 아쉬웠다. 동학혁명, 일본의 식민지배 그리고 다시 해방과 한국전쟁에 이르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아우르는 결말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모더니즘 소설을 연상시키는 성급한 엔딩은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수가 없다. 하지만 산 자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역사의 기록으로서 문학이 가진 본령이 참 마음에 들었다. 기회가 되면 2007년에 발표된 이상우 감독의 노근리를 다룬 영화 <작은 연못>도 한 번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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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를 통해 어렴풋이
김기연 지음 / 그책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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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처음으로 접한 음악을 듣는 도구는 바로 카세트 플레이어였다. 그 시절을 풍미했던 독수리표 카세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 집에서 텔레비전을 빼고 유이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치였다. 이제 구식이 되어 버렸지만, 에잇트랙(eight track)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카세트 플레이어, 휴대용 워크맨 CD 플레이어 그리고 지금의 mp3 플레이어에 이르기까지 참 음악 미디어가 많이 바뀌었구나 싶다. 그 시절에는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음악들이 참 많았는데 이젠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못 듣는 음악이 없는데 음악에 대한 열의는 예전만 못하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청소년기를 함께 보낸 추억의 음악/음반들을 카피라이터, 캘리그래퍼 혹은 아트 디렉터라는 다양한 타이틀을 가진 김기연 씨의 <레코드를 통해 어렴풋이>에서 만나볼 수가 있었다.

 

솔직히 이 책에서 소개된 레코드 앨범 커버를 통해 해당 음반의 뒷이야기 혹은 아티스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내 기대와는 달리 <레코드를 통해 어렴풋이>는 전적으로 김기연 씨가 만난 음악/음반에 대한 사설(私設)이 주를 이룬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령 예를 들어 정말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하드록 그룹인 레드 제플린의 전설적 네 번째 앨범 파트에서 지미 페이지의 신들린 듯한 기타 연주보다 표지에 나온 노인네가 등에 진 땔나무에서 바로 아궁이 솥밥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 간다. 그 유명한 <천국의 계단>(stairway to heaven)에 대한 언급은 조금도 없이.

 

한창 전성기를 도모하던 시절의 빌리 조엘의 앨범에서도 역시나 내가 궁금해 하던 앨범에 대한 에피소드나 그 음반에 실린 수록곡에 대한 이야기 대신, 당당하게 짱돌로 유리집을 쳐부수려는 어느 용감한 사나이에 대한 헌사로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실 이름은 정말 많이 들어 봤으나 80년대 달달한 팝송에 물든 청소년기를 보낸 나에게 유라이어 힙 혹은 제스로 툴 같은 밴드의 이름은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언젠가 대학로에 있는 LP바에 들러 그야말로 밤을 세워 가며, 어려서 한창 듣던 헤비메틀/하드록 음악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 가게의 주인장 역시 이제는 구하기도 어려운 플라스틱 LP로 음악듣기를 고집하는 아날로그 예찬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시절 누구나 다 LP를 들을 적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이제 LP는 그야말로 극소수의 매니아들만 찾는 레어 아이템이 되면서 그 희귀성 때문에 자체가 예스러움의 정수가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말로만 듣던 롤링 스톤즈의 그 유명한 <스티키 핑거즈>의 앨범 표지를 보며 정말 앨범에 지퍼가 달렸을까? 직접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 더블 앨범도 그렇게 가지고 싶어했지만 결국 수중에 넣지 못하지 않았나 싶다. 떨렁 전화기 사진 하나만 걸어 놓은 J 가일즈 밴드의 앨범 표지도 참 인상적이다. 이제 CD 시절에는 불가능해져 버린 앨범을 쭉 펼치면 원래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그것이 나오는 앨범 트릭도 이젠 찾아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외국의 저명한 레이블 소개는 개인적으로 좋았는데,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요즘에는 거의 음악을 듣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그 시절에는 레이블만으로도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음반을 골라낼 수가 있었다. 영국 출신 가수들이 주로 애용하던 버진, 크리설리스 같은 이제는 추억의 저장고에서나 들을 수 있는 레이블 이름이 참 반가웠다. 역시 영국 출신 밴드인 데프 레퍼드도 버티고 레이블이었던 것 같은데 왜 히트곡 <Pour Some Sugar On Me>가 국내 라이선스 음반에서는 들을 수가 없었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책에 실린 흑백 사진을 보며 또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클래식 음반에 관한 부분이었다. 한 벽면을 가득 채운 LP판 중에 분명 클래식 음반도 있을 텐데, 한 장의 사진에 실린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 발터 기제킹, 소설 <새벽의 약속>에도 카메오로 등장하는 로맹 가리가 그렇게 부러워하던 예후디 메뉴인 그리고 베를린필 카라얀의 전임이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사진이 실린 앨범 표지를 보니 클래식에 대해서도 좀 다뤄줬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여전히 몇 장의 레코드를 가지고 있다. CD가 널리 보급되면서 애지중지하던 음반들을 모두 친한 친구에게 줘 버렸지만, 그 뒤에 어찌어찌해서 손에 넣게 된 레코드는 레코드 플레이어의 부재로 들어 보지도 못했다. 나중에라도 기회가 닿게 되면 레코드 플레이어를 구해서 들어 보고 싶다. 그 희망이 언제나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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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유작 1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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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論爭) [명사]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주장을 말이나 글로 논하여 다툼

 

이것이 국립국어원 누리집에 있는 논쟁에 대한 정확한 정의다. 이번에 읽은 영국출신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문학비평가인 크리스토퍼 에릭 히친스가 식도암으로 사망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에세이 모음집의 제목 역시 자신이 촉발시킨 여러 가지 논쟁을 연상시킨다. 자신이 책에서도 밝히다시피 무신론자인 히친스는 영국 포츠머스에서 태어나 미국을 또 다른 조국으로 삼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테레사 수녀,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 헨리 키신저, 다이애나 황태자비, 에인 랜드 그리고 최근 사임한 베네딕트 16세에 이르기까지 저명한 인물들을 혹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정치적 성향도 매우 복잡해 보이는데, 전통적으로 좌파 스탠스를 유지하면서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비판해대는 그야말로 전투적 사회 비판자라는 타이틀로 부르고 싶다.

 

모두 4부로 이루어진 히친스의 유고 에세이집에서 유독 나의 눈길을 끄는 이야기는 바로 세 번째 <외국 이야기>였다. 서문에서 작가가 애도한 소위 <자스민 혁명>을 촉발시킨 튀니지의 어느 이름 모를 청년의 죽음이 있기 전, 중동의 소국 레바논에서 조용하게 이뤄진 <백향목 혁명>으로 사실상 레바논을 점령하고 있던 시리아를 몰아낸 시민혁명 뒤에 도사린 신나치 운동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진보 지식인답게, 미국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꼬일 대로 꼬여 버린 팔레스타인에서 사사건건 이스라엘 편을 드는 미국의 어리석은 행동을 더러운 늪에 끌려 들어가 막대한 비용을 치르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재앙이라고까지 말한다. 주류 미국 사회에서 미국 외교의 최우선인 이스라엘 정책을 이렇게까지 비평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가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2002년 지금은 전임 대통령이 된 부시가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지명한 이란 방문기도 인상적이다.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붕괴한 이래, 중동의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 이란을 직접 방문한 히친스는 현재 종교지도자들이 국가를 이끄는 신정국가 스타일보다 세속적 민주주의 시스템이야말로 급속도로 희망을 잃고 붕괴되어 가는 이란의 해답이라고 진단한다. 그가 직접 이란에서 만난 보통 사람들 역시 거의 신으로 추앙하는 아야톨라 호메이니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고, 공식적으로는 금지된 것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거래되는 상황을 육성으로 증언한다.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100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들이 발생하고, 그에 대한 인적 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물라들이 지속적인 출산장려를 유도해서 이란은 젊은 국가가 되었지만 막대한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가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그들이 원하는 자유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팔레비 샤가 추진하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기어이 완수한 이란 지도자들의 거짓말 역시 그의 주요 비판 대상이다.

 

그의 외국 이야기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건 아무래도 우리와 휴전선을 접하고 있는 나라 북한에 관한 것이다. 어떤 계기로 해서 이 동토의 왕국을 방문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북한에 대한 소개는 비교적 제3자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밤중에 인공위성을 통해 한반도를 본다면 남쪽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지만, 심각한 전력 부족으로 인해 그 북쪽은 암흑천지란다. 그리고 작가가 묘사하듯이 조지 오웰의 <1984>보다 더 한 통제국가, 더 나아가 모든 인민이 병영국가의 노예가 된 노예국가라는 지적은 통렬하기까지 하다. 노예국가의 기본은 최소한 백성은 굶기지 않는다는 것인데 북한 체제는 심지어 그런 국가가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리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가 만난 가이드 혹은 안내원으로부터 들은 것에 기초해서 북한은 최악의 인종차별주의 국가라는 말도 빠트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철저한 폐쇄주의를 고집하다 보니 외부와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순혈주의에 집착한 한 개인의 의견일 수도 있는데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비약해서 확대해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논쟁에 대한 균열은 <두목 우고>에서 극대화된다.

 

히친스는 지금은 작고한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에 대한 글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스페인 지배에서 해방시킨 시몬 볼리바르 장군의 유해를 무덤에서 꺼낸 차베스를 정치적 시간(屍姦)증에 빠진 인물이라고 폄하한다. 차베스와의 대화 중에 그가 제기하는 미국의 달 착륙 음모론을 심각하게 지적하면서 한 국가의 수반을 거의 또라이로 몰아가는데 전념한다. 어떤 지도자고 흠결이 없는 사람이 있었던가. 자신이 조국으로 선택한 나라의 전임 대통령 역시 똘기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았던가. 크리스토퍼 허친스는 왜 우고 차베스가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의 미국 내 자회사인 시트고(CITGO)를 통해 뉴욕을 위시한 미국 전역의 빈민들에게 난방유 할인 프로그램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은 외면하는지 모르겠다. 세계 최강의 국가라는 미국이 제3세계 국가 중의 하나인 그야말로 가진 거라고는 석유 하나 밖에 없는 나라와 정치적 시간증에 빠진 엉터리 지도자로부터 그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직면하기 두려웠던 게 아닐까? 물론 프로파간다 전술적인 차원에서 차베스의 석유 1억 배럴이 그 이상의 선전 효과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이 지점이야말로 작가가 도발한 논쟁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외국 이야기에서 다음은 문학 비평가로서 히친스의 일면을 들여다 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새로운 전기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는다. 전투적 무신론자답게 미국을 신정국가로 만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프랭클린의 인본주의적 모습을 보라고 일갈한다. 그가 꼽은 신생국가의 진정한 리더로 묘사되는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해서도 우리가 원하는 모습과는 다른 실체를 보여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링컨이 노예해방령을 선포하고 내전에 돌입하기 전에 그 자신이 폭군 아버지의 노예였던 시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비록 한때 인종주의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는 했지만 이 위대한 대통령이 끊임없이 흑백의 평등을 공부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화 <링컨>에서 헌법을 고치기 위해 반대파인 민주당 의원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수하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협상의 중요성을 숙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뉴프론티어 정신을 외치며 젊은 미국, 강한 미국의 상징이 된 JFK에 이르러서는 한 걸음 더 나간 과격한 주장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바드 출신 전쟁영웅으로 사십대 대통령으로 이제는 신화가 된 JFK가 실제로는 대학시절 무절제한 성관계로 비롯된 만성 요도염으로 대통령 임기 내내 각성제 암페타민을 필두로 다양한 종류의 약물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폭로한다. 그가 젊은 대통령으로서 보여준 활기차고 멋진 이미지 뒤에는 이런 아름답지 않은 사실이 있었노라고 폭로한다. 솔직히 바람둥이로 악명 높은 JFK에 얽힌 다양한 스캔들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된 불편한 진실은 JFK 신화를 허물기 시작한다. 과연 이렇게 각성제와 진통제로 엉망이 된 JFK가 대통령 직무 수행에 있어 문제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점이 히친스가 지적하는 핵심이다. 물론 그가 리뷰한 <미완성의 삶>의 저자 로버트 달렉을 조롱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역시 책쟁이로서 가장 관심이 가는 히친스의 글은 나보코프의 <롤리타> 서평이었다. 그의 주장대로 책을 읽는 나이에 따라 그 책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험버트 험버트를 강간범으로 생각하는 작가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러시아 출신 노대가의 작품을 마음껏 조롱하면서, 그는 나보코프가 소설의 곳곳에 부비트랩처럼 심어 놓은 중의적인 표현들을 굳이 해석하려는 수고를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나이 어린 뮤즈에 대한 중년 신사의 성적 갈망을 프리송’(frisson)이라고 비하하는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일갈 때문에 아직 읽지 않은 <롤리타>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길까봐 두려울 정도로 신랄한 비판이었다.

 

<논쟁>을 읽으면서 작고한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대단한 글쟁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떤 주제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서양에서 글 좀 쓴다 하는 먹물들이 그렇듯, 빈번한 라틴어 사용은 눈에 거슬렸다. 가톨릭에서도 잘 쓰지 않으려고 하는 사어(死語)에 대한 식자층의 미련이라고나 할까. 이 책을 통해 논쟁적인 주제를 접하면서 다시 한 번,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쪽만 바라보게 된다는 사실을 느꼈다. 히친스 같은 고수도 그럴진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절묘한 균형감각과 판단력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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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14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겨울잠, 봄꿈
한승원 지음 / 비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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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몇 년 만의 만남이던가. 5년 만에 한승원 선생의 신작 <겨울잠, 봄꿈>과 만날 수가 있었다. 내가 읽은 선생의 첫 번째 책이 정약용 선생에 대해 쓴 <다산>이었는데 이번 책에서는 녹두장군 전봉준과 만나게 됐다. 한 선생이 말미에 적은 것처럼, 한 커트 단위의 짧은 구성 때문인지 우리가 의도적으로 잊고 있던 백여 년 전 역사의 기록이 순식간에 되살아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단박에 읽어냈다.

 

갑오년(1894) 척양척왜, 보국안민을 기치로 봉기한 동학군은 그야말로 벌떼처럼 호응하는 민중의 힘으로 호남 일대를 석권한다. 호남 제일성이라는 전주성을 위시한 호남 곳곳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이 실시되어, 동도를 따르던 이들이 꿈꾸던 공화세상이 열리는가 싶었지만 더 이상 민중을 제어할 힘이 없던 지배계층이 바다 밖의 호랑이와 늑대를 불러들여 그들의 희망을 꺾어 버린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의 힘을 빌려 한양으로 진군하던 십만 동학군을 우금치 고개에서 전멸시켜 버린 관군은 이전의 전주화약을 무효로 돌리고, 동학군을 뿌리째 섬멸하는 이른바 청야작전에 나선다.

 

일패도지하여 예전에 수하에 있던 김경천의 예언대로 순창 피로리로 숨어든 녹두장군. 마치 겟세마네에서 자신을 배신한 가룟 유다와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 이채롭다. 녹두장군은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을 알고, 자신의 운명을 배신자 김경천에게 넘겨주려고 호랑이굴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다. 이건 마치 구리산에서 패배하여 마지막 해하싸움에서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던 항우의 최후를 떠올리게 한다. 녹두장군에게 체포와 이어지는 한양으로의 압송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팩션의 구성을 따르는 <겨울잠, 봄꿈>에는 이토 겐지라는 아주 특이한 인물이 배치된다. 조선 출신으로 탐관오리의 학정에 못 이겨 일본에 밀항한 조선인 천종관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가 되어 몸과 영혼을 모두 팔아 먹은 실존적 존재로 등장한다. 새로 거듭난 이토 겐지는 녹두장군의 압송을 주도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회유하여 그가 신봉하는 일본제국의 충성하는 침략의 대리인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에 필연적으로 따른 녹두장군의 인간적 고뇌, 다시 말해 이제 겨우 마흔의 나이로 죽기에 너무 아까운 나이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근대판 유다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으리라.

 

한양으로 향하는 압송 길에서 장군을 더 힘들게 하는 것들은 이토 겐지의 달콤한 유혹만이 아니었다. 발등이 으깨지고, 정강이가 부서진 장군을 가마에 태운 가마꾼들이 용도가 다해질 때마다 그들을 무참하게 처치하고, 장군과 일행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민가를 약탈하는 모습은 장군을 더욱 더 괴롭게 만든다. 자결을 우려해서 입에 재갈을 물리고 국밥이나 먹거리를 미음처럼 씹어 그에게 공급하는 건 치욕에 다름 아니었다.

 

순창 피로리에서 시작되어,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웠던 나주성의 민종렬과의 조우, 한때 파죽지세로 점령해서 결국 정부와 화약을 이끌어낸 전주성을 돌아 자신이 사술을 부려 적의 총탄을 피할 수 있다는 궁궁을을 부적을 썼지만 결국 일본군의 압도적인 기관총 화력에 패주한 우금치에 이르기까지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은 쉼 없이 내달린다. 이 과정을 통해 독자는 교과서에서 피상적으로 접했던 동학, 집강소 그리고 폐정개혁 같은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한낱 서당 선생에 지나지 않았던 녹두장군이 왜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에 맞서 싸우게 되었는지, 그리고 한 번 호랑이 등에 올라탄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죽을 때까지 내달릴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는 모두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이유가 바로 밥에 대한 싸움이었노라는 그의 일갈이 쟁쟁하다. 모름지기 나라님이라면, 현대의 위정자라면 백성이 마음 편하게 밥을 먹도록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먹을 밥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구멍으로 넘어 가는 꼴은 도저히 못보겠다는 생각이 녹두장군을 봉기로 이끌었던 게 아닐까. 아니 모두가 평등한 공화세상에서 적어도 슬픈 밥은 없게 만들자는 것이 장군의 유지였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현재는 그가 꿈꾸던 다음 세상의 이상이 현실화됐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가 있을까.

 

압도적인 군세를 바탕으로 정부를 압박해서 얻어낸 화약의 결정체인 집강소 설치는 세계 최악의 신분제 국가였던 조선 백성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소설에서도 언급된 만적, 임꺽정 그리고 홍경래 등으로 이어지는 민중봉기가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그야말로 보수사회에서 주민자치 단체인 집강소를 통한 새로운 국가 건설의 꿈은 외세의 개입과 동학운동의 실패 그리고 녹두장군의 죽음으로 봄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녹두장군이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여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일시적으로 굴종하고 새로운 기회를 도모하는 것이 또 하나의 방법은 아니었을까. 그 모든 가능성을 부인하고 녹두장군은 자신의 죽음으로 썩어 빠진 조정의 현실을 만방에 알리고, 청사에 마지막 조선 사람으로 남기를 선택한다.

 

실존하는 녹두장군의 마지막 사진이 책의 앞뒤에 실려 있다. 작가는 녹두장군의 실질적인 마지막 순간에 대한 절묘한 기술을 통해 전봉준이 왜 그 숱한 수모를 견디며 죽기 위해 살아남았는지 설명한다. 118년이 지나도 여전히 불의가 사라지지 않는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장군의 의연한 죽음이 갖는 의미를 <겨울잠, 봄꿈>은 조용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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