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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ㅣ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유작 1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논쟁(論爭) [명사]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주장을 말이나 글로 논하여 다툼
이것이 국립국어원 누리집에 있는 ‘논쟁’에 대한 정확한 정의다. 이번에 읽은 영국출신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문학비평가인 크리스토퍼 에릭 히친스가 식도암으로 사망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에세이 모음집의 제목 역시 자신이 촉발시킨 여러 가지 논쟁을 연상시킨다. 자신이 책에서도 밝히다시피 무신론자인 히친스는 영국 포츠머스에서 태어나 미국을 또 다른 조국으로 삼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테레사 수녀,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 헨리 키신저, 다이애나 황태자비, 에인 랜드 그리고 최근 사임한 베네딕트 16세에 이르기까지 저명한 인물들을 혹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정치적 성향도 매우 복잡해 보이는데, 전통적으로 좌파 스탠스를 유지하면서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비판해대는 그야말로 전투적 사회 비판자라는 타이틀로 부르고 싶다.
모두 4부로 이루어진 히친스의 유고 에세이집에서 유독 나의 눈길을 끄는 이야기는 바로 세 번째 <외국 이야기>였다. 서문에서 작가가 애도한 소위 <자스민 혁명>을 촉발시킨 튀니지의 어느 이름 모를 청년의 죽음이 있기 전, 중동의 소국 레바논에서 조용하게 이뤄진 <백향목 혁명>으로 사실상 레바논을 점령하고 있던 시리아를 몰아낸 시민혁명 뒤에 도사린 신나치 운동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진보 지식인답게, 미국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꼬일 대로 꼬여 버린 팔레스타인에서 사사건건 이스라엘 편을 드는 미국의 어리석은 행동을 ‘더러운 늪’에 끌려 들어가 막대한 비용을 치르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재앙이라고까지 말한다. 주류 미국 사회에서 미국 외교의 최우선인 이스라엘 정책을 이렇게까지 비평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가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2002년 지금은 전임 대통령이 된 부시가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지명한 이란 방문기도 인상적이다.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붕괴한 이래, 중동의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 이란을 직접 방문한 히친스는 현재 종교지도자들이 국가를 이끄는 신정국가 스타일보다 세속적 민주주의 시스템이야말로 급속도로 희망을 잃고 붕괴되어 가는 이란의 해답이라고 진단한다. 그가 직접 이란에서 만난 보통 사람들 역시 거의 신으로 추앙하는 아야톨라 호메이니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고, 공식적으로는 금지된 것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거래되는 상황을 육성으로 증언한다.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100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들이 발생하고, 그에 대한 인적 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물라들이 지속적인 출산장려를 유도해서 이란은 젊은 국가가 되었지만 막대한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가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그들이 원하는 자유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팔레비 샤가 추진하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기어이 완수한 이란 지도자들의 거짓말 역시 그의 주요 비판 대상이다.
그의 외국 이야기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건 아무래도 우리와 휴전선을 접하고 있는 나라 북한에 관한 것이다. 어떤 계기로 해서 이 동토의 왕국을 방문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북한에 대한 소개는 비교적 제3자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밤중에 인공위성을 통해 한반도를 본다면 남쪽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지만, 심각한 전력 부족으로 인해 그 북쪽은 암흑천지란다. 그리고 작가가 묘사하듯이 조지 오웰의 <1984>보다 더 한 통제국가, 더 나아가 모든 인민이 병영국가의 노예가 된 노예국가라는 지적은 통렬하기까지 하다. 노예국가의 기본은 최소한 백성은 굶기지 않는다는 것인데 북한 체제는 심지어 그런 국가가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리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가 만난 가이드 혹은 안내원으로부터 들은 것에 기초해서 북한은 최악의 인종차별주의 국가라는 말도 빠트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철저한 폐쇄주의를 고집하다 보니 외부와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순혈주의에 집착한 한 개인의 의견일 수도 있는데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비약해서 확대해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논쟁에 대한 균열은 <두목 우고>에서 극대화된다.
히친스는 지금은 작고한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에 대한 글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스페인 지배에서 해방시킨 시몬 볼리바르 장군의 유해를 무덤에서 꺼낸 차베스를 정치적 시간(屍姦)증에 빠진 인물이라고 폄하한다. 차베스와의 대화 중에 그가 제기하는 미국의 달 착륙 음모론을 심각하게 지적하면서 한 국가의 수반을 거의 또라이로 몰아가는데 전념한다. 어떤 지도자고 흠결이 없는 사람이 있었던가. 자신이 조국으로 선택한 나라의 전임 대통령 역시 똘기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았던가. 크리스토퍼 허친스는 왜 우고 차베스가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의 미국 내 자회사인 시트고(CITGO)를 통해 뉴욕을 위시한 미국 전역의 빈민들에게 난방유 할인 프로그램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은 외면하는지 모르겠다. 세계 최강의 국가라는 미국이 제3세계 국가 중의 하나인 그야말로 가진 거라고는 석유 하나 밖에 없는 나라와 정치적 시간증에 빠진 엉터리 지도자로부터 그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직면하기 두려웠던 게 아닐까? 물론 프로파간다 전술적인 차원에서 차베스의 석유 1억 배럴이 그 이상의 선전 효과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이 지점이야말로 작가가 도발한 ‘논쟁’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외국 이야기에서 다음은 문학 비평가로서 히친스의 일면을 들여다 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새로운 전기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는다. 전투적 무신론자답게 미국을 신정국가로 만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프랭클린의 인본주의적 모습을 보라고 일갈한다. 그가 꼽은 신생국가의 진정한 리더로 묘사되는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해서도 우리가 원하는 모습과는 다른 실체를 보여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링컨이 노예해방령을 선포하고 내전에 돌입하기 전에 그 자신이 폭군 아버지의 노예였던 시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비록 한때 인종주의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는 했지만 이 위대한 대통령이 끊임없이 ‘흑백의 평등’을 공부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화 <링컨>에서 헌법을 고치기 위해 반대파인 민주당 의원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수하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협상의 중요성을 숙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뉴프론티어 정신을 외치며 젊은 미국, 강한 미국의 상징이 된 JFK에 이르러서는 한 걸음 더 나간 과격한 주장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바드 출신 전쟁영웅으로 사십대 대통령으로 이제는 신화가 된 JFK가 실제로는 대학시절 무절제한 성관계로 비롯된 만성 요도염으로 대통령 임기 내내 각성제 암페타민을 필두로 다양한 종류의 약물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폭로한다. 그가 젊은 대통령으로서 보여준 활기차고 멋진 이미지 뒤에는 이런 아름답지 않은 사실이 있었노라고 폭로한다. 솔직히 바람둥이로 악명 높은 JFK에 얽힌 다양한 스캔들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된 불편한 진실은 JFK 신화를 허물기 시작한다. 과연 이렇게 각성제와 진통제로 엉망이 된 JFK가 대통령 직무 수행에 있어 문제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점이 히친스가 지적하는 핵심이다. 물론 그가 리뷰한 <미완성의 삶>의 저자 로버트 달렉을 조롱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역시 책쟁이로서 가장 관심이 가는 히친스의 글은 나보코프의 <롤리타> 서평이었다. 그의 주장대로 책을 읽는 나이에 따라 그 책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험버트 험버트를 강간범으로 생각하는 작가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러시아 출신 노대가의 작품을 마음껏 조롱하면서, 그는 나보코프가 소설의 곳곳에 부비트랩처럼 심어 놓은 중의적인 표현들을 굳이 해석하려는 수고를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나이 어린 뮤즈에 대한 중년 신사의 성적 갈망을 ‘프리송’(frisson)이라고 비하하는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일갈 때문에 아직 읽지 않은 <롤리타>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길까봐 두려울 정도로 신랄한 비판이었다.
<논쟁>을 읽으면서 작고한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대단한 글쟁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떤 주제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서양에서 글 좀 쓴다 하는 먹물들이 그렇듯, 빈번한 라틴어 사용은 눈에 거슬렸다. 가톨릭에서도 잘 쓰지 않으려고 하는 사어(死語)에 대한 식자층의 미련이라고나 할까. 이 책을 통해 논쟁적인 주제를 접하면서 다시 한 번,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쪽만 바라보게 된다는 사실을 느꼈다. 히친스 같은 고수도 그럴진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절묘한 균형감각과 판단력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