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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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베스트셀러의 유혹? 잘 모르겠다. 그냥 이 책이 읽고 싶었다. 게다가 어제 들은 문학동네 팟캐스트 채널1 문학이야기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3년 만에 복귀해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작가의 책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다. 민음사에 이문열이 있다면, 문학동네 대표작가로 김영하가 자리매김하게 되는 건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기 전에 팟캐스트로 책의 저간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입수해서, 사실 책읽기는 어쩌면 내가 들은 것의 점검 정도였을 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의도와 그리고 날카로운 예봉의 평론가의 포인트를 듣고 나니 책읽기의 재미가 배가 된다. 저자의 우려 대로, 비슷한 제목인 아멜리에 노통브의 <살인자의 건강법>이 연상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150쪽 남짓의 경장편인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은퇴한 살인자가 마지막 살인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왜 주인공 김병수는 25년간 그만 둔 살인을 다시 결심하는 걸까? 은퇴를 번복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대두된 심각한 문제 하나가 있다. 그는 지금 시간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 현대적 병명으로 치환하자면,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말이다.

 

이미 이 지점에서 책은 충분히 독자로 하여금 흥미로움과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전직 수의사인 이 연쇄살인범은 아마추어 시인이자, 고전읽기를 즐기는 문인이다. 이미 십대에 폭력가장인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은퇴시켰고, 그를 시발로 살인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주로 활동하던 시대인 1960~70년대는 체계적인 과학수사 따위는 없었고, 사로 잡히지 않고 마음대로 무대를 휘저을 수가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매혹적인 것이 살인이었노라고 기억을 잃어가는 살인자는 담담하게 때로는 냉혹하게 기술한다.

 

작가는 초반부터 대놓고 은퇴한 살인자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치매환자라고 선포하지만, 독자들은 작가가 놓은 교묘한 덫에 바로 걸려 버린다.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오락가락하는 주인공의 정신에 대해 독자는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순간의 착란이야말로 작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반전의 복선이 아니었을까. 그 어느 때보다 느리게, 그야말로 김병수가 잃어가는 기억처럼 한땀한땀 써낸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은 순수한 악의 본질을 관통한다.

 

인간이란 존재가 결코 싸워 이길 수 없는 존재인 시간이야말로 이 소설의 중심이다. 주인공 김병수는 그리스 고전에 등장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그 사실을 잊어버린 오이디푸스를 비웃으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묻는다. 그에게 영화까지 만들어진 살인의 추억은 어쩌면 자신의 존재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사방에서 조여 들어오는 시간의 압박에 맞서 기록을 하고, 심지어 녹음까지 하며 필사적으로 맞서지만 한 때 무시무시했던 연쇄살인범의 승부는 이미 갈려있다. 다만 타이밍의 문제다. 그가 남긴 기록조차도 온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독자는 무시로 간과한다. 실제 생활에서라면 어림도 없겠지만 이 역시 문학이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어쩌면 이 점이야말로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는 재미일 것이다.

 

아직까지 김영하 작가의 다른 소설을 충분히 접해 보지 못해, 비교평가가 어렵지만 전작들에 비해 유머가 늘었다는 작가의 말대로 이 노련한 살인자는 교양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유머도 갖췄다. 일본 방문길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는 공항직원의 질문에 그는 당당하게 “killing people"이라고 대답하고, 질문자는 ”healing people"이라고 잘못 알아듣는다. 촌철의 유머가 빛나는 장면이다. 시를 가르치는 문화센터 강사도 시원찮으면 은퇴시켜 버리겠다는 그의 독백이 농담처럼 들리지만은 않는다. 전자가 밝은 차원의 유머라면, 후자는 블랙유머 쯤 되겠다.

 

개인적으로 살인자 김병수가 살인을 그만 두게 된 계기가 마지막 살인 후, 당한 교통사고 때문이라고 했는데 소설에서 그 뒤의 삶에 대한 설명부족이 좀 아쉬웠다. 살인자는 그 뒤에 어떻게 먹고사니즘을 해결했지? 소설을 보니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어 보이는데, 궁금하다. 그리고 팟캐스트에서 신형철 평론가가 역사적 특수화라는 점으로, 한국화된 시리얼 킬러의 원형을 제시했다고 하는데 좀 더 그 부분에 대해 다뤘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정의를 행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덱스터와 김병수의 차이점은 무얼까. 그 누구도 그들에게 그럴 권리를 주지 않았지만, 체포와 처벌을 아랑곳하지 않고 목표물을 제거하는 냉혹한 시리얼 킬러가 어느새 문학에서 하나의 클리셰이(cliche)의 전당에 주인이 된 건 아닐까.

 

기억을 잃어가는 이에게 두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이미 물 건너갔고, 지금인 현재도 같은 운명이다. 그에게는 역설적으로 미래기억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미래기억 역시 소멸을 전제로 그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렇게 존재의 소멸을 모른 채 혹은 외면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가가 던지는 짓궂은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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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영혼 오로라 - 천체사진가 권오철의 캐나다 옐로나이프 오로라 여행
권오철 글.사진, 이태형 감수 / 씨네21북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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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쌩뚱맞긴 하지만, 내가 아는 오로라는 오래 전 만화에 나오던 오로라 공주와 역시 요즘 개연성 없는 전개로 황당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동명의 드라마 이렇게 두 개다. 이공계 출신으로 전업 사진가인 <신의 영혼 오로라>의 저자 권오철 씨는 이 책의 서두에서 유성우와 개기일식 그리고 오로라야말로 살면서 한 번 쯤은 꼭 봐야할 자연현상으로 꼽는다. 문제는 오로라를 보러 갈 시간도 그리고 금전적 여유도 없는 보통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사진으로 어느 정도 일가를 이룬 분이니 우리 같은 먹고사니즘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부러움마저 든다.

 

남북의 극지방에서 주로 일어난다는 오로라 현상은 태양의 대전입자의 일부가 지구의 자기장에 이끌려 대기 중으로 진입하면서 공기분자와 결합하면서 발생하는 대규모 방전현상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태양과 지구가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오로라대(aurora oval)에서 주로 관찰된다고 한다. 권오철 씨는 극지방에서 주로 관찰되는 아름다운 오로라를 관찰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캐나다 옐로나이프를 추천한다. 그래서 아예 책의 표지에 보면, 캐나다 옐로나이프 오로라 여행이라고 나와 있다.

 

과학에 대해 문외한이라 이공계 출신 저자의 자세한 설명을 들어도 사실 잘 모르겠다.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일까. 아무래도 관심 밖의 일이다 보니 그런가 보다. 대신 오로라 사진 찍기나 극지방의 엽기체험 같은 건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정유정 작가의 <28>을 읽으면서 예전에 갔던 퀘벡에서 개썰매 체험을 한 번 해보고 싶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만약 오로라를 보기 위해 옐로나이프에 가게 된다면 오로라를 기다리는 낮시간에 그런 체험을 해봤으면 하는 상상도 해봤다.

 

대신 직업 사진가로서 작가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가 찍어서 책에 실은 대개의 사진은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평면 렌즈가 아닌 광각렌즈나 어안렌즈였다. 사물을 왜곡시킨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미인의 드레스 자락처럼 휘황찬란하게 펼쳐지는 장관을 담기에는 평면렌즈보다는 아무래도 광각 혹은 어안렌즈가 적합하겠구나라는 생각을 사진을 보는 순간 바로 하게 된다.

 

얼마 전, 영월 고씨동굴에 다녀왔는데 동굴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다가 동굴 안과 밖의 온도차로 발생한 습기 때문에 동굴 밖에 나와서 전혀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날까지 습해서 카메라를 말리는데 한참이 걸렸다. 되짚어 생각해 보니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초보 카메라 애호가에게는 별무소용이었으리라.

 

오로라 전문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권오철 씨는 오로라에 대한 설명과 캐나다 옐로나이프에서 오로라를 가장 관찰하기 좋은 최적의 시기와 장소 같은 귀중한 정보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보지 않았다면 알 수가 없는 그런 정보라고 생각한다. 말미에 그는 다시 한 번 평생에 한 번은 오로라를 봐야 한다고 권하고 있는데, 나의 이성은 나도 한 번은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생각과 그럴 수 없는 현실 간의 깊은 괴리의 바다에서 고민한다. 그저 이렇게 책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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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모든 것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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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작가의 <달콤시>는 나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어느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랑 이야기 정도? 자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것밖엔.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안녕, 내 모든 것>을 읽었다. 내 삶에 모든 것의 총합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내가 그동안 읽어온 것들, 통장에서 줄어드는 숫자들, 집안의 보잘 것 없는 가재도구 정도일까. , 사람들과의 관계가 빠졌구나. 어제 한 학번 아래 후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은 더더욱 나지 않는다.

 

정이현 작가는 자신이 십대시절을 보낸 1990년대를 이 소설 <안녕, 내 모든 것>의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공간은 서울. 삼총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준모, 세미 그리고 지혜. 준모는 뚜렛 증후군과 틱 장애로 입에 욕을 달고 산다. 보통 사람이어야 하는 사회에서 준모는 부적응자였을까. 중학교 입학식날, 그와 친구가 된 세미, 지혜의 삼각 결정 구조가 완성된다. 중세 이래, 삼위일체(trinity)에서 유래한 삼각형이야말로 완벽한 구조였다고 했던가. 기발한 기억력의 보유자 지혜는 일부러 평범하기 위해, 뛰어난 기억력을 성적 향상에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화자이자 나는 세미다. 세미가 지혜를 찾으면서 소설은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헤집는다.

 

성적도 보통, 외모도 보통의 나 윤세미는 한남동의 유엔빌리지에 사는 유복한 십대 소녀다. 다만 가족 구성이 좀 복잡하다.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고모와 산다. 엄마는 다단계 사기를 치고, 수배령이 떨어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미국 LA로 떠났다. 사랑 때문이라면 팔 다리 하나쯤은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결심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부모의 그늘에서 숨막히는 공간인 한남동의 유엔빌리지로 이전해 온 나.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시큰둥하다. 과연 이 성적으로 대학에 갈 수 있을까? 이제는 글쓰는 보통 여자가 아닌 작가의 페르소나가 얼핏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궁금했다, 어떻게 이런 일상의 이야기들에서 맛깔난 소설의 얼개를 잡아냈는지 말이다. 하긴 그러기에 정이현 씨가 작가겠지. 소설이 시전하는 서사 구조보다 곳곳에 담긴 시대의 흔적이 개인적으로 더 반가웠다. 김일성이 죽었을 때, 난 어디에 있었지? 그리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또 나는 어디에 있었던가. 소설 속의 지혜처럼 뛰어난 기억력은 아니지만, 삶의 한 귀퉁이 차지하는 대사건의 시절은 오롯하게 기억한다. 전자는 군대에 그리고 후자는 정선 아우라지에서 절친과 캠핑을 하며, 이웃 텐트에서 쏘주를 얻어 마셨다.

 

시절을 좀 빗겨 나가긴 했지만 준모가 애착하던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추억도 얼추 맞출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한 시절을 그렇게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친구들의 존재가 소설을 읽으면서 그렇게 마음에 와 닿을 수가 없었다. 친구란 정말 아무도 부를 수가 없을 때, 주저 없이 연락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아닐까. 물론 소설 <안녕, 내 모든 것>에서는 엄청난 비밀을 공유하게 되면서 관계가 부서지는 것을 경험해야 했지만 말이다. 아침에 마지막 부분으로 갈수록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버린 세미를 둘러싼 풍경이 언뜻 상상이 되지 않는다. 엄마를 잃고 또 아빠를 잃은 다음, 들어가 살게 된 적막하고 살벌한 공간에서 고모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잘 나가는 검사 신랑을 얻어 출가하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해피 엔딩이 아니었다. 물론, 세미가 짝사랑한 준모의 과외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은 신파 같은 설정이긴 하지만 그조차도 지나간 시대의 한 풍경 같아 좋았다. 어쩌면 지나간 시간은 모두 그렇게 보기 좋게 채색되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아싸라한 결말보다 반쯤 완성된 <안녕, 내 모든 것>의 결말이 마음에 든다. 틱 장애를 고치기 위해 스칸디나비아 반도 어디쯤에 있다는 덴마크로 간 준모의 현재는 끝내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두 친구의 재회로, 그리고 비밀찾기에 나서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냥 친구를 만나 너의 근황은 어떠니라고 묻고 싶어졌다. 나도 오늘 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너의 근황은 어떠냐고 물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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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란 무엇인가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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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을 목 놓아 기다렸다. <위험한 독서>로 처음 알게 된 김경욱 작가는 개인적으로 처음 만나 오래 이야기를 나눈 몇 안되는 작가분이라 더 정감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위험한 독서>에 나오는 독서지도사로 분해 촬영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2년 전, 할로윈 데이에 나꼼수 콘서트에서 소설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를 읽었다. 얼마 전에는 또다른 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를 읽기 시작했다. 뉴스 미디어를 통해, 이번 여름 소설대전이 벌어질 거라는 전망과 함께 오매불망하던 김경욱 작가의 장편소설이 출간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이번 여름 비밀병기는 <문장 웹진>을 통해 20123월부터 12월까지 연재한 <야구란 무엇인가>였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빨리 읽고 싶다는 마음에 부리나케 읽었다.

 

소설과 인터넷 연재의 구성이 좀 다른데, 소설 단행본의 작가의 말에서 김경욱 작가는 <야구란 무엇인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야구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시작한다. 남도의 모처에서 주인공 사내는 그토록 싫어하는 노래부르기에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분위기를 초토화시킨 후, 텔레비전으로 야구 경기를 본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진구에게 어머니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고향집으로 달려간다. 쇼펜하우어가 그랬던가, 모름지기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명확해야 한다고. 김경욱 작가는 20세기 위대한 철학가의 충고를 받아 들여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확실하게 서사를 구축한다.

 

야구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는 제목으로 시작한 이 소설의 중심에는 억울한 죽음의 연쇄반응이 자리 잡고 있다. 언제나 자신을 졸졸 따라 다니던 집안의 촉망 받던 아들이 30년 전, 빛고을에 투입된 무장군인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삶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특히 우리의 주인공 사내는 자신의 이름조차 당당하게 밝히지 못한 채 그렇게 준법의 테두리에서 살아왔다. 사내 어머니의 죽음은 어쩌면 그동안 사내가 미뤄왔던 보수설한(報讐雪恨)의 격발 장치였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문제 한 가지가 발생한다. 사내에게는 책임져야 하는 아들이 하나 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파란 토끼 아들.

 

소설은 이 지점을 지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로드트립 형식을 띠기 시작한다. 공사판을 전전하느라 아들과 접점을 만들지 못한 부상(father figure) 상실의 시대에 사내는 파란 토끼 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논리적이지 못한 사내의 명령을 파란 토끼 진구는 당차게 거부하고, 아버지인 사내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죽은 동생의 복수를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와중에 파란 토끼가 요청한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사기 위해 전주 시내를 누비는 장면에서는 나도 정말 복장이 터질 뻔 했다. 너무 궁금한 마음에 전지전능한 네이버 지도로 전주 시내의 KFC를 검색해 보니 모두 세 개가 있더라.

 

한편 야구는 사내와 사내의 아버지 그리고 사내와 파란 토끼의 실낱같은 관계를 연결해주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태생적으로 호랑이 팬으로 자라난 사내와 사내의 아버지 뿐만 아니라 사물에 대한 놀라운 관찰 능력을 보여주는 미래의 곤충학자 진구에게 야구는 유일무이하게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이다.

 

소설 <야구란 무엇인가>는 어쩔 수 없이 지난 가을에 개봉한 영화 <26>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에서 보여준 가상의 대체역사 보다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이라는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영화의 국가대표 사격선수나 소설의 사내의 방식이 너무 하지 않냐는 비판에 대해서는 초나라의 오자서가 남긴 유명한 말로 대답을 대신하고 싶다. “해는 지고 갈 길은 머니[日暮途遠]” 어쩌겠냐고.

 

유대인에게 여전히 홀로코스트가 현재진행형인 것처럼, 우리에게도 여전히 80년의 빛고을은 청산되지 않은 그 무엇이다. 사내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주변을 정리하고 마침내 보수설한(報讐雪恨)에 나서지만, 기실은 파편화된 사내의 삶에서 망월동은 극복의 대상이다. 글을 읽으면서 내내 막막했다. 어쩌면 세상과 대화를 거부하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파란 토끼를 대하는 사내의 심정도 이랬을까.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고,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무얼 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서로 부딪히고, 깨지고 터지면서 그렇게 삶은 전개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읽은 김언수 작가의 <>에 나오는 뱀놀이주사위 게임은 공교롭게도 김경욱 작가의 <야구란 무엇인가>에서도 중요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다. 종착지인 100을 향해 달려 가지만, 후반부 곳곳에 포진한 뱀들은 사내를 어느 순간에라도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다. 아무리 선행을 베풀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뱀놀이주사위 게임은 말한다. 어디 인생에서 내 뜻대로 되는 게 몇이나 되던가. 복수의 대상인 염소를 찾아 가는 길에 주인공 사내가 느낀 거리와 시간의 등치만큼이나 일보전진은 쉽지 않다. 게다가 사내는 사냥꾼의 심정으로 염소를 쫓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이 사냥감이었다는 사실에 도달하지 않던가.

 

<야구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김경욱 작가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몇 개 생겼다. 명징한 전개에 비해 조금은 모호해 보이는 결말에 대한 의도와 도대체 오동나무 상자는 어디로 갈건지 등등 말이다. 요기의 말을 인용하자면 소설은 독자의 질문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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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문장론 -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하여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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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본론으로 직접 들어가자. 이 책의 역자 홍성광 씨는 서두의 <해설>에서 글쓰기의 본질을 독자적 사고, 독창성이라고 못 박는다. 힐링의 시대를 지나 소통의 시대, 다시 한 번 글쓰기 능력이 각광을 받고 있다. 사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사고를 가다듬는 글쓰기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스펙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텍스트 읽고 쓰기에 전혀 훈련이 되지 않은 몰지각한 이들이 세상에 넘쳐난다. 역자가 꼽은 글쓰기에서라면 둘째가라고 한다면 서운해 할 두 명의 철학자가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그들이 바로 쇼펜하우어와 니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먼저 고백해야할 점이 한 가지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다 들어봐서 아는 이 철학자들의 저서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책은 아예 접해본 적이 없으며, 니체의 저술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읽긴 했지만 여전히 이해불가며 그나마 쉽다고 생각한 아포리즘 모음집 역시 예상과 달랐다. 이렇게 스스로의 무지에 대해 고백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먼저 쇼펜하우어는 독자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무턱대고 읽는 독서를 지양한다. 독서는 자신의 생각이 아닌 타인의 생각에 매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사고가 막혀 있을 때만 독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독자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는 현실세계에서 모든 것을 체험하면서 사고의 능력을 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호함과 확고함으로 준비된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표현하려는 것을 정확하게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읽다 보니 어째 니체의 위버멘쉬가 떠오른다.

 

저술가의 분류에 있어서도 쓰기 위해 쓰는 사람보다 사물 자체를 서술하는 낫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그는 표절이 난무하는 21세기 한국에서도 새겨 들을만한 정직하지 못한 저술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익명성에 대해서도 쇼펜하우어는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하는데, 요즘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익명의 덧글논쟁과도 일맥상통한다. 익명으로 행해지는 비평음 모두 거짓말과 사기로 규정하는데, 자유주의자들이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저술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쇼펜하우어는 간결하면서도 구체적인 표현으로 누구나 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요즘 다수의 신문기사는 물론이고 문학비평 같은 경우에는 해설이 없으면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표현이 명료하지 못하고 모호한 문장에 대해서는 어딘가 정신적으로 빈곤하다는 반증이라는 지적이 무섭다. 충분한 사고를 한 다음에 쓴 글이 그럴 수 있을까? 상대방과의 소통을 위해 정확하고 간결한 문장이야말로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책을 많이 읽어 바보가 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는가? 쇼펜하우어는 독서의 맹점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마지않는다. 어떻게 보면 독서하는 나의 머리는 타인의 생각이 뛰노는 놀이터에 불과하단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다시 한 번 독자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독자에게 주지시킨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세상이란 참으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터득할 것을 주문한다. 글쓰기를 뛰어 넘어 양서를 접하고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선배 독서가의 충고는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쇼펜하우어가 글쓰기/독서에 대해 구체적인 실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와는 달리 니체는 불가의 선문답 같은 아포리즘으로 독자에게 도전한다. 모든 진리는 서로 통달한다고 했던가. 잘 쓰기 위해서는 보다 잘 생각(사고)해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불멸의 문체는 꿈꾸는 이들에게는 이 같은 아포리즘을 남기기도 했다. 문필가가 되기 부끄러워 하는 자야말로 최고의 저자가 될 것이라고.

 

아이러니하게도 서툰 문필가도 우리에게는 필요하다고 니체는 말한다. 어쩌면 막장 드라마가 범람하는 우리 현실에 딱 들어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덜 발달하고 미성숙한 이들의 취향에 제격이라니 말이다. 그들만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미성숙하고 서툰 문필가 또한 필요하단다.

 

쇼펜하우어의 명확하면서도 간결한 글쓰기에 대한 글들은 그야말로 귀에 쏙쏙 들어왔다. 반면 니체의 쉬워 보이지만 오히려 수많은 사고를 거듭해야 비로소 알까말까하는 아포리즘들은 전혀 와닿지 않았다. 니체가 자신의 글이 읽히지 않기를 바랐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에 좌절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물론 이조차도 자위적 사고의 발로이겠지만. 어쨌건 20세기를 주름 잡았던 두 명의 철학자의 글을 통해, 글쓰기에 대해 한 수 배웠다. 그들은 끝없이 독자적인 사고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쓰기를 하라고 목 놓아 외치는데 그들의 충고가 앞으로 나의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여전히 남의 생각의 놀이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글쓰기가 될지, 아니면 깨달음 대로 그것을 뛰어넘는 독자적 글쓰기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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