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 이현수 장편소설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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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현충일이었다. 63년 전, 한국전쟁에서 그리고 그보다 앞선 독립운동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친 호국영령들을 다시 한 번 새겨 보는 시간에, 나는 이현수 작가의 <나흘>을 읽고 있었다. 미국 정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노근리 학살사건을 전면에 내세운 <나흘>의 힘은 정말 위력적이었다. 사실 그동안 짧은 뉴스를 통해 피상적으로만 접해 오던 노근리 학살사건의 실상을 소설로 다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하고 싶다. W.G. 제발트의 주장대로, 문학의 순기능이 제대로 발현되었고나 할까.

 

저자가 말미에서 밝힌 대로, 노근리 학살만으로는 서사의 진행이 쉽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반세기 전에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일어섰던 동학혁명에서 시작해서 국권상실, 식민지 지배 그리고 한국전쟁에 이르는 그야말로 치열했던 한국 현대사를 소설 <나흘>은 관통하고 있다. 양세계보를 중시하는 내시 가문 출신의 김진경은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황간 출신의 다큐작가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 그녀에게 황간/노근리라는 공간은 다시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장소로 등장한다. 하지만, 연어가 자신의 뿌리를 거부할 수 없듯이 그녀 역시 소설적 장치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와 모두가 숨기고 싶어하는 19507월의 노근리의 진실을 파헤치는 임무가 주어진다.

 

제발트의 조국이자 패망한 독일 사람들이 그랬듯이, 당시 노근리 학살을 직접 체험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발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찢어 버린다. 진경의 끈질긴 추적 끝에 조금씩 베일을 벗기 시작하는 사실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이현수 작가는 이런 역사적 사실에, 두 세대를 건너 뛰어 내시 가문의 양자로 들어와 이제는 역사의 증인이 된 김태혁에게 진실을 밝히는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한다. 모든 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이들은 자신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

 

진경과 그녀의 할아버지 태혁의 교차되는 서사 구조는 작가가 말하고 싶은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사실감과 집중도를 극대화시킨다. 물론, 중간 중간에 끼어드는 부정확한 기억 혹은 원한에 의한 의도적 왜곡도 있지만 도대체 노근리의 쌍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진실 탐구의 여정인 쉼 없이 계속된다. 진경이 없었더라면, 황간 사람들의 태생적 외지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서울에서 내려온 다큐팀만으로는 진경이 소설에서 파헤쳤던 것처럼 사실의 본질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 부채의식처럼 남은 상호간의 죄의식 때문에, 집단적 기억상실로 처리된 과거사는 더더욱 주민들의 발목을 잡는 장치로 작동한다.

 

개인적으로 전쟁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이현수 작가가 다룬 한국전 초기의 상황에 대한 기술은 자못 흥미를 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의 군세를 얕본 미군의 판단 착오로 남진하는 북한군을 대전에서 막겠다는 윌리엄 딘 소장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자신마저 북한군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는다. 설상가상으로 북한 정규군 일부가 피란민으로 위장해서 후방을 교란한다는 첩보 때문에 전쟁 당시 한국에 대해 무지한 미군은 양민과 북한 게릴라를 구분하지 못하고, 마침내 노근리 쌍굴의 비극을 잉태하게 된다. 당시 기록을 보면 여자와 아이들도 전선을 넘지 못하게 하라는 명확한 명령이 기재되어 있다. 도대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미군은 여자와 아이들도 모두 북한군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최소한의 상식도 먹히지 않는 전쟁의 비참함이 느껴졌다.

 

예의 노근리에서 지옥 같았던 나흘을 보낸 이들은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의 행로를 걷게 된다. 피해자였던 이들은 총상과 화상으로 신체가 훼손되어 자발적으로 격리된 삶을 살거나, 살기 위해 해서는 안될 짓을 한 업보로 폐인이 되거나,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기억의 한 페이지를 삭제해 버린 다수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비극이었다. 가해자 대표로 나오는 버디 웬젤(Buddy Wenzel) 역시 마찬가지다. 장기판의 졸처럼 부려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마지막가지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한 청년의 이야기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소설에도 등장하는 BBC 다큐멘터리 <Kill Them All>에도 직접 출연해서 지난 과거에 대해 괴로워하는 그의 양심적인 행동이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물론 또 한편에서는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한 전쟁범죄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속도감 넘치는 소설의 중반부의 전개에 비해 이 모든 이야기의 대단원을 맺어야 하는 결말이 좀 아쉬웠다. 동학혁명, 일본의 식민지배 그리고 다시 해방과 한국전쟁에 이르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아우르는 결말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모더니즘 소설을 연상시키는 성급한 엔딩은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수가 없다. 하지만 산 자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역사의 기록으로서 문학이 가진 본령이 참 마음에 들었다. 기회가 되면 2007년에 발표된 이상우 감독의 노근리를 다룬 영화 <작은 연못>도 한 번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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