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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곧 법이라는 그럴듯한 착각
스티븐 러벳 지음, 조은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얼마 전에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라는 영화를 봤다. 미국의 유명한 스릴러 작가 마이클 코넬리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는데, 영화 속의 주인공은 그야말로 링컨 차를 타는 소위 잘나가는 변호사다. 이 멋쟁이 변호사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주장하는 부유한 의뢰인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법정 스릴러 영화였다. 문제는 의뢰인이 억울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그리고 의뢰인은 철저하게 이 유능한 변호사를 이용해 먹는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을 실감나게 만들어주는 멋진 영화였다. 마침내 변호사는 법의 테두리 언저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이 악당을 응징한다. 내가 보기에 변호사의 행위는 통쾌했는데 과연 그가 생각한 정의가 법이었을까? 미국 법학계의 전설로 불리는 스티븐 러벳 교수는 자신의 저서 <정의가 곧 법이라는 그럴듯한 착각>에서 독자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도대체 무엇이 정의인가라고.
초반에 나오는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악명을 떨친 빌 클린턴 대통령의 에피소드에서 이 책의 원제인 ‘정직의 중요성’을 러벳 교수는 강조한다. 자신이 아칸소 변호사였던 젊은 대통령은 탄핵위기에 몰려 사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보호할 유능한 변호인을 선임한다. 문제는 클린턴이 작금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속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그는 심지어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줄 변호인에게까지 거짓말을 했다. 결국 케네스 검사의 리포트를 통해 치욕적인 사실들이 폭로됐고, 대통령 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사실 스캔들보다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빌 클린턴이 전 미국인을 상대로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러벳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사법 시스템의 이모저모를 독자에게 들려준다. 사실 우리나라 같이 보통의 사람이 사법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법이란 그저 다른 세계의 일처럼 들린다. 그래서 정작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에 법정에 서게 되는 경우, 그야말로 패닉에 빠지는 것이 보통이다. 영화 목장의 결투>의 주인공인 와이어트 어프 형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이 사건에서 우리는 난폭한 무법자들을 보안관 어프 형제가 멋진 권총 실력으로 제압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건 직후 이 용감한 형제는 바로 살인죄로 체포됐고 법정에 서게 됐다. 저자는 고도로 훈련받은 이들만이 제대로 된 법정 증언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얼마 전에 본 영국 드라마 <셜록 홈즈>에서도 결정적 순간에 대한 기억력이 62% 밖에 되지 않는다고 잘난 셜록이 말했다. 법정에서 사건에 대한 재구성을 시도하지만, 아쉽게도 자신이 가진 관점, 시야, 예상, 편견 그리고 희망 같은 다양한 요소로 진실을 말하는 증인들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반대심문이야말로 과거의 재구성에 있어 중요한 “법적 동력”이 될 수 있다고 그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바로 뒤따라 나오는 글은 6년 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과 인지오류에 대한 저자의 냉철한 분석이다. 이 사건은 총격 사건의 범인이 한국계 조승희였다는 점에서 우리의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저자는 그런 인종/민족적 관심이 아니라 사건의 초동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해 더 큰 재앙을 초래한 경찰의 인지오류를 지적한다. 사건 초기에 경찰은 체계적인 방식대로 수사를 진행했지만, ‘탐색만족오류’에 빠져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진짜 범인을 방치해둔 것이 범인에게 2차 총격을 시행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주었다고 지적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글은 <사법체계가 야구라면 판사는 심판>이다. 무척이나 야구를 좋아하는데, 나도 직접 본 경기를 예로 들어서인지 정말 쏙쏙 이해가 갔다. 2005년 10월 12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인 US 셀룰라 필드에서 LA 에인절스와의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결정전 2차전이 벌어졌다. 9회 말 현재 스코어는 1:1 동점 상황 그리고 에인절스에게 첫 경기를 내준 화이트삭스는 홈에서 이 경기마저 내준다면 월드시리즈 진출은 물 건너 가는 상황이었다. 이미 투아웃 상황에서 AJ 피어진스키가 타석에 들어섰다. 피어진스키는 마지막 공을 헛스윙을 하고, 에인절스 수비진은 이닝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덕아웃으로 뛰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에딩스 주심은 아웃 판정을 하지 않았고, 약삭 빠른 피어진스키는 1루까지 내달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선수가 아닌 심판이 ‘플레이어’가 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의심스러운 상황이라면 주심은 다른 부심이나 혹은 비디오 판독을 통해 아웃인지 아니면 그의 주장대로 인플레이 상황인지 물었어야 했다. 이 플레이 하나로 화이트삭스는 기사회생하며 결국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하게 됐다. 오심도 야구 경기의 일부라지만, 사법체계에서는 심판/판사의 오심으로 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러벳 교수는 경고한다.
판사들의 연봉 인상 주장에 대해서도 저자는 한 쪽 편에 치우친 주장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사실 공직에 복무하는 판사의 월급이 잘나가는 로펌 변호사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사법집행을 맡은 판사의 사기 진작 차원에서 보상 제도를 손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단순한 접근 방식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날선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호사들의 직업 불만족도를 지적하면서,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실을 지적한다. 반면, 연방판사들은 독립적인 법질서 수호를 위해 탄핵과 정치적 간섭 혹은 보복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안전장치가 준비되어있다. 그리고 예전 로마 시대 공직자들이 그랬듯이 물질적 보상이 아닌 시민에 대한 봉사 차원에서 여전히 판사직을 희망하는 젊고 유능한 변호사들이 많다는 건 그만큼 미국 사회가 건강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사법체계란 정말 따분하고 지루할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재밌고 신선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나같은 법에 문외한도 쉽게 읽을 수 있고 또 생활에 유용한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정보들이 반가웠다. 여전히 우리는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 지배하는 원더랜드에 살고 있지만, 공명한 디케의 눈이 우리를 진실의 세계로 인도하리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