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잠, 봄꿈
한승원 지음 / 비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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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몇 년 만의 만남이던가. 5년 만에 한승원 선생의 신작 <겨울잠, 봄꿈>과 만날 수가 있었다. 내가 읽은 선생의 첫 번째 책이 정약용 선생에 대해 쓴 <다산>이었는데 이번 책에서는 녹두장군 전봉준과 만나게 됐다. 한 선생이 말미에 적은 것처럼, 한 커트 단위의 짧은 구성 때문인지 우리가 의도적으로 잊고 있던 백여 년 전 역사의 기록이 순식간에 되살아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단박에 읽어냈다.

 

갑오년(1894) 척양척왜, 보국안민을 기치로 봉기한 동학군은 그야말로 벌떼처럼 호응하는 민중의 힘으로 호남 일대를 석권한다. 호남 제일성이라는 전주성을 위시한 호남 곳곳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이 실시되어, 동도를 따르던 이들이 꿈꾸던 공화세상이 열리는가 싶었지만 더 이상 민중을 제어할 힘이 없던 지배계층이 바다 밖의 호랑이와 늑대를 불러들여 그들의 희망을 꺾어 버린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의 힘을 빌려 한양으로 진군하던 십만 동학군을 우금치 고개에서 전멸시켜 버린 관군은 이전의 전주화약을 무효로 돌리고, 동학군을 뿌리째 섬멸하는 이른바 청야작전에 나선다.

 

일패도지하여 예전에 수하에 있던 김경천의 예언대로 순창 피로리로 숨어든 녹두장군. 마치 겟세마네에서 자신을 배신한 가룟 유다와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 이채롭다. 녹두장군은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을 알고, 자신의 운명을 배신자 김경천에게 넘겨주려고 호랑이굴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다. 이건 마치 구리산에서 패배하여 마지막 해하싸움에서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던 항우의 최후를 떠올리게 한다. 녹두장군에게 체포와 이어지는 한양으로의 압송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팩션의 구성을 따르는 <겨울잠, 봄꿈>에는 이토 겐지라는 아주 특이한 인물이 배치된다. 조선 출신으로 탐관오리의 학정에 못 이겨 일본에 밀항한 조선인 천종관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가 되어 몸과 영혼을 모두 팔아 먹은 실존적 존재로 등장한다. 새로 거듭난 이토 겐지는 녹두장군의 압송을 주도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회유하여 그가 신봉하는 일본제국의 충성하는 침략의 대리인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에 필연적으로 따른 녹두장군의 인간적 고뇌, 다시 말해 이제 겨우 마흔의 나이로 죽기에 너무 아까운 나이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근대판 유다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으리라.

 

한양으로 향하는 압송 길에서 장군을 더 힘들게 하는 것들은 이토 겐지의 달콤한 유혹만이 아니었다. 발등이 으깨지고, 정강이가 부서진 장군을 가마에 태운 가마꾼들이 용도가 다해질 때마다 그들을 무참하게 처치하고, 장군과 일행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민가를 약탈하는 모습은 장군을 더욱 더 괴롭게 만든다. 자결을 우려해서 입에 재갈을 물리고 국밥이나 먹거리를 미음처럼 씹어 그에게 공급하는 건 치욕에 다름 아니었다.

 

순창 피로리에서 시작되어,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웠던 나주성의 민종렬과의 조우, 한때 파죽지세로 점령해서 결국 정부와 화약을 이끌어낸 전주성을 돌아 자신이 사술을 부려 적의 총탄을 피할 수 있다는 궁궁을을 부적을 썼지만 결국 일본군의 압도적인 기관총 화력에 패주한 우금치에 이르기까지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은 쉼 없이 내달린다. 이 과정을 통해 독자는 교과서에서 피상적으로 접했던 동학, 집강소 그리고 폐정개혁 같은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한낱 서당 선생에 지나지 않았던 녹두장군이 왜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에 맞서 싸우게 되었는지, 그리고 한 번 호랑이 등에 올라탄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죽을 때까지 내달릴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는 모두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이유가 바로 밥에 대한 싸움이었노라는 그의 일갈이 쟁쟁하다. 모름지기 나라님이라면, 현대의 위정자라면 백성이 마음 편하게 밥을 먹도록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먹을 밥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구멍으로 넘어 가는 꼴은 도저히 못보겠다는 생각이 녹두장군을 봉기로 이끌었던 게 아닐까. 아니 모두가 평등한 공화세상에서 적어도 슬픈 밥은 없게 만들자는 것이 장군의 유지였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현재는 그가 꿈꾸던 다음 세상의 이상이 현실화됐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가 있을까.

 

압도적인 군세를 바탕으로 정부를 압박해서 얻어낸 화약의 결정체인 집강소 설치는 세계 최악의 신분제 국가였던 조선 백성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소설에서도 언급된 만적, 임꺽정 그리고 홍경래 등으로 이어지는 민중봉기가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그야말로 보수사회에서 주민자치 단체인 집강소를 통한 새로운 국가 건설의 꿈은 외세의 개입과 동학운동의 실패 그리고 녹두장군의 죽음으로 봄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녹두장군이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여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일시적으로 굴종하고 새로운 기회를 도모하는 것이 또 하나의 방법은 아니었을까. 그 모든 가능성을 부인하고 녹두장군은 자신의 죽음으로 썩어 빠진 조정의 현실을 만방에 알리고, 청사에 마지막 조선 사람으로 남기를 선택한다.

 

실존하는 녹두장군의 마지막 사진이 책의 앞뒤에 실려 있다. 작가는 녹두장군의 실질적인 마지막 순간에 대한 절묘한 기술을 통해 전봉준이 왜 그 숱한 수모를 견디며 죽기 위해 살아남았는지 설명한다. 118년이 지나도 여전히 불의가 사라지지 않는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장군의 의연한 죽음이 갖는 의미를 <겨울잠, 봄꿈>은 조용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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