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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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소설 <완득이>를 보지 못했다. 그러니 김려령 작가의 글은 처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동안 청소년 문학을 주로 발표해 왔다고 하는데, 신작 <너를 봤어>는 그녀의 온전한 첫 번째 성인소설이다. 책을 읽는데 무언가 도움이 될까 싶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더니 신작 발표 즈음한 기자간담회에서 인생을 좀 아는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라는 말로 신작을 소개했다.

 

<너를 봤어>에는 잘 나가는 소설가 유지연과 결혼한 전직 소설가이자 이제는 편집자인 40대 중반의 정수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나름대로 성공하고 문단에 알려진 아들을 상대로 삥을 뜯는 어머니에게 시달리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똑 부러진 며느리 역시 개천에서 용을 산 거지, 개천을 산 건 아니라는 말로 막무가내 시어머니의 삥을 거부한다. 독자는 조금은 일반 가정사 같지 않은 갈등 구조에 호기심을 비치기 시작한다.

 

이내 주인공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주 서영재에게 마음을 홀랑 빼앗긴다. 그야말로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나이 마흔 여섯 살에 찾아온 첫사랑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이거 불륜 서사의 시작인가? 나의 착각이었다. 달랑 6년간의 결혼생활을 끝으로 A출판사의 에이스이자 시대의 흐름에 올라탄 베스트셀러 작가는 이승과 이미 고별한 상태다. 이것을 깨닫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역시 작가의 설계였다면 탁월하다. 아니면 상황 파악에 늦된 독자의 아둔함 탓이겠지.

 

정수현의 불행하기 짝이 없는 가족사를 하나둘씩 드러내며, 출판계와 문단을 배경으로 한 자못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끼어든다. 물론 제법 단련된 책쟁이가 아니라면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바닥 이야기가 재밌게 들렸다. 남주 정수현이 비교적 예측가능함을 상징한다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여주 서영재는 예측불허의 명랑쾌활로 무장된 캐릭터다. 거기에 두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세 번째 인물로 윤도하까지 더하면 이젠 내용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영화 <Three to Tango>의 제목이 안성맞춤이다.

 

아내와 사별한 정수현은 언제라도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날 수 있는 몸이지만, 개천에서 용을 산 아내는 그럴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영화 <식스 센스>를 연상시키는 곳곳의 장면에서 죽은 아내는 여전히 미친 존재감을 발산한다. 이러니 터무니없는 불륜이 연상되는 것도 당연하지. 다 뛰어 넘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첫 번째 성인소설로 너무 무거운 전개가 아니었나 싶다. 어쩔 수 없이 타나토스의 포로가 된 남주에게 로코식 해피엔딩을 기대한 것은 무리였을까. 차근차근 설명하는 대신, 미련하고 살벌한 사랑을 선택한 주인공의 마음이 참 안타까울 따름이다.

 

문단과 출판계에 대한 맛보기식 서술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 바닥에 구르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신랄한 이야기를 쓸 수가 있을까? 글쟁이와 출판사의 관계를 사()와 사()의 관계로 표현한 점이나, 엉뚱한 복장으로 엄숙한 수상 식장의 분위기를 휘젓고 다니는 타조 상상은 정말 압권이었다. 글쓰기가 누군가에게는 숨막히는 노동이겠지만, 지상(至上)의 독자에게는 유희이자 오락일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 또한 인상적이었다. 글쟁이와 출판사의 손을 떠나 전국적인 유통망을 통해 독자의 손으로 흘러 들어간 책의 운명은 온전하게 그들의 몫이라는 선언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날로 책을 씹어 먹던, 잘게 찢어 염소 먹이로 사용하든 간에 말이다.

 

다시 한 번 이 미련하고 살벌한 사랑, 다 읽고 나니 마음이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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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역습
에드워드 테너 지음, 장희재 옮김 / 오늘의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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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폭우를 뚫고 강원도 영월에 있는 고씨동굴에 다녀왔다. 동굴 입구에 들어서자 그렇게 무더운 여름인데도 초강력 에어컨을 틀어 놓은 것 같은 냉기가 전해졌다. 막 동굴탐험에 나서려는 순간, 안내하시는 직원 분이 동굴 우측에 주욱 진열된 헬멧을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날도 더운데 웬 헬멧이냐며 투덜거리면서 헬멧을 썼다. 그런데 높낮이가 천차만별인 동굴을 지나면서 수도 없이 머리가 종유석으로 이루어진 천장에 부딪혔다. 만약에 헬멧이 없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해졌다. 미국 출신의 기술문화 사학자 에드워드 테너는 헬멧을 비롯한 9개의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은밀하게 들려준다.

 

저자는 우선 서문에서 이 책에서 주로 다루게 될 주제인 테크놀로지와 테크닉 간의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테크놀로지가 인간에 의해 변형된 자연 세계라고 정의하고, 테크닉은 우리가 이것을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간단한 기기들도 초기에는 사용방법을 익히기 위해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초기 진공관 라디오 사용자들은 수신, 동조, 검출, 증폭 그리고 재생에 이르는 자그마치 열두 가지 이상의 절차를 숙지해야 비로소 라디오를 들을 수가 있었다. 요즘엔 쉽게 설명된 매뉴얼조차 읽지 않고 무턱대고 기기에 달려드는 현대인들에게 과연 그런 복잡한 절차를 익힐 인내심이 있을지 궁금하다.

 

글의 서두에서 내가 쓴 헬멧은 고대시대 전장에서 적의 치명적 공격에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보호구에서 유래된다. 고대 이래 갑옷과 헬멧은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보호구였지만, 16세기 총기류가 보급되면서 헬멧의 아성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역사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헬멧들이 부침을 거듭했고, 병사들뿐만 아니라 민간 분야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2차세계대전 즈음에 노동자들의 머리를 18킬로그램까지의 충격을 보호해줄 수 있는 산업용 플라스틱 헬멧을 개발해냈다. 전장과 위험한 작업장 뿐만 아니라 헬멧은 스포츠 분야까지 확산되었다. 우리가 즐겨 보는 프로야구 타자들이 헬멧을 쓰는 모습이 이제 어느덧 일상화되지 않았던가.

 

에드워드 테너는 인류가 엄마의 젖을 빠는 행위를 첫 번째 테크닉으로 그리고 젖병을 인류가 접하게 되는 첫 번째 테크놀로지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인류의 첫 번째 기술적 통과 의례는 무엇일까? 걸음마를 생각해 보면 바로 답이 나올 것이다. 신발의 사용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신발이 없다면 상처로 피곤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신발이 발을 너무 잘 보호해서 발이 민감해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오늘날도 10억 이상의 인구가 맨발로 생활하지만 상처 없이 잘 지낸단다. 어쨌든 각종 위험으로부터 발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기본적인 형태의 샌들이라고 한다.

 

세계인이 즐겨 신는 일본식 샌들 다시 말해 조리(게다)는 일본의 기후에 최적화된 샌들의 형태를 고수한다. 살생을 금하는 일본의 종교적 이유 때문에 가죽신이나 부츠 대신 도입된 조리는 갇힌 발 때문에 발생하는 각종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는 지적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저렴한 비용으로 쉽게 제작할 수 있다는 잇점 때문에 조리의 글로벌화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한다. 물론 일회용품으로 전락해서 천지에 범람하는 플라스틱 조리 제품으로 인한 환경문제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음악 건반과 타자 자판의 상호 작용에서 시작한 건반 역사에 대한 저자의 기술은 한층 더 흥미롭다. 서양 중세에서 발명된 가장 복잡한 기계 중에 하나라는 오르간에서 출발한 음악 건반은 하프시코드, 해머클라비어 같은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있었다면, 카를 바흐가 개발한 새로운 형태의 운지법은 테크닉의 혁명이었다. 비로소 서양 음악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될 피아노를 위한 모든 준비가 완성된 순간이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이전까지만 해도 부유 계층을 위한 전유물이었던 피아노 제작 기술에 기계화를 통한 대량 생산과 상업적 홍보가 곁들여지면서 대중문화의 일부가 되기 시작했다. 저렴한 피아노조차 살 수 없는 이들을 위해서는 아코디언이라는 대체품이 탄생하기도 했다.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테크닉을 발전을 도모하듯, 피아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21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기교를 지닌 연주자들로 넘쳐 나고 있다. 고도로 발달된 녹음 기술로 인해 사운드 엔지니어는 거의 무결점의 레코딩을 쏟아내고 있고, 고성능의 장비들과 편집기술 역시 완벽한 연주에 한몫하고 있는 중이다. 피아노의 경우, 엔지니어 보다 위대한 작곡가와 연주자의 테크닉이 테크놀로지의 향상과 개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저자가 주장하는 동일한 선상에서의 테크놀로지와 테크닉 간의 상호 보완 작용에 대한 정확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유사 이래 인류의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은 테크놀로지의 개선과 발전을 가져 왔고, 이를 이용하는 테크닉 역시 계속해서 진화해 왔다. 에드워드 테너가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은 다음 세대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게 되는가이다. 가령 예를 들어, 조만간 상용화돼서 시장에 선보이게 될 예정인 에릭 슈미츠의 구글 안경 프로젝트는 스마트 시대에 획기적인 테크놀로지 이정표로 거듭나게 될 전망이다. 하지만, 지나친 인터페이스에 의존한 나머지 발생하게 될 프라이버시 이슈 같은 문제들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빠르게 변화하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규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최첨단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다가는 언젠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이보그 인간이 출연하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도 무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혁신 디자인의 세계는 장려되어야 하지만, 새로운 창의와 도전을 위해서는 일정한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새로운 세기에는 또 어떤 테크놀로지와 테크닉이 우리 인류에 의해 재발견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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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김경집 지음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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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는 건강한가?’라는 질문으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시작하고 싶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계 지도자는 배임과 횡령죄로 재판을 앞두고 있고, 성직자들의 각종 추문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성장지상주의와 대형교회화는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수는 날이 갈수록 줄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기독교계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지 오래고,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꿈꾸는 이들에게 희망은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의 저자 김경집 교수는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각성하고 다시 한 번 교회일치운동에 전념할 것을 이 책을 통해 주문하고 있다.

 

저자는 우선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하나가 될 것을 주장한다. 그러기 위한 첫 걸음으로 기독교 정경인 성경의 일치화가 이루어져 할 것이다. 기독교 신자로 왜 여전히 우리는 고어투와 한문투로 된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쉬운 길이 있는데 굳이 약대(낙타)나 애급(이집트) 같이 보통 사람이 들으면 알 수 없는 말을 써야 하는지 이해불가다. 그것은 마치 중세시대 사어(死語)로 된 라틴어 성경을 고집했던 성직자들의 모습을 보는 느낌이 든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던 시절 말이다.

 

김경집 교수는 누구나 다 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존의 시각과는 달리 해석한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의 호구 조사 때문에 만삭의 몸을 한 아내 마리아와 요셉은 고향 베들레헴을 찾는다. 베들레헴의 여관은 이미 만원이었고, 요셉 가족은 어쩔 수 없이 마구간에 기숙하게 된다. 문제는 이 불쌍한 가족을 외면한 이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라는 지적 앞에서 순간 뜨끔해졌다. 이기적인 나의 모습을 거울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건강한 영성을 가진 신앙인이라면, 풍찬노숙하는 요셉 가족을 외면하고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가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명예살인(honor killing)이라는 야만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천년 전 성령으로 잉태한 처녀 약혼녀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인 용기 있는 남자 요셉에 대한 분석도 예사롭지 않다. 착하고 선량한 청년 요셉은 약혼자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씨족사회를 떠나 살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지금 같이 교통이 발전한 시대에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해서 사는 일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유목사회에서 정든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성경에서 찾아낸 작은 서사를 예리하게 분석해내는 저자의 능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는 짧은 공생애 동안 수많은 비유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당시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대했던 열두 제자들은 스승의 설명 없이는 하나님나라의 신비를 일깨우는 계시를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요즘 표현으로 찌질하기 그지없다. 명실상부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등장하는 베드로를 보자. 그의 직업은 어부로 안식일조차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았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굶기를 밥먹듯 했을 것이고 멸시와 탄압도 이겨내야 했다. 어쩌면 그들은 세속적인 욕심을 가지고 메시야를 따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복음)을 듣고 자각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그 누구보다 앞장섰다. 이런 사도들의 영광 이전에 있던 고난에 대해 우리는 신중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신앙공동체 리더를 세우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처럼 보잘 것 없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배제되고 있지는 않은지 저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묻고 있다.

 

중세이래로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교회는 마르틴 루터와 지오다노 브루노 같은 종교개혁가들을 파문에 처하고,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했다. 시대를 앞선 이런 예언자들의 고난은 외면하고, 제사장의 역할만 하려는 이 땅의 교계 지도자들에게 저자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근본주의에 입각한 한국 교회의 주류 보수교단은 하나님나라의 구현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기독교 정신의 본질보다 그 외형적인 면에 치중하는 형식의 권위를 강조하며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귀를 닫고, 점점 더 특정한 기득권층을 위한 종교화되고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이러한 진단을 바탕으로 저자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잘못된 신학에서 찾는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기복신학, 오로지 성장만이 선이라는 번영신학, 민주성이 결여된 권위주의와 근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냉혹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종교학자 제임스 파울러가 제시한 신앙 발단 단계이론을 통해 올바른 신앙의 성장을 권면한다. , 이제 모든 문제에 적용되는 해답은 아니지만 필요한 솔루션이 구체화됐다. 문제는 인식의 전환과 그에 따른 실천이 남아 있다. 다시 한 번 성경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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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스트라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9
미겔 시후코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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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게 한 가지 있다. 필리핀 출신의 작가 미겔 시후코의 <일루스트라도>를 읽고, 책에 나오는 크리스핀 살바도르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위키피디아로 검색을 해봤다.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뻔뻔한 작가는 이 흥미진진한 메타소설 속에서 그 흔적을 쫓는 가공의 인물을 다양하면서도 신뢰가 가는 방식으로 멋지게 창조해냈다. 전형적인 메타소설의 양식을 빌려, 각종 시, 메타소설, 인터뷰, 블로그 댓글과 자학적 유머까지 동원해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크리스핀 살바도르에게 생명을 불어 넣었다. 모름지기 소설가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출신의 미겔 시후코는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에 적합한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필리핀 국회의원 출신 아우구스토 시후코 주니어의 아들로 태어나 국제학교를 졸업하고 필리핀 최고의 대학인 아테네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세기 후반, 스페인 통치 아래 선각자들이란 뜻의 <일루스트라도>는 스페인 식민지배 아래 필리핀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자각한 중산 계급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유주의 사상과 유럽의 민족주의 영향을 받은 일단의 그룹이다. 이 중에는 실존 인물인 필리핀 독립운동가 호세 리살도 포함되어 있다. 미겔 시후코는 <일루스트라도>를 자신의 야심찬 데뷔작 제목으로 삼았다.

 

미겔 시후코는 직접 본인의 이름으로 메타소설 속에 등장해서 미국 허드슨 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진짜배기 필리핀 작가크리스핀 살바도르가 마지막으로 매달리던 <불타는 다리>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필리핀의 모든 추악한 사실을 담은 <불타는 다리>는 필연적으로 사라져 버렸는데, 시후코는 필리핀 역사를 관통하는 살바도르 가문에 대한 이야기와 조국 필리핀과 망명지 캐나다/미국을 오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스페인 식민지배 이래 필리핀 근현대사를 조명한다.

 

초보 작가이기는 하지만, 이런 심각한 주제만으로 500쪽이 넘어가는 장편소설을 전개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친구이자 스승인 크리스핀 살바도르를 추모하며, 동시에 조국 필리핀을 떠나 캐나다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그야말로 코즈모폴리턴적인 삶을 사는 21세기 자발적 망명객이자 이방인의 초상을 섬세하게 묘사해낸다. 다시금 마닐라로 돌아가 스승의 흔적을 쫓는 과정은 마치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회귀하는 그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메타 소설적 창조인지 독자는 헷갈릴 지경이다. 전형적인 미국 여인으로 등장하는 뉴욕 여친 매디슨과의 관계는 마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에서 정체된 필리핀의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 다가온다. 군부의 쿠데타 위협이 일상화되고, 일체의 정치적 행위가 희화화된 필리핀 국가의 현실을 작가는 냉정하게 꼬집는다.

 

개인적으로 크리스핀 살바도르에 죽음에 대한 논쟁을 다룬 SNS 열전(熱戰)과 소설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필리핀 청년 에르닝 이십의 에피소드를 눈여겨 보았다. 모든 사건 사고가 인터넷 소셜 네트워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곧바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신()소통의 시대의 위력을 작가는 예리하게 짚어냈다. 조국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 정착을 시도하는 필리핀 신인류의 전형으로 나오는 에르닝 이십의 과장된 좌충우돌기는 한편으로는 우스우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낮추며 블랙유머의 대상으로 삼는 작가의 치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국과 필리핀, 태평양이라는 시공을 가로 지르는 일종의 로드무비 같은 형식의 소설에서 크리스핀의 과거를 쫓는 여정은 어느 순간 서사를 위한 목적이 아닌 하나의 수단으로 뒤바뀐다. 그가 왜 죽었고, 그가 남긴 필생의 역작 <불타는 다리>의 행적은 중요하지 않다. 온갖 상념으로 가득 찬 상태로, 크리스핀의 과거 아니 조국 필리핀의 과거 속에서 부유하는 작가의 실존만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150년 역사를 아우르는 필리핀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조명과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들이 중첩되는 <일루스트라도>는 확실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가공의 인물인 크리스핀 살바도르가 소설 속에서 자신의 글을 통해 세상의 변혁을 바랬던 것처럼, 그의 창조자 미겔 시후코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앞으로 계속될 작가의 도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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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브렌델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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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팝송을 즐겨 들었다. 그중에서도 헤비메틀팬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즐겨 듣던 음악의 디스트레스(distress) 요소가 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기 시작했다는 증거였을까? 고리타분하다고 회피해오던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들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명동에 있던 디아파송 같은 클래식 전문음반가게에서 알프레드 코르토, 디누 리파티 그리고 상송 프랑수와 같은 거장 피아니스트들의 복각 CD를 애써 구해 들었다. 연주자에 대한 편식이 있어서였는지 알프레트 브렌델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소장하고 있던 CD는 아마 슈베르트의 <송어>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위키피디아로 브렌델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보니, 오스트리아 출신 피아니스트라는 설명이 나왔다. 지금은 체코 공화국이 된 비젠베르크 출신의 알프레트 브렌델은 유대계 독일인이라고 한다. 알프레트 브렌델은 17세인 1948년에 데뷔해서, 관절염 때문에 공식적으로 은퇴한 2008년까지 60년간 연주자로 활약한 말 그대로 거장(그로스마이징거)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연주가 다시 듣고 싶어 부랴부랴 유튜브로 슈베르트 즉흥곡을 찾아 들었다. 암보로 무대 위에 놓인 피아노 저편을 응시하며 물 흐르듯 전개되는 브렌델의 연주는 일품이었다.

 

연주자의 주관적인 해석보다는 언제나 작곡자의 원곡에 중점을 두는 브렌델의 편곡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특히 다양한 오페라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프란츠 리스트에 대해 탁월한 평가를 내린다. 개인적으로 리스트가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헝가리 무곡>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브렌델은 다양한 시도의 편곡을 지지하면서도 여전히 작곡가의 원곡이야말로 연주자가 지향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저자는 위대한 작곡가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해서도 다양한 평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와 동시대를 살던 미학자들이 베토벤 음악의 캐릭터가 가진 심리적인 요소와 도덕적인 요소가 있다고 썼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가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독자는 피아노에 전문가가 아닌지라, 그가 주장하는 대로 크게 연주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크레셴도를 좀 더 작게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인지는 정말 오랜 기간의 연습과 연륜이 쌓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브렌델에게 피아노란? 그에게 피아노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란다. 모든 변화무쌍함을 보여줄 수 있는 악기이자, 해석자의 감성과 유머를 표현해낼 수 있는 수단이라는 말일까? 그에게 피아노는 또한 수많은 사운드가 담긴 통이다. 이것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수단인 피아노가 최고여야 한다는 주장도 펼친다. 명필을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동양의 격언은 적어도 브렌델의 피아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한편으로 그의 주장에 공감이 되면서도, 청중을 위해 직접 공장을 찾아가 노동자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마다하지 않은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그것과는 대척점에 서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브렌델은 작곡가야 말로 연주자에게 필요한 정보의 원천이라는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가 남긴 원곡 없이 어떻게 그들을 음악을 재현해내는 연주자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연주자가 작곡가의 종이나 노예 같은 존재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모든 연주자는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자신 고유의 해석을 통해 청중과 만나게 된다. 또한 모름지기 모든 연주자는 필히 작곡을 공부해서, 원작곡가가 원곡에서 보여준 의도를 파악하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주장일 것이다. 예술가의 놀라운 논리전개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솔직히 전문가인 알프레트 브렌델의 이야기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처럼 광대한 피아노 연주의 세계는 물론이고, 그가 템포와 리듬 그리고 해석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피아노곡들은 생소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가 존경하는 사부인 에드윈 피셔와 알프레드 코르토,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그리고 한스 폰 뷜로 같이 익숙한 이름이 나올 때면 반가운 기색이 들었다. 과연 피아노 전공자가 브렌델의 글을 읽는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참 궁금하다.

 

아무래도 독일계 연주자이다 보니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만과 슈베르트 등 주로 독일계 작곡가들의 작품을 위주로 소개된 점이 아쉽다. 다른 에세이에도 나온 것처럼 다양성(variety)을 추구했으면 좋았으련만. 하긴 A부터 Z까지도 영어가 아닌 독일어로 소개가 됐었지. , 이제 책을 읽었으니 브렌델의 음악을 들을 차례다. 그의 고별연주 앨범에 실린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 그리고 바흐의 곡이야말로 이제는 은퇴한 비르투오소가 우리에게 남긴 최고의 유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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