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프레트 브렌델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평점 :
어려서 팝송을 즐겨 들었다. 그중에서도 헤비메틀팬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즐겨 듣던 음악의 디스트레스(distress) 요소가 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기 시작했다는 증거였을까? 고리타분하다고 회피해오던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들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명동에 있던 디아파송 같은 클래식 전문음반가게에서 알프레드 코르토, 디누 리파티 그리고 상송 프랑수와 같은 거장 피아니스트들의 복각 CD를 애써 구해 들었다. 연주자에 대한 편식이 있어서였는지 알프레트 브렌델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소장하고 있던 CD는 아마 슈베르트의 <송어>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위키피디아로 브렌델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보니, 오스트리아 출신 피아니스트라는 설명이 나왔다. 지금은 체코 공화국이 된 비젠베르크 출신의 알프레트 브렌델은 유대계 독일인이라고 한다. 알프레트 브렌델은 17세인 1948년에 데뷔해서, 관절염 때문에 공식적으로 은퇴한 2008년까지 60년간 연주자로 활약한 말 그대로 거장(그로스마이징거)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연주가 다시 듣고 싶어 부랴부랴 유튜브로 슈베르트 즉흥곡을 찾아 들었다. 암보로 무대 위에 놓인 피아노 저편을 응시하며 물 흐르듯 전개되는 브렌델의 연주는 일품이었다.
연주자의 주관적인 해석보다는 언제나 작곡자의 원곡에 중점을 두는 브렌델의 편곡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특히 다양한 오페라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프란츠 리스트에 대해 탁월한 평가를 내린다. 개인적으로 리스트가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헝가리 무곡>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브렌델은 다양한 시도의 편곡을 지지하면서도 여전히 작곡가의 원곡이야말로 연주자가 지향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저자는 위대한 작곡가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해서도 다양한 평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와 동시대를 살던 미학자들이 베토벤 음악의 캐릭터가 가진 심리적인 요소와 도덕적인 요소가 있다고 썼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가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독자는 피아노에 전문가가 아닌지라, 그가 주장하는 대로 크게 연주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크레셴도를 좀 더 작게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인지는 정말 오랜 기간의 연습과 연륜이 쌓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브렌델에게 피아노란? 그에게 피아노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란다. 모든 변화무쌍함을 보여줄 수 있는 악기이자, 해석자의 감성과 유머를 표현해낼 수 있는 수단이라는 말일까? 그에게 피아노는 또한 수많은 사운드가 담긴 통이다. 이것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수단인 피아노가 최고여야 한다는 주장도 펼친다. 명필을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동양의 격언은 적어도 브렌델의 피아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한편으로 그의 주장에 공감이 되면서도, 청중을 위해 직접 공장을 찾아가 노동자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마다하지 않은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그것과는 대척점에 서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브렌델은 작곡가야 말로 연주자에게 필요한 정보의 원천이라는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가 남긴 원곡 없이 어떻게 그들을 음악을 재현해내는 연주자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연주자가 작곡가의 종이나 노예 같은 존재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모든 연주자는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자신 고유의 해석을 통해 청중과 만나게 된다. 또한 모름지기 모든 연주자는 필히 작곡을 공부해서, 원작곡가가 원곡에서 보여준 의도를 파악하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주장일 것이다. 예술가의 놀라운 논리전개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솔직히 전문가인 알프레트 브렌델의 이야기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처럼 광대한 피아노 연주의 세계는 물론이고, 그가 템포와 리듬 그리고 해석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피아노곡들은 생소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가 존경하는 사부인 에드윈 피셔와 알프레드 코르토,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그리고 한스 폰 뷜로 같이 익숙한 이름이 나올 때면 반가운 기색이 들었다. 과연 피아노 전공자가 브렌델의 글을 읽는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참 궁금하다.
아무래도 독일계 연주자이다 보니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만과 슈베르트 등 주로 독일계 작곡가들의 작품을 위주로 소개된 점이 아쉽다. 다른 에세이에도 나온 것처럼 다양성(variety)을 추구했으면 좋았으련만. 하긴 A부터 Z까지도 영어가 아닌 독일어로 소개가 됐었지. 자, 이제 책을 읽었으니 브렌델의 음악을 들을 차례다. 그의 고별연주 앨범에 실린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 그리고 바흐의 곡이야말로 이제는 은퇴한 비르투오소가 우리에게 남긴 최고의 유산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