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말과활》4호에서 인상 깊게 본 글은 사진비평가이자 출판인인 김현호의 <언젠가 우리는 모두 CCTV가 될 거야>였다. 간혹 CCTV라는 기계-기능의 주시, 그 시각성이 과한 의인화에 기대어져 전형적인 파놉티콘의 논리로 가는 어떤 한계에 늘 아쉬웠는데. 필자는 여기서 CCTV의 감시 기능과 그 공포만을 열거해 뻔한 경각심을 도모하는 한계를 극복한다. 필자는 '식별'이라는 시각적인 행위- 아직까진 인간이 필요한 행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분별할 수 있는 카메라, 해석의 가능성이 도입되는 카메라가 가져올 우울을 진단하고, 안전이라는 가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납부'하는(그냥 제공이 아니라 납부라고 표현하고 싶은 게 아무래도 필자가 우려하는 자발적 정보 제공자로서의 시민과 그 구조에 대한 우려를 잘 드러내주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사회 현실을 우려한다.

필자의 글을 보고 번뜩 연관짓고 싶었던 책은 라깡 연구자 다리안 리더의 『모나리자 훔치기』였다. 거기 2장에 '빅 브라더라는 신화'라는 챕터. 리더는 오스트리아 예술가 아니타 비텍의 작업을 소개하는데, 비텍은 집에서 스튜디오로 이어지는 그녀의 동선을 다양한 CCTV 카메라로 기록했다. 리더가 비텍의 작업을 분석하면서 가장 먼저 부탁하는 것은 이런 장면을 보고 바로 빅브라더라는 측면으로 해석하진 말자는 것이다. 저 카메라가 나를 감시하고 있어, 라는 측면이 중요한 게 아니라 리더가 보기엔 "카메라들은 그것들이 기록하는 대상들은 안중에도 없다" "우리를 보는 것이 항상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가 더 중요해 보였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카메라에게 본다는 기능을 되돌려주는 비텍이라는 인간이었다.

CCTV를 둘러싼 안일한 논의에는 인간이 배제된 채 CCTV에 인간성을 부여하여 외려 인간미의 존속을 예찬하는 이야기가 있다. 학교에서,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도난 사고가 일어나면 "우리 괜히 사람 의심하고 그러지 말죠"라는 겉으로 볼 때에는 우리 인간이잖아, 우리 인간으로서의 관계는 유지해야지라는 말을 잘 지켜줄 신뢰의 도구로 CCTV를 자연스레 선택한다. 허나 이는 '나'가 곤란하기 싫다는 것일 뿐 나와 너의 상호성이 성립되는 단계로 나아가진 않는다. 즉 CCTV는 관계의 불편을 예방하는 단계에서 그 기능을 멈출 뿐 실제론 과오를 잡아내는 데는 관심이 없는 기기일지 모른다. 어쩌면 CCTV에 대한 인간의 기대 또한 그럴 것이다.
CCTV를 통해 사건의 해결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의 해소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재발되었을 때 CCTV는 걱정과 불안이라는 정서, 나와 관계된 이들과와 안전한 관계 추구와 동반된 묘한 쾌락을 동반한다. 물론 이를 드러내는 것은 금물이다. 이 심연은 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가 기꺼이 CCTV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어 그 심연을 남들과 함께 확인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리안 리더의 말처럼 "CCTV 카메라들은 보지 않는다." 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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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때'라는 때이른 표현을 내걸고 어떤 결혼상이 있었다. 헐리우드 로맨틱코미디 영화에 자주 나오는 한 장면 같은. 아내에게 연말이고 하니 회사 동료 부부를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자는 제안. 정갈한 식탁보, 앤티크한 촛대, 혹시 동료 부부가 사올지 모르는 와인을 따를 와인잔까지. 아내가 손수 요리를 하고 디저트까지 만들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에이 시켜서 그냥 접시에 얹자'라고 하는 이해심까지 구상해보았던 터였다. 







2. 교회명이 달린 십자가를 문앞에 붙이는 것보단 동료와 그의 아내가 식탁을 꽉 채운 요리를 보고선 '우와 이 많은 요릴 다 하셨어요?'란 진부한 감탄을 연발한 뒤 같이 기도를 하는 장면도 구상에 있었다. 각자 두 손을 모을까 아니면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을까 주기도문을 외울까 주기도문이 기니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는 굶주린 생명들이...'로 시작하는 기도를 할까도 미리 깔아놓은.

3. 때론 멍하니 텔레비전에서 하는 연말 시상식을 아내와 보면서 저 배우 혼자 타야 되는데 왜 공동수상이야란 불만을 서로 나누기. 그러다가 당신만 네일아트 하냐 나도 귤로 네일아트 한다며 개그를 치면 '아 짜증나' 하며 아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기도 있었다.

4. 혹은 애써 예약한 연극이었는데 같이 관람한 어린 대학생들의 타이밍 안 맞는 환호에 기분을 잡친 아내의 투덜거림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싸우다 서로 어색하게 대문을 열고 누구든 먼저 '나 먼저 씻을게' 하며 회피하는 것을 겪어보기도 있었다.

5.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와 이 소설에 모티브가 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그리고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 더 어울릴 듯한 카버의 <깃털들>을 연달아 읽고선 그렇게 '한때의 생각'을 새삼 떠올려보았다. 그러곤 물었다. 내가 갖고팠던 기분은 뭐였을까.

6. 후덥지근한 날의 연속인데 12월 말이 왔으면 좋겠다. 그게 안 될 걸 알기에 어르신들이 잘 하는 '아이고 시간 자아알 간다. 이제 몇 달 남았노?'란 말이 음성지원되어 시계와 달력을 재촉했으면 좋겠다. 그리 큰 대박은 아닐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자족하며 버텼다, 보냈다, 지나간다에 박수를 치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익명의 초대손님과 실컷 귤을 까 먹으며 티비를 보며 '자들은 멘트 연습 좀 하지. 맨날 상 받으몬 떨린다 열심히 하겠다 그른 말밖에 할 줄 모르노' 하는 돌직구 손님의 말에 다 같이 깔깔 웃어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7. 그러곤 어느 채널이든 잠시 고정시켜놓고 카운트 열부터 뜻을 모아 아홉,여덟, 일곱...잘 가다가 하나 반에 반 하는 장난꾸러기 친구의 소리에 티비와 일치되지 않은 '땡!'을 모두 크게 외치는. 
각자가 새해 문자를 보낼 때 카톡 숨김 버튼으로 감추어놓았던 흑역사의 목록을 봉인해제하고 '잘 지내지? 새해 복 많이 받기를..^^' 아니 건조하게 가자. '새해 복 많이 받으렴'의 그늘진 장면들도 덤으로. 그러곤 1이 사라질까 계속 있을까 초조해하지 말고 나가기 버튼을 누른 채 '야 재미있는 것 좀 틀어봐'라고 말하는 그날의 기분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모두에게 복된 새해 그 기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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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출판계에서 도드라진 움직임 중 하나를 꼽자면 시대의 어른을 찾으려는 것 같다. 사실 찾기도 하지만 이는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채현국 효암고 이사장의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라는 발언이 담긴 인터뷰를 비롯해 불문학자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가 큰 히트를 치면서 이런 움직임의 의도가 보이는 서적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사실 시대의 어른을 찾는다는 것이 새삼 새로운 기획 작업은 아니다. 최근의 분위기가 갖는 차별점에 대해 '인문적-'이라는 성격 부여를 꼽고 싶지만 이는 그 분야에 심취한 사람들의 시선에 지나치게 기우는 것 같다. 


2

외려 마음이 가는 쪽은 '꼰대포비아'에 걸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확인받을 수 있는 영역을 만났다는 것 아닐까 싶다. 꼰대라는 적대적 표현 속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동조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자신이 보기에 꼰대라고 예상했던 쪽이라면 그 확인 속에서 피어나는 희열은 좀 더 클 것이다. 여기에 '늙음'이 주는 잔잔함과 온기가 더해짐으로써 존경이라는 정서는 보다 굳건해진다.

하지만 황현산 이후 시도되었던 시대의 어른을 찾는 작업, 그 성공의 여부를 평가하자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도정일의 최근 책은 '맞는 말의 동어반복'을 통해 해석의 열림보다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바른말'에 더 가닿은 듯하고, 김우창의 『깊은 마음의 생태학』은 이 책을 만든 자들의 지나친 고개숙임이 페이지 내내 느껴져 부담스럽다. 특히 후자의 경우 한국 인문학의 기념비적 사유라는 호칭을 두른 건 책 내용을 읽어보건대 김우창의 지난 공로를 생각하더라도 과한 호평이라고 생각한다. 


3

사실 시대의 어른을 찾는 작업 속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우리 편이 아닐 것 같은 사람이 우리 편이네?' 하는 시선을 주는 흔적의 모음이다. 이 흔적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 요즘 인기 있는 구호와 잘 맞물려 '그래 이래야 정상이지' 하는 통쾌함을 주지만 그 이상으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볼지에 대한 고뇌의 영역은 주지 않는다. 속은 시원하지만 이 시원함을 넘어선 찝찝함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4

이런 찝찝함의 영역을 고민하게 된 건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읽으면서였다. 사이드는 일찍이 말년성lateness을 고민했던 아도르노의 작업을 해부하면서 말년성이 오늘날 사회에 던지는 가치를 모색한다. 양해를 구하고 책의 내용을 조금 소화해보면, 말년성이란 인간이 시간을 통해 맞춰갈 수밖에 없는 신체-정신-건강의 영역이 문학-예술과 결부되었을 때 전자의 영역이 슬그머니 협상하는 인간의 한계에 맞선 '화해불가능'의 예술적 태도를 말한다. 더 나아가 '화해불가능성'이란 사람들이 뻔히 예상하는 처음과 끝이 선명한 통일된 큰 그림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어붙일 수 없는 예술 작품 속 단절의 상태를 뜻한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세계를 초월해 뭔가 극도의 숙성된 느낌을 보여주리라 예상된 노령의 솜씨에 "야 이거 내가 한번 만들어도 이것보다 잘하겠다"라는 격한 반응이 동반된 아마추어리즘이 발표된다면 우리는 이를  그냥 "이 사람 이제 예전같지 않구만 그래"라고 쉬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에드워드 사이드가 아도르노의 해석에 탄복하면서 그를 범상치 않은 말년의 사상가로 위치짓고 싶은 건 바로 이 문제의식이었다. 이 문제의식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사이드의 해석은 그런 말년성을 실천한 사람들이 세상에 아예 무관심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세상을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감각을 갖고 이 감각을 곧이곧대로 쏟아붓는 게 아니라 조금 비틀어버리는 '형식'으로 자신들의 예민함을 둔감함으로 포장해버리는 단계는 말년성의 아름다움이었다. 


5

사이드와 아도르노가 주창했던 말년성을 실천했던 이들은 세상이 듣고 싶어하는 말들을 고스란히 옮기지 않았다. 그들은 쾌 대신 불쾌를 택했다. 그럼으로써 주변에 머물렀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택한 불쾌의 전략은 오늘날 그들을 계승하려는 후예들이 고스란히 학습해 써먹고 있기에 그들이 마냥 외롭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오늘날 시대의 어른을 찾는다는 것에 대한 반감은 '맞는 말의 동어반복'과 '굴복할 수밖에 없는 바른말'로 뭔가 움츠렸던 울분의 해소 정도로만 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비판의 복잡다단한 결이 윤리의 호소로 환원되었으며, 이런 형식은 기껏해야 온화함 속에 묻어난 단호함 혹은 김구라 같은 직설/독설이란 형식을 빌려 빚어내는 통쾌함의 도모일 뿐이다.


6

 나는 더 찝찝한 어른이 보고 싶다. 그가 대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기대하고 싶은 인문적 아포리즘 따위가 아닌 살면서 부대낀 그 나름의 경험담이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골계로 표현되었음도 싶다. 이를 위해선 '꼰대'라는 표현이 이 사회의 부조리를 겨냥한 평어로 작용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피아를 식별하는 격분의 언어로 전락하진 않았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랏 이 정도면 나 이 사람이 준 의외의 면에 감동받아 이 사회 그래도 아직 살만해'라는 정서에 만족하지 않고 '아 근데 이 사람 이 정도면 해주면 됐지. 아 이 이야긴 왜 꺼내? 사람 불편하게'의 정서를 주는 어른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 정서의 형식성을 고뇌 끝에 이미 내놓은 어른들에게도 우리는 주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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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던가?_ 오에 겐자부로의 《'나의 나무' 아래서》가운데


"나는 내가 어린 시절에 사람을 보았던 눈에는 옳은 부분이 있었다고 느낍니다. 틀린 부분도 확실히 있었는데 그것은 '저 사람은 안 된다'라는 식의 어른들의 말투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부끄러움과 더불어 그 생각을 취소합니다. 어른들이 '저 사람들은 훌륭해'라고 하는 말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때 항상 그것은 옳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책에선 겐자부로의 워너비 두 사람이 소개된다. 한 명은 자신이 다니던 학교의 사환 아저씨다. 아저씨는 야생의 사나움을 고스란히 공포로 뿜어내는 들개가 학교로 내려오자 이에 맞서 벌벌 떠는 학생들을 보호했다. 그의 나이는 겐자부로의 귀여운 비유처럼 후추보다 소금이 많았다. 

















3. 다른 한 사람은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이를 체험했던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학생들을 도피시키고 책임을 지려했던 교장선생님의 행동과 최후(교장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채 열쇠를 손에 쥐고 숨을 거두었다)를 자신의 눈과 생각대로 꼼꼼히 기억하고 기록했다. 이 학생은 커서 학자가 되었는데 겐자부로는 이 학자 밑에서 공부한 학생들과의 식사자리에서 학자의 위엄과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대지진 당시 그 학생의 이름은 마루야마 마사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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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잊혀지면 그만일 것을,알면서도 어쩔 수 없네_ 통속의 매혹은 우연한 문화적 접촉이 단번에 내 이야기인 느낌을 줄 때가 아닐까. 저 슬픈 노래의 가사, 저 황당한 영화의 결말, 저 담담한 산문의 고백이. 

2.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에서 <잊혀지면 그만일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네>를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21살 입영통지서를 받은 김연수의 기분. 군대에 간다는 것은 막막하다. 입대란 것 자체가 막막한 게 아니라 그 무력한 기다림 때문에. 그의 말마따나 군대에 간다고 해서 총검술을 미리 배운다거나 군복을 미리 받아 다림질을 할 수 있다거나 하는 현실이란 없다. 무얼 계획해서 그걸 븨자 체크해가는 정돈된 시간 채우긴 이별 뒤 친구와 나눈 대화 속 조언에 "고맙다. 잘 추스려볼게"란 빈말로 지금 네 이야기도 안 들어온단 태도 같은 것에 자릴 내주고 마는. 그런 기다림의 시간.

3. 우연에 맡기고 즉흥에 기대고 싶은 시간. 김연수도 글에서 누구나처럼 음주와 연애와 여행의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썩 멋지게 의미를 다듬어보지 않아도 흐트러지고 느슨해도 그걸 했단 것만으로도 뿌듯한 시간. 일어나면 돌아오면 머리와 마음이 아프고 허한 잔고에 허기지지만 하는 동안이라도 '될 때로 되라지'란 마음을 품어봤단 용기에 자족하는 시간.

4. 정처없이 떠도는 김연수가 일본만화 풍선마크 윤문 알바를 할 때 몸을 뉘이러 찾은 만화방. 김연수가 하는 작업을 신기해하며 그를 대단한 만화가 여기듯 묻고 보던 할아버지는 운동권 학생을 잡으러 온 경찰에게 왜 만화방 을 이 시간까지 여냐며 혼난다.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저는 아르바이트입니다" "할아버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수치심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뇌까렸다" "저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만 일하는 아르바이트라구요"

5. 김연수는 자기야 입영통지서를 받았다지만 이 할아버지의 삶은 무언가 싶어 멍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직업의 귀천이 아니라 우릴 이렇게 가게 한 삶을 향해. 짐작은 가능하지만 그게 정 말 맞다고 확인/확언하기 두려운 게 삶 아닐까 김연수는 여행스케치 2집 속 노래를 떠올린다. "잊혀지면 그만일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네"

6. 일을 그만두고 쉬면서 김연수의 글 같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거요?"란 질문이 미리 감지되어 거짓 계획안을 준비해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이럴 때 실컷 방황해" 하는 말들은 내게 성의가 없는 듯해 서운하기도 했다. 이 변덕의 오감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성실했다.

7. 햇빛 좋은 어느 날. 아직도 날 일꾼으로 기억해주는 두 분에게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냐는 말을 들었다. 나는 선언보단 매우 미지근하고 결심보단 조금 단단하게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자 좋아하는 선배 한 분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말은 하지 않은 채 눈빛으로 보낸 메시지가 이런 거란 걸 간만에 느꼈다.
돌아오는 내내 입에서 네 앞날 응원한다고 꺼내지 않아준 선배가 고마웠다. 내 선언과 결심 사이의 혼란을 눈치채고 자신의 제안을 거두어준 채 시시콜콜한 요즘 사는 이야기를 들려준 친구 O양에게 나는 빚 하나를 진 것 같았다. 그들 덕분에 종점에서도 곤히 자는 할매들의 어깨를 살짝 만지며 저 할머니 다 왔는데요 연한 오지랖을 떨 수 있었다. 나도 내릴 곳을 지났지만 간만에 단잠 잤네라며 마음에 달달한 풍선껌을 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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