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미술 시간에 어디 식물원으로 사생 실기를 하러 갔다. 나는 요즘 말로 ‘ X손‘이라 그 때나 지금이나 미술에 대단히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닌데 좀 엉뚱하기는 했다. 5월인지 6월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햇살이 아주 좋은 그런 날이었던 거 같다. 무성한 활엽수 가지들 사이로 내려쬐는 햇발이 너무나 아름다와 보였다. 능력도 안 되는데 그걸 그려보겠다고, 참. 4절지 가득, 나뭇 가지와 잎사귀들을 그린 것 까지는 그러저럭 괜찮았는데, 그 위에 기하학적으로 빛의 무늬를 그려넣기 시작하자 그림은 폭망했다. ㅠㅠ
사실, 그런 건, 모네나 마네같은 천재들이나 시도 해 볼 수 있는 거였다.
언제부터인가, 비가 좋다. 비 내리는 날이 좋고 비와 관련 된 노래들이 좋다. 비가 지나가고나면 공기가 좀 맑아진 느낌이 들고 뭔가 고인 것들이 씻겨내려간 듯 개운한 기분도 든다. 습도가 높으면 대개 활동성이 줄어들고 감정적으로 좀 차분해지고 생각도 많아진다.
비가 거세게 내리거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녹음 버튼을 켜고 녹음을 해 보기도 한다. 나중에 들어보면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하는 빗소리, 자동차가 빗길을 긋고 가는 소리들을 들어 볼 수 있다. 어느 밤의 녹음분에는 천둥 소리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사진을 찍는 것이다. 비는 투명한데 그걸 담아 보겠다고, 참. 방충망을 찍어 보거나 유리창에 흐르는 비를 찍어 보거나 한다. 우산을 쓰고 내 발밑의 동그라미를 찍어 볼 때도 있다. 그리고, 오늘처럼 처마, 30년도 넘은 우리 빌라의 처마. 퇴근하면서 보니 처마 끝에 비가 흐르고 있어 찍어 본다. 이틀 전에 빌라 외벽 페인트를 다시 칠했는데 그래도 파이고 할퀸 세월의 흔적은 그대로다.
위층 어르신은 빗물도 아깝다고 들통을 놔뒀다.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중학교 때 빛을 그리겠다고 덤볐던 엉뚱이가 떠 올랐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더니... 이렇게 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허무한 거에 또 맘을 뺏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