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추억 전당포 스토리콜렉터 11
요시노 마리코 지음, 박선영 옮김 / 북로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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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맡아준다니 이것이 가능할까? 현실 세계에서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법사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설정은 바로 비현실적 존재인 마법사를 인정하고 그가 아이들의 추억을 맡아두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럼 추억을 맡아둔다는 것은 무얼까? 흔히 말하는 추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고 가끔 가슴속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인데 말이다. 바로 여기서 마법사의 마법이 힘을 발휘한다. 추억에 가격을 매기고 돈을 빌려준 후 돈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이 추억을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적 제한을 둔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다.

 

추억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친구들을 만날 때면 늘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의식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한다. 이 추억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닐 때는 더욱더.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친구와 과거를 공유할 때 이야기다. 장난감이나 게임기를 사야하는 아이들이라면 어떨까? 그들에게 이 추억은 그냥 사라져도 되는 나쁜 기억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바로 이 부분이 마법사로 하여금 추억을 맡아두는 사업을 하게 만든다. 그 추억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어린 아이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마법사가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되면 이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최대한 살아봐야 120세가 한계인 사람에 비해 살아온 세월도 살아갈 시간도 알 수 없는 마법사에게 이 일은 하나의 취미다. 사실 이 소설 속에서 마법사의 능력은 우리가 흔히 동화나 전설 속에서 만나는 마법사의 그것을 초월했다. 여기에 외모도 그 흔한 모습과 다르다. 이런 설정은 전체 이야기 속에서 에피소드와 사연들과 엮이면서 큰 힘을 발휘한다. 할머니를 친 뺑소니를 잡으려는 유키나리의 행동이 미래에 어떻게 펼쳐질지 알려주는 것에서, 이 소설 속 여주인공인 리카의 우정과 사랑의 충돌 속에서도, 왕따 당하는 메이를 둘러싼 현실 문제에서도.

 

그렇게 많지 않은 출연자들이지만 소설은 간략한 이야기 속에 이들을 잘 녹여내었다. 이기적인 유키나리나 미모 때문에 오해와 질시를 받는 메이나 늘 혼내는 엄마를 싫어하는 하루토 등이 대표적이다. 개별적일 수 있는 이들을 중간에서 이어주면서 마법사를 통해 삶을 하나씩 배우는 리카는 말할 것도 없다. 길지 않은 에피소드 속에 그 나이 또래의 문제들이 나오고 개입자나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인 마법사를 통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이 시각이 바로 이 소설이 지닌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조금 밋밋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죽음이 나오고 오해와 질투와 왕따가 나오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무겁지 않다. 영원히 사는 마법사를 방문한 리카를 통해 삶의 또 다른 면을 본다. 그들에 비해 찰나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찰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보여줄 때 마법사의 추억 전당포가 지닌 의미와 왜 그가 이런 일을 하는지 조금은 깨닫게 된다. 분량에 비해 비교적 긴 세월을 다루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을 부각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기억과 추억의 차이를 생각하고 삶이 바로 이런 추억과 기억의 총합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화려하거나 환상적이라고 하기보다 제목처럼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들이 반짝반짝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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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제주도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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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얼마 전에 경복궁 등을 무대로 한 6권을 읽은 듯한데 벌써 7권이 나왔다. 이번 서문에 ‘제주허씨’를 위한 ‘제주학’ 안내서란 제목이 붙어 있다. 제주허씨? 제주의 그 유명한 삼성 중 하나인가? 하고 순간 착각도 했다. 그런데 이 허씨가 놀랍게도 렌트카 번호판을 의미한다. 렌트카 차번호에 붙는 허자를 둘러말한 것이다. 그리고 왜 제주학 안내서를 내었는지 말한다. 출가한 여제자의 푸념 때문이다. 다른 곳은 답사한 곳을 돌아보면서 시댁에 점수를 땄는데 제주도는 일반관광만 다녀와서 제주의 참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 덕분에 생각하지 못한 제주의 새로운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은 큰 행운이다.

 

예전에 한 후배가 말했다. 자기는 하와이보다 제주도가 훨씬 좋다고. 이 이야기를 하면 주변 사람들은 콧방귀를 뀐다. 우리 속에 있는 사대주의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 하와이가 좋은지, 우리가 제주도의 참모습을 모르는 것 때문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실제 내가 제주도를 다녀온 것은 20년도 전이다. 그 사이 엄청나게 변했다. 어떤 제주도 지도를 보면 골프장만 보이는 것도 있었다. 얼마 전에 몇 번이나 제주를 다녀오신 장모님의 여행코스는 살짝 실망스러운 일정이어서 후배의 말이 무색했다. 그리고 내가 아직 하와이를 가보지 않은 상태라 정확한 평가가 어렵다. 언젠가 제주에 살고 있는 후배의 도움을 받아 며칠 여행해야지 하는 생각은 늘 하고 있지만.

 

제주학이란 용어처럼 인문학적으로 접근한 내용도 많다. 전문적인 여행서적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관광지는 빠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오름을 찍은 사진은 필리핀 보홀섬의 한 풍경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더 분명하고 기이한 것은 보홀섬이지만 제주의 오름도 그에 못지 않고 좀더 색다른 분위기를 전해준다. 아마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도 아마 제주 오름과 한라산 영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제주에 대한 역사와 그에 얽힌 수많은 사연과 전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 책을 통해 여행과 관광을 하려는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겨우 며칠 휴가를 내어 오는 직장인이라면 더욱더.

 

사실 제주는 한국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국내관광지 1위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한곳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 책이 보여주고 알려주고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는 만큼 설명하고 이해하고 느끼는 시간이다. 필수 관광코스에 들어가지 않는 곳을 다루는 것이 많다보니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곳도 상당하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머물게 된다. 이미 유럽의 수많은 관광지가 이런 스토리텔링을 통해 멋진 관광지로 자리 잡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많은 도움이 될 것이고, 내가 제주 여행을 하는데도 많은 참고가 될 것 같다.

 

참으로 인상적인 것은 삼다(三多)니 삼무(三無)니 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본향당이다. 일본으로 떠난 제주도민이 돌아와서 가장 먼저 찾는 곳이자 마음의 고향 역할을 하는 그곳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제주출신 재일교포 공덕비와 연결해서 풀어낸 것은 어떻게 보면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지만 가슴 한켠에 진한 여운과 감동은 남겨준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 가슴 한 곳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자 행복인지를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지금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나에게 그런 곳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쉽게도 그런 곳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오름이 멋진 풍경과 함께 새롭게 다가오면서 다음에 제주를 방문하면 꼭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면 돌하르방은 기존 인식을 깨트려주었다. 그냥 무심코 쳐다본 돌하르방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코 지워지지 않는 현대사의 비극은 제주인의 삶에 큰 아픔을 남겼고 지금도 그 아픔은 진행 중인 듯하다. 아마 그 시기를 경험하고 그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은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쉽게 잊혀지지도 않고 치유되지도 않을 것 같다.

 

한 학자가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니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전문가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존재한다. 국적도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있다. 이들의 연구와 열정이 있었기에 이런 저작이 나왔다. 저자가 이것을 책 마지막에 간략하게 다룬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제주도를 좀더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안내서 역할을 한다. 이제 겨우 한 번, 그것도 20년도 전에 갔다 온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지만. 앞으로 개인적으로 몇 번이나 더 제주도를 다녀올지 모르겠지만 아마 이 책은 흔히 하는 뻔한 말로 ‘가슴 한 곳에 자리 잡고 거기를 가야하지 않겠냐’고 말할 것 같다. 불과 1~2개월 전에 다녀온 직장 동료와 곧 다녀올 동료가 갑자기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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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를 위한 밤 데이브 거니 시리즈 2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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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다. 존 버든. 뉴욕 경찰의 전 에이스. 지난 사건이 끝난 후 1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그의 삶에도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전편에서 기대했던 훈훈한 마무리는 현실 앞에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게 삶이다. 그리고 그의 삶이다. 경찰학교에서 강의하지만 경찰 일은 더 이상하지 않고 있다. 지난 사건이 그의 삶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쉽지 않다. 조금은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 이런 일상을 깨트린 것은 잭 하드윅이다. 이상한 사건 하나를 그에게 소개하고 그 사건의 미스터리가 그를 유혹하게 만든다. 형사는 아니지만 다시 현실 앞에서 컨설턴트가 된다.

 

한 결혼식에서 신부가 살해됐다. 그 결혼식은 4대의 카메라와 1대의 헬기가 사방에서 촬영하고 있었다. 유명한 신경외과의의 딸 질리언과 유명한 정신분석의 애슈턴의 결혼이었다. 모두가 축복하는 현장에서 잠시 사라진 신부가 목이 잘린 채 발견된 것이다. 그녀가 죽은 집은 애슈턴의 멕시코인 정원사였던 헥터 플로레스가 살던 곳이다. 당연히 제1 용의자는 헥터다. 그녀의 죽음과 동시에 그가 사라졌고 집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살해 흉기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옆집 여자도 함께 사라졌다. 모든 증거와 정황이 그가 살인자임을 말하고 있다.

 

전직 형사였던 그에게 이 사건이 오게 된 것은 잭이 이 사건에서 쫓겨나고 조금도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범인 헥터를 찾아달라고 의뢰한 것은 질리언의 엄마다. 연봉 4천만 불을 벌고 있는 남편을 둔 그녀에게 돈은 조금도 부담이 되지 않는다. 거니는 이 사건을 바로 수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아내 매들린과 현재의 삶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뛰어나고 이 일을 사랑한다. 잭이 준 자료를 검토하면서 이 사건에 빠지고 2주 동안만 이 사건에 관여하겠다고 말한다. 아내와의 관계가 다시 삐걱거린다.

 

사건 현장을 찍은 비디오를 보여줄 때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범인이 있었다. 하지만 곧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의 목을 자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가 보여주는 현장과 이야기와 증거와 증언들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헥터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빠져있다. 왜 그렇게 긴 세월 동안 그는 애슈턴의 정원사와 비서로 얌전하게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파헤치는 과정에 결코 유쾌하지 않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은 질리언의 과거다. 그녀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성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가해자로 살았다. 애슈턴과 만났던 것도 성 가해자들을 위한 학교 메이플쉐이드에서다.

 

이야기의 중심은 이제 번역 제목인 악녀에게로 향한다. 질리언에 대한 주변 사람과 엄마의 평은 최악이다. 그녀가 지닌 엄청난 미모와 너무나도 뛰어난 지능은 어린 시절 성 학대와 성 가해로 빛을 조금 바랬다. 그녀에게 당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은 헥터를 금방 찾을 것 같다. 하지만 쉽지 않다. 거니는 사건 보고서를 다시 검토하고 의문점을 메모하고 다시 한 번 더 DVD를 본다. 뭔가 명확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많은 의문이 생길수록 그의 능력은 빛을 발하고 진실에 한 발 더 다가간다. 그의 한 발 다가가는 행위가 상대에게는 점점 더 강력한 압박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소설은 엄청난 몰입도를 자랑한다. 단숨에 읽었다. 책 중에서도 다뤘지만 우리가 흔히 여성을 성 학대의 피해자로만 보는데 이 소설은 우리의 인식을 단박에 깨트린다. 여성 가해자들을 등장시킨 것이다. 이미 다른 소설에서 여자들이 성 매수자가 되어 어떤 가해자가 되는지 읽었기에 특별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읽는 사람이 불편할 정도면 그 가족은 더할 것이다. 악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반응인데 이 부분을 극대화해서 엄청난 사건으로 발전시킨다. 작가의 역량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범인을 흩뜨리고 독자를 엄청난 이야기 속으로 끌고 들어가 헤매게 하는 그 힘은 정말 대단하다.

 

640쪽이 넘는 소설이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거니의 삐걱거리는 결혼과 너무나도 분명한 현실 때문에 너무나도 이상한 살인사건이 충돌하면서 긴장감을 유지한다. 밀실살인의 조건을 갖춘 현장은 혹시 비밀 공간이 있나 의심하게 만들지만 결코 없다. 이런 이상한 현장과 난무하는 이야기와 증언들은 작가가 단서로 앞에 깔아둔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조사할수록 점점 많아지는 희생자의 단서와 경찰 내부의 알력과 검사의 권력욕은 충돌하고 협력하면서 굴러간다. 조직의 힘은 아무리 뛰어난 형사 거니라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하지만 거니는 그 수많은 형사들이 결코 하지 못했던 일을 한다. 마지막에 진실이 드러날 때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처음 품었던 의문을 다시 품는다. 원제가 지닌 의미가 드러날 때 넘실거리는 악의의 무서움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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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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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유명했던 아버지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를 숨겨야 했던 작가. 그의 이름이 유명해지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밝혔던 그. 하지만 앞으로 그의 삶은 계속해서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의 아버지가 스티븐 킹인 이상은. 사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읽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킹의 그림자를 지운 채로. 그렇지만 그가 보여준 이야기가 탁월할수록 그 능력이 어디에서 생긴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설에서 킹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카프카적 ‘변신’의 공포를 말할 때 아직 읽지 않는 책의 시작이 어떠했는지 말해준 팟캐스트 속 작가 김영하가 떠오른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려주지 않고 변한 현실을 바로 지금 눈앞에 펼쳐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그나티우스 마틴 페리시에게 생긴 뿔을 말이다. 바로 전날 밤만 해도 전혀 없었던 그것이 머리 위에 생겼다. 숙취에 시달리니 가장 먼저 술이 덜 깬 것인가 생각하지만 그 존재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리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그를 마주한 사람들이 진짜 속마음을 하나씩 말하는 것이다. 결코 알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왜 이런 뿔이 생겼는지 설명하기보다 이 뿔 때문에 생기는 일들과 과거에 생긴 사건과 추억들이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진실했던 이그의 파탄난 삶이 지난 1년 간 어떻게 굴러왔는지 보여준다. 그 속에는 그의 애인이었던 메린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주변 사람들의 속내가 밝혀지고 진실이 드러난다. 그 드러난 진실이 뿔난 이그로 하여금 지옥을 경험하게 만든다. 하지만 악마의 능력과 형상을 한 그는 우리가 알고 있던 악마로 변하지 않는다. 아직 그 자신의 완전한 능력을 깨닫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이그가 가진 뿔이 인간의 가장 은밀한 욕망과 감정을 밖으로 드러나게 만든다면 메린과 이그를 연결시켜준 메린의 목걸이는 순수함의 결정체로 모든 악을 막아준다. 이 강렬한 힘의 존재는 단순히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형상이 그것을 규정하기보다 존재의 의지가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은밀하고 깊이 숨겨진 마음을 드러낼 때도 그것이 바로 그들의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들의 일부분만 말할 뿐이다. 인간인 이상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약점이자 현실이다. 비록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면서 상대방을 괴롭히고 아프게 할지라도.

 

뿔을 단 악마가 등장하는 공포소설을 생각하고 읽었는데 중간부터 분위기가 바뀐다. 과거의 순수했던 시절과 열정적인 사랑이 나오면서 로맨스 소설로도 읽힌다. 그리고 어떻게 왜 메린이 죽었는지 알려줄 때는 스릴러로 변한다. 이런 변주는 이그의 과거와 현실을 교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펼쳐진다. 그가 마주한 절망적인 현실은 구원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복수라는 형태를 통해 마무리된다. 몰론 구원은 존재한다. 그것은 그를 버리려고 했던 여자 친구 메린의 숨겨진 진실을 통해서다. 사랑했기에 그 사랑을 거부하는 척해야 했던 그녀의 삶이 모든 아픔과 두려움 속에 자기 파괴적인 삶을 살아야했던 이그를 구원한다. 그 과정이 너무 무시무시하고 아프고 놀랍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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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뒤에서
미리엄 할라미 지음, 천미나 옮김 / 동산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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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 있다. 그것은 외국인들이다. 한때 외국인이라면 백인이 거의 전부였는데 어느새 동남아나 중동 사람들이 눈에 자주 들어온다. 물론 명동이나 시내 관광지를 가면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가장 많다. 하지만 서울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한국으로 돈을 벌려고 온 동남아나 중동 사람들이 보인다. 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시선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백인들을 보는 시선과 다르다. 이전에 일본인들이 한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을 볼 때 본 것과 유사한 시선이다. 그런데 이런 시각이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선진국에 수많은 인종들이 모여 살고 있는 영국에서도 적지 않은 듯하기 때문이다.

 

열네 살 앨릭스는 아빠가 다른 여자와 달아났고 엄마는 다리를 다쳐 집안일을 돌봐야한다. 다른 아이들이 놀고 어리광을 부릴 시간인데도. 이혼과 사고는 모녀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악화시킨다. 이런 일상에 큰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사미얼과 어느 날 그들 앞에 나타난 불법 이민자다. 사미얼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는 외모 때문에 불량배들의 놀림감이 된다. 괴롭힘을 당하는 그를 보고 앨릭스에게 조그만 변화가 생긴다. 어쩌면 동질감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다가간 것은 역시 백인인 앨릭스다. 지갑을 돌려주기 위해서지만.

 

지갑 때문에 사미얼의 집을 방문하지만 낯설기만 하다. 그의 형 나짐은 앨릭스에게 불만이 많은 듯 행동한다. 그 집을 황급하게 나오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 한 번 놀러오라고 한다. 그냥 지나가다 한 말이다. 그런데 그가 온다. 그리고 이 둘은 바다에서 익사 직전까지 간 한 사람을 발견한다. 바로 불법 이민자 모하메드다. 그를 구하는 순간 이 둘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빠진다. 그것은 모하메드가 불법 이민자라는 것과 그의 몸에 남겨진 상처와 아주 나쁜 몸 상태다. 그냥 119를 불러서 모든 일을 처리하면 쉽겠지만 역시 모하메드의 신분이 문제다. 신고를 강하게 반대한 것은 사미얼이다.

 

모하메드의 등장은 이제 숨겨져 있던 과거와 현재를 하나씩 밖으로 드러내는 기회다. 처음은 왜 모하메드가 추운 겨울 바다에 던져졌는지 하는 것이다. 모하메드와 사미얼이 이라크 사람이란 사실이 밝혀지는 것도 이때다. 시대 배경이 이라크 전쟁 이후임을 생각하면 그가 불법 이민자가 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라크의 모습은 정말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들이다. 진짜 이라크의 모습은 숨겨져 있다. 제목처럼 문 뒤에서는 우리가 상상도 못한 일들이 벌어진다. 모하메드처럼 영국군 통역을 했다고 참살당하거나 고문을 당하는 참혹한 일들이 빈번하게 생긴다. 미군이 낮을 지배하고 있지만 밤은 낮을 강한 빛에 대비해서 더욱 어둡고 암울하다.

 

어린 앨릭스와 사미얼이 등장하다보니 불안감이 곳곳에 드러난다. 당연한 일이다. 이제 겨우 열네 살이다. 하지만 그들은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발휘한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길을 찾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다. 이 과정 속에 자연스레 불법 이민 문제와 난민 같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 등을 풀어놓고 고민하게 만든다. 특히 자주 나오는 “2퍼센트는 너무 많아.” 문장은 전 세계 난민 중 영국으로 들어오는 난민의 비율이 지닌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히 퍼센티지의 문제가 아니라 난민에 대한 인식을 포괄적으로 드러내준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바로 모하메드 구조를 둘러싼 어려움과 두려움이라면 앨릭스를 둘러싼 환경은 이와 대비되면서 성장이란 단어를 되돌아보게 한다. 한 소년과 소녀의 성장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과 동떨어진 나라의 현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자신들의 용기가 주변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등을 말이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한 곳에서 자신을 바로 세우고 용기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보여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 둘의 불안하지만 진솔한 행동과 감정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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