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 이야기 - 역사를 바꾼 은밀한 무역 예문아카이브 역사 사리즈
사이먼 하비 지음, 김후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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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밀수(smuggling)를 검색하면 ‘세관을 거치지 아니하고 몰래 물건을 사들여 오거나 내다 파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밀수를 불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소한 것 정도는 위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역자가 지적한 것처럼 해외여행에서 금액 한도 초과한 것을 그냥 들고 오는 것이나 금지된 과일이나 책 등을 가져오는 것 등이 대표적으로 사소한 위반 사항이다. 이 책은 우리가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과거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 말하고, ‘밀수가 국가의 첨병 또는 선발대 역할을 하면서 그 힘을 떨치는 데 도움을 주는 동시에 국가 정책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밀수하면 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문익점의 목화씨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중국에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다루는 것은 몇 개 정도의 씨앗이 아니다. 수백을 넘어 톤의 단위까지 밀수를 통해 재배하려고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차와 기나나무나 고무나무 등이 있다. 차의 경우는 중국 기술자까지 데리고 갔는데 현실에서 그들의 위치는 높은 기술자가 아닌 단순 노동자 바로 위였다고 한다. 왜 이렇게 차를 재배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것은 엄청난 무역적자 때문이다. 엄청난 아편을 밀수해서 중국에 뿌렸지만 일반 대중들까지 차를 소비하면서 적자가 심화되었다고 한다.

 

근대의 밀수는 현대의 밀수와 다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국가 차원에서 밀수를 장려한 경우가 16세기 이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많았다. 밀수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해적이다. 그중에서 정부의 허가를 받은 사략선이다. 이 책의 앞부분은 향신료를 비롯한 다양한 물건의 밀수를 둘러싼 그 시대 각국의 정책과 그 시대의 유명한 해적과 지배자에 대한 이야기다. 해적 이야기 부분에서는 이전에 읽었던 카리브 해적 이야기가 조금 떠올랐고, 향신료는 <향료전쟁>의 일부분이 생각났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힘들었던 부분은 중남미를 무대로 한 장들이다. 낯설고 읽기 힘든 긴 이름이 나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다양한 출처를 인용한 부분이 두뇌를 과부하 상태로 이끌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장은 역시 사상을 밀수로 전했다는 부분이다. 조선 시대의 한 장면이 먼저 떠올랐지만 불교나 천주교처럼 종교나 7~80년대의 불온서적이었던 <자본론> 등이 이어서 연상된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신약성경이나 근대 철학자의 서적 등이다. 기존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책들은 언제나 정부의 금서가 된다. 하지만 지적 호기심과 시대의 변화는 이것을 가볍게 넘어선다. 이 책의 재미난 점은 이런 것들을 조금 딱딱하지만 다양한 자료 조사와 인용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 많고 낯선 이름이라 금방 질리는 경우도 많다.

 

전쟁이 일어나면 밀수가 줄어들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전쟁 중 밀수가 만연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작가는 영국과 프랑스 전쟁을 말한다. 서로 대치적인 두 나라 사이를 오가는 밀수꾼들의 모습은 이익이 있다면 어디든지 간다는 장사꾼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리고 실재로 전쟁은 밀수를 부추긴다. 당연한 일이다. 적국에 의해 필수품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고, 밀수는 높은 이익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북한 고위층의 생활이다. 경제 제재가 가해지고 있는 상황임을 생각하면 밀수 말고는 단박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근대 미국은 밀수로 산업을 일으켰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차나 고무나무 등이 없었다면, 향신료 등을 밀수하지 않았다면 그 부는 다른 나라들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이 밀수가 현대로 넘어오면 더 복잡해진다. 미국의 밀수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에 무기를 몰래 전해주고, 그 돈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정권을 수립하는 쪽으로 발전한다. 이때 원조가 지금 부메랑처럼 돌아온 경우도 적지 않다. 또 루브르 미술관에서 본 수많은 문화재들이 어떤 식으로 오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밀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진다. 노예무역도 있었으니 그 범위는 더 넓어질 것 같다.

 

어떤 시대, 어떤 지역에서는 밀수가 노골적으로 일어났다. 중남미의 몇몇 장소는 해적이 관리할 정도다. 이 때문에 ‘밀수는 불법이지만 밀수품은 시장에서 공공연하게 팔렸다’라는 말이 더 쉽게 이해된다. 그리고 현대로 오면 역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밀수품이 하나 있다. 바로 마약이다. 중국의 아편과 함께 연상되는데 이 마약은 현재 최고의 금지물품이다. 당연히 유통되려면 불법으로 유통될 수밖에 없다. 동남아 황금의 삼각지와 중남미 마약 재배지는 언제부터인가 나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몇몇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춤춘다.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의 과거와 현재도 역시 같이 떠오른다.

 

정말 방대한 자료가 녹아 있다. 밀수를 이렇게 광범위하게 다룬 책은 처음일 것이다. 해적과 마약과 사상과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인용이 나온다. 소설도 하나의 자료가 된다. 단순히 몇 권 수준이 아니다. 중남미 밀수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정점을 찍는데 보르헤스의 단편들에 대한 갈증을 불러올 정도였다. 밀수는 분명 불법이다. 하지만 이것이 거대한 수준에서 벌어진다면 시대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문익점처럼. 그리고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내용도 어렵지만 번역이나 편집에 아쉬움이 많다. 역사를 바꾼 무역이란 부제가 정말 딱 맞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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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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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읽었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너무나도 화려한 수상경력과 작가가 중국계라는 사실이 나를 자극했다. 화려한 수상 이력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중국계라는 사실이다. 당시 어렸던 나는 이 사실이 불만스러웠다. 영미권 SF 작가를 제외하면 괜히 낮추어 보던 나쁜 습성이 있던 때였다. 좋은 SF 작가들이 여러 나라에서 나왔지만 정보 부족과 낮은 인식 수준으로 잘 받아들이지 못하던 때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SF 장르도 아니었다. 하지만 화려한 수상 이력은 늘 이 책에 관심을 두게 만들었다. 언젠가 읽고 말겠다는 의지와 함께.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중편 분량도 몇 편 된다. 예상한 대로 이야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이 단편집에 대한 수많은 리뷰의 점수와 열광은 나로 하여금 놀라게 만든다. 아니 나의 지적 수준을 의심하게 만든다. 내가 각 단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학력을 보면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이런 전공은 각각의 이야기 속에 녹아 있다. 아니 어떤 부분은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설명하기 위해 SF를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단편을 읽은 후 작가노트를 보았을 때 이런 의심은 더 강해졌다. 물리학 용어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처녀작이자 역대 최연소 네뷸러상 수상자의 영예를 안긴 <바빌론의 탑>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벨탑 이야기다. 하지만 작가는 신학적으로 이 이야기를 접근하지 않고, 물리학적으로 접근한다. 탑의 꼭대기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몇 개월이 걸리고, 가는 곳곳에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야훼를 말하지만 그들은 하늘에 닿기를 원할 뿐이다. 벽돌을 수레에 실고 내부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그 모습은 나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현대의 마천루보다 훨씬 더 높은 곳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또 한 번 나의 상상력을 벗어난다. 현대 물리학의 한 단면을 SF로 풀어낸 듯하기 때문이다.

 

<이해>는 가장 쉽게 읽었다. 처음에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영화가 한 편 있다. <리미트리스>다. 이 영화는 같은 이름의 원작 소설이 있다. 이 두 편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약물에 의해 머리가 좋아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단편과 장편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다르다. 작가의 성향도 다르다. 영화 덕분인지 아니면 물리학 이야기가 적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빠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무협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은 왜 제목이 <이해>인지 잘 알려준다. 물론 이 결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영으로 나누면>은 어렵다. 단순히 암기하고 있는 수학을 생각하면 답은 쉽다. 그냥 영이니까. 하지만 작가는 수학의 증명을 끌고 들어와 배경으로 깐다. 그 배경 위에서 남녀의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펼쳐진다. 이때 등장하는 두 주인공의 전공이 수학과 생물학이다. 물리학만큼 이 두 학문은 가깝지 않다. 증명 이야기에서는 수학의 명제를 둘러싼 몇 가지 에피소드가 떠올랐지만 ‘떼어놓는 종류의 감정이입’이란 단어처럼 나의 생각은 작가의 이야기와 다른 곳에 빠져들었다. 아직 수학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에는 나의 능력이 많이 부족하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얼마 전 미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소설을 읽고 영화는 어떤 식으로 구성하고 표현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단순히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구성만으로 표현했을지, 아니면 좀더 복잡하게 엮었을지. 이야기의 구성은 복잡하지 않다. 언어학 교수인 화자가 외계의 생명체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 한 축이고, 다른 한 축은 그녀의 딸에 대한 기억들이다. 현재가 시간 순으로 흘러간다면 기억은 시간이 뒤섞여 흐른다. 갑자기 딸의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이 나와 놀랐는데 또 다른 기억들이 계속 흘러나온다. 작가노트에서 읽은 변분 원리를 바탕으로 글을 썼다고 하는데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흔두 글자>는 호문쿨루스와 골렘의 전설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찰흙이나 주조물 등에 이름을 새겨 넣으면 움직인다는 설정이 컴퓨터 언어를 떠올려주었다. 인간의 정자에서 호문쿨루스가 탄생하고, 인류의 멸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설정은 기괴하다. 보통의 SF나 판타지 작가라면 더 거대한 모험으로 만들었겠지만 작가는 더 깊은 곳으로 이야기를 파고든다. 작가노트에 폰 노이만의 기계가 나오는 것을 보면 나의 해석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종의 멸종을 막기 위한 연구와 그 성과를 둘러싼 충돌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춘 것은 아쉽다. 대체역사물 장편으로 발전시켜도 가장 무리가 없는 작품이 아닐까 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인류 과학의 진화>는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실렸던 단편이다. 아주 짧은 단편인데 함축적인 내용이 많아 어느 순간 길을 잃었다. 다시 뒤적이다 보니 <공각기동대>의 전뇌가 떠오르기도 한다. 가장 화려한 수상 이력을 가진 <지옥은 신의 부재>는 기독교의 천사들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낸다. 신의 존재보다 신의 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이것을 인간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다양한 경우를 통해 보여준다. 천사의 출현으로 인한 은혜도 있지만 죽음도 같이 다루면서 상황을 더 미묘하게 만든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마지막 문장에 나온다. “그리고 신의 의식 너머에서 오랜 세월을 지옥에서 살아온 지금도 닐은 여진히 신을 사랑하고 있다. 진정한 신앙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 다큐멘터리>는 과학에 의해 미적 판단 기준이 사라지는 기계를 둘러싼 이야기다. 제목처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같은 인물과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여 이 기계의 사용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주장을 들려준다. 단순히 미적 판단만을 다루지 않고 상업성과 인간관계를 같이 나열하면서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든다. 본능과 문화 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미적 판단이다. 이것을 강제로 조정하는 놀라운 기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작가의 놀라움은 이 도구가 아니라 이 도구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과 음모 등을 아주 잘 표현했다는 점이다. 조금 어렵게 모두 읽었지만 언젠가 다시 차분히 읽어야 할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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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 아버지 한국대표시인 49인의 테마시집
고두현 외 지음 / 나무옆의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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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주제로 엮은 테마시집이다. 이보다 먼저 어머니를 주제로 한 테마시집 <흐느끼던 밤을 기억하네>가 출간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잠시 생각하니 아이에게 늘 우선순위는 어머니였다. 거의 대부분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단어도 엄마다. 괜히 이런 생각을 하니 한 아이의 아버지인 내가 뒤로 밀린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생각해본다. 20세기의 한국 경상도 아버지의 전형과도 같았던 당신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다가왔던 것도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반복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자라면서 그 중요함과 고마움을 안다면, 아버지는 다 자란 후 알게 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 시집은 30대 이후에게 더 감성적으로 다가올지 않을까 생각한다.

 

49인의 시인 중 어머니를 주제한 시집에도 시를 올린 시인이 보인다. 하지만 많은 시인들의 이름이 바뀌었다. 아직도 시인을 잘 몰라 낯선 시인이 대부분이지만 생각보다 알고 있는 시인이 곳곳에 보인다. 3부로 나누어 편집했는데 1부의 경우는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직 살아계신 아버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의 그리움이 나의 현재와 미래를 떠올려주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자라는 동안 아버지와 말을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고, 다 자란 후에도 집안 이야기는 대부분 어머니와 했다. 아버지와 둘 만 있으면 할 말이 없어 그 어색함을 견딜 수 없었다. !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 나와 둘이서 돼지갈비에 소주 한 잔 한 날 기분 좋게 나와 술을 먹었다고 어머니에게 전화했던 것이 떠오른다. 실제로는 나와 술 한 잔이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명색이 장남인데 말이다.

 

이 시집에 나오는 아버지들은 모두 남자들의 아버지인 것 같다. 여자 시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있다면 나의 착각이나 실수겠지만 남자의 시선에 본,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인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마음에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감정들은 시인의 경험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는 그리움이고, 누군가는 아쉬움이고, 어떤 이에게는 정산되지 않은 감정들의 복합체일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등장하는 박후기의 <작약과 아버지>에서는 한 명의 성인 남자임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늘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리었던 그들의 은밀한 삶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손택수의 <조화>에서 어버이날에도 한 번/ 달아드린 적이 없는 듯// 평생 받지 못한 꽃을/한꺼번에 다 품으셨습니다.’(전문) 라고 했을 때 나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몇 번 없는 것 같다. 아니 한 번도 없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정호승이 <아버지의 수염>에서 수염을 면도해드리기 싫었던 날을 말할 때 그 조그만 귀찮음이 나중에 후회로 남는다는 평범한 사실에 가슴이 울린다. 자신이 아버지가 된 느낌을 내 안에서 뜬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는’(오인태, <아버지>)이라고 말하고, ‘국수를 좋아하셨다/ 지금껏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었다’(이제훈, <국수>)라는 했을 때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랐기에 이 시집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 몇 가지는 아주 낯설다. 물론 문학적으로 본다면 낯익다. 김완하가 새벽은 숫돌에서 푸르게 빛이 섰다/ 어둠 속에서 낫을 미시는 아버지 어깨가/ 두꺼운 어둠 벽을 무너뜨렸다/ 새벽 들길에 이슬 한 점 지고 오셨다’(새벽의 꿈)라고 말할 때가 대표적인 이미지다. 세대간의 갈등을 노래한 듯한 이진우의 <애비는 잡초다>는 읽으면서 많은 공감을 했다. ‘너희가 덜떨어졌다 늘 비웃는 우리가/ 네 애비고/ 내일의 너희다라고 했을 때는 뜨끔했다. 이창수의 <효자폰> 에피소드는 잠시 동안 웃게 만들었다. 이렇게 이 시집 속 아버지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나의 이해력이 더 높았다면 또 다른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기억의 한 자락을 끄집어내어 뒤돌아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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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자서전 -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지음, 양은모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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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밥 딜런이다. 처음에 그가 이 상을 수상했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왜 가수가 문학상을 받지 하고. 많은 호사가들은 그의 이름보다 다른 작가들을 먼저 말했다. 늘 예상한 것과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을 봤기에 그들이 되지 않아도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밥 딜런이라니... 솔직히 말해 한국에 살고, 포크 송에 대해 잘 모르는 나에게는 정말 의외였다. 비록 밥 딜런의 가사가 지닌 놀라운 의미와 힘을 들었다고 해도 영어에,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는 음악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의 수상을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이 생긴 것도 이해가 된다. 이런 나의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사라졌다.

 

다른 자서전처럼 쉽게, 빠르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자주 책을 펼치고 읽으면서 깨진다. 원제로 연대기를 붙였지만 실제 이야기의 진행은 시간 순과 그렇게 큰 연관성이 없다. 그가 태어나고 어떻게 자랐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성공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흔한 방식의 자서전이 아니다. 성공에 대한 화려한 포장도, 깊은 좌절에 대한 기록도 그 대상이 아니다. 끊임없이 다루고 있는 것은 포크에 대한 열정과 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음악가와 문학 등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 대중문화에 익숙하다고 해도 낯선 이름이 너무 많이 나와 읽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아마도 더딘 속도로 읽게 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것일 것이다.

 

밥 딜런하면 언제나 가사가 먼저 떠오른다. 사실 그의 앨범 몇 개를 들었지만 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가사의 경우는 제대로 번역한 것을 읽은 적이 없으니 알지 못한다. 이런 일들은 외국 음악을 들을 때면 늘 만나게 되는 문제다. 멜로디에 집중하게 되면서 가사는 놓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더 느낀다. 그가 어떤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 작사를 하는지 아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 한 곡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연주자들과 같이 노력하는 모습은 무한도전 같은 예능에서 보는 것 이상이다. 아니면 이런 부분들이 생략된 것일 수도 있다.

 

밥 딜런에 대해 잘 아는 독자에게는 이 자서전에서 생략된 부분들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잘 모르는 독자라면 어떨까? 그의 아내가 나오지만 누군지도 모르고, 갑자기 3명의 자식들이 나와 뭐지?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이렇게 보면 참 불친절한 자서전이다. 제대로 이해하려면 읽으면서 계속 검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책은 한 예술가의 수많은 고민과 노력과 열정을 잘 전해준다. ‘대중음악에서 가사의 수준을 올렸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가사를 갈고 닦고 다듬는 노력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중에 한 곡의 노래가 변한다. 그 과정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연주와 연주와 연주의 연속이다.

 

눈에 먼저 들어온 딜런의 말이 있다. “대부분의 다른 연주자들은 노래보다는 스스로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에게는 노래를 이해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차이가 그를 다른 일반 연주자들과 다르게 만들었다. 이것이 가사의 수준을 높였다.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음악가들의 이름들 속에서 아는 이름이 나오면 괜히 반가웠지만 대부분은 모른다. 그가 열심히 들었던 음악은 나도 듣고 싶다. 그처럼 음악을 분석하고 구조를 해석하는 일은 하지 않겠지만. 위대한 음악가로 불리는 밥 딜런의 삶을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곡을 만드는지는 조금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의 노랫말을 다시 조용히 음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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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라이프 - 마지막까지 후회 없는 삶,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위한 인생철학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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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끝까지 다 읽었다. 쉽게 읽힐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힘겹게 읽었다. 책을 편 첫 날은 좋았다. 몸 상태가 좋다보니 더딘 속도지만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았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뇌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이해는 되지 않고, 속도는 더욱 더디고, 졸음까지 밀려왔다. 처음에 기록했던 내용들이 이제는 귀찮아졌다. 멋진 문장을 발견하고 나의 이성을 깨워줄 것이라고 생각한 문장들을 그냥 지나갔다. 소설이라고 했는데 한 권의 철학책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읽었던 철학 소설과는 너무 다르다.

 

작가의 이전 작품인 <철학자와 늑대>의 평이 너무 좋아 선택했다. 하루에 백 쪽씩 읽는다면 3일이면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예상도 했다. 그렇게 두껍지 않으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읽는 동안 제대로 이해는 못하지만 나의 이성을 깨워주는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오만은 다음날 산산조각 났다. 미래의 시간을 배경으로 아버지의 기록과 그 기록에 대한 엄마의 주석을 자신이 편집해 내놓은 책이란 설정이다. 화자인 미시킨의 탄생과 죽음까지 다루는데 이것을 스무 개의 주제를 통해 풀어놓았다. 존재, 탄생, 낙태, 윤리, 신 등에서 사랑, 마약, 죽음, 안락사, 구원 등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주제다. 한두 개만 가지고도 충분히 한 권의 책을 가득 채울 수 있는데 이것을 한 사람의 탄생과 성장과 죽음이란 일생으로 엮었다.

 

보통의 철학 소설이라면 기본 이야기가 있고, 그 사이를 철학적인 부분이 채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반대의 느낌이다. 주제를 던져 놓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낸다. 처음 기대한 미시킨의 이야기는 주제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물론 미시킨의 삶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느 대학을 다녔고, 누구를 사랑했고, 자식을 키우고, 병에 걸려 죽기 전까지 보여준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 책 속 한 주제 분량도 채 되지 않는다. 뒤로 가면서 조금 적응하면서 미시킨의 삶이 더 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것도 각 단계의 주제를 다루기 위한 하나의 에피소드 같다. 아이들과의 경험을 적은 것을 제외하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20개의 주제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해답을 찾아간다. 미시킨이 종교를 믿지 않고 있지만 그의 삶에 종교가 강한 영향력을 드리우고 있다고 주석을 달았을 때 환경이 인간에 미치는 강력한 힘을 다시금 깨닫는다. 각 주제들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읽는 동안 머리는 오랜만에 풀가동했다. 잠시 집중력을 흩트리면 단어들이 사라진다. 뭔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 몇 번 읽어도 이해를 못하는 내용도 있다. 중요한 것 같지만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뒤로 갔는데 앞의 내용이 전부였던 것도 있다. 이렇게 이 책은 나에게 다양한 의미와 해석으로 다가왔다. 한 번에 다 읽기 보다는 천천히 사유하면서 읽어야 할 책이다.

 

많은 문장들이 머릿속에 와 닿았다. 그 중 처음으로 머릿속으로 들어온 것은 이성과 증오에 대한 글이다. “증오를 합리화하는 이성의 교묘함을 결코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종족, 종교와 정치적 신조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후에 이성으로 합리화한 증오다. 증오는 동물적 본성일지 모르지만, 증오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것은 이성의 작용이다. 이성은 증오에 초점과 방향을 제공한다. 이성은 증오에 효과를 더한다. 이성과 감정의 협력은 결코 우리 모두의 삶에 추악한 상처만을 남길 것이다.” 우리가 늘 외치는 이성적 판단, 이성적 행동 등의 이면에 이런 구조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현재의 한국 정치 현실과 너무나도 맞아 떨어지는 문장도 있었다. “광신도들은 감정선 자체가 매우 다르고 너무 독특해서 생물학적으로 변종이 된 것 같아 진정한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들에게 해줄 말은 없다. 그저 왜 그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되는지 눈앞에 흔들면서 보여줄 이유가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어차피 어떤 이유도 통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논리가 먹히지 않는다. 논쟁도 할 수 없고 협상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냥 못 하게 막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내가 골통보수와 왜 대화가 되지 않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도 이 문장을 보고 나에게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다. 자식에 대한 그의 논리 전개는 역시 이성보다 감성이 우선이다. 현실을 제대로 다룬다. 윤리와 정의 같은 문제도 많은 생각 거리를 제공한다. 안락사에 대한 부분은 더 많은 논의가 진행되어야 하고,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이미 외국에서는 안락사를 인정한 나라도 있다. 물론 안락사를 무분별하게 적용하지는 말아야 한다. 몇 가지는 이미 다른 책들에서 본 것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책은 처음이다. 어렵고 힘들게 읽은 책이지만 언젠가 나의 머릿속에서 사유의 꽃을 피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다시 이 저자의 책을 살지는 솔직히 주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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