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절 - 어떤 역사 로맨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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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에 한 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은 책으로 출간되지 못한 모든 원고와 문서를 기증받아 보관하는 도서관이다. 일반적인 도서 대출업무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24시간 늘 열려 있다. 한 밤중에도 누군가가 원고를 들고 와 벨을 누르면 나가서 받아주어야 한다. 도서관 직원은 그 책을 장서 원장에 적고, 저자에게 원하는 곳에 꽂아두라고 말한다. 이렇게 받은 원고가 쌓이면 지하 저장소로 옮긴다. 도서관이 받는 원고에는 제한이 없다. 나이도, 국적도, 장르도 따지지 않는다. 놀라운 장소다. 이 책이 나온 뒤 실제 브라우티건 도서관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재밌는 일이다.

 

사실 브라우티건의 소설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인 <미국의 송어낚시>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워낙 유명하다고 하니 읽었을 뿐이다. 다른 작품도 역시 쉽지 않았다. 나의 독서법과 맞지 않은 탓이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비교적 쉽게 읽혔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읽었고, 몇몇 문장에서 하루키의 문체가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기시감에 비롯한 착각일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라는 정보 때문에 생긴 착각 말이다. 그래서인지 역자가 풀어낸 상징과 이미지는 읽는 동안 전혀 몰랐다.

 

화자인 ‘나’는 이 도서관 사서다. 어느 날 도서관에 와서 사서로 눌러 앉았다. 그리고 한 번도 도서관을 떠난 적이 없다. 그의 세계는 도서관과 도서관을 찾아오는 사람으로 한정된다. 그의 연인인 바이다도 자신의 몸에 관한 시를 쓴 후 가져온 저자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두려워하고 저주한다. 아주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그녀를 보면 눈을 떼지 못하고, 여자들은 질투를 품는다. 외모에 관한 에피소드 대부분은 임신중절을 하기 위해 오고 가는 도중에 생긴다. 읽으면서 나도 그런 남자들 중 한 명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화자는 고립된 곳에서 평온한 삶을 유지한다. 이 삶에 변화를 불러온 것은 바이다의 임신이다. 둘이 상의한 끝에 내린 결론이 임신중절이다. 이를 위해 지하 저장소의 포스터가 멕시코 티후아나의 의사를 소개해준다. 이 소설의 중반 이후는 티후아나로 갔다가 돌아오는 여정의 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바이다를 둘러싼 에피소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것은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이며 비인간적인 행동과 모습은 그 병원에 온 환자와 가족의 모습과 대조된다. 제대로 된 의사에 비해 그곳에서 일하는 간호사는 비전문적으로 보인다. 어린 소년과 소년가 보조한다. 그렇지만 소독이나 위생적인 처리는 제대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이야기보다 문체와 사람들이다. 형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문체는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화자와 바이다와 포스터 등이다. 이들은 모두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산다. 나는 도서관에, 포스터는 지하 저장소에, 바이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이들에게 도서관이 없다면 세상으로 자신을 노출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하루 동안 도서관을 비운 것 때문에 나와 포스터는 직업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변화는 머무는 곳을 벗어나는 순간 일어난다. 자신이 의도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책을 다 읽은 지금 머릿속은 두 가지 이미지가 떠돈다. 하나는 당연히 도서관이고, 다른 하나는 바이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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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도 충분해
빌 시누누 지음, 유윤한 옮김 / 지식너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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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 표지에 ‘여행 중에 깨달은 내 인생의 소중한 것들’이란 글이 있다. 내가 관심을 둔 것은 앞에 나온 ‘여행’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내 인생의 소중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 저자의 업무 중 하나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문화 분쟁 조정가, 그는 전 세계를 누비며 각기 다른 문화를 연결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한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그가 문화의 충돌에서 생긴 것을 어떤 식으로 풀어내었는지 말이다. 역시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가 다닌 수많은 여행에서 배우고 깨달은 것들이 나의 이해와 경험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많은 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도식적이고 표면적이라 신선함이 떨어지기도 했다.

 

모두 아홉 장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풀어낸다. 공간도 시간도 하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이 여행하면서, 살면서 듣고 경험했던 일들을 주제별로 엮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기, 재생의 시간, 가족의 유대감, 건강, 사랑, 당신의 성, 슬픔, 삶의 안전지대, 나의 손님 등으로 구분한다. 이 이야기들은 그렇게 길지 않다. 길어도 몇 쪽 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두 쪽도 되지 않는다. 이 간결한 이야기가 가슴 한 곳에 파고드는 순간도 있지만 가끔은 겉돌기도 한다. 저자의 경험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느낄 때는 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 대한항공의 괌 착륙 사건을 다룬 부분에서 어색함을 많이 느꼈던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다.

 

저자의 직업이 항공사 직원이었다는 것과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다는 것이 이 책과 같은 결과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열린 마음과 친화력과 긍정적인 생각 등이 있어야 가능하다. 여행 중에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여러 사람이 앉는 자리 한 가운데 앉는다거나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한다는 등의 노력이 이어진다. 아니면 자신이 실수했을 때 상대방이 지적한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바로 그것을 고치는 모습은 쉬운 듯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이런 부분이 여행 속에서 그를 깨닫게 하고, 다양한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덕분에 나도 다양한 문화를 만나게 되었다.

 

저자는 미국인이다. 이 국적이 그로 하여금 다른 나라의 여유를 낯설게 받아들이게 한다. 프랑스의 의료보험을 보고 놀라는 것을 읽고는 얼마 전 한동안 인터넷에 떠돌았던 미국 맹장수술 비용이 떠올랐다. 알코올 중독에 대한 것도 문화적으로 접근해서 풀어낸 것을 보고 나의 학창시절과 비교해보았다. 너무 단순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절제에 대한 부분에 도달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스페인의 시에스타는 어떤 신문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한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작년에 스페인 여행을 한 직원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직도 그대로라고 한다. 졸리는 오후 잠깐 동안의 낮잠은 정말 업무의 효율을 높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영화를 만들지만 성은 억압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가 섹스 박물관을 방문한 후 느낀 감상은 엄숙주의 속에서 살던 한국인이 유럽에 가서 반드시 가보는 곳 중 한 곳이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가족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고민하는 사람들 이야기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장애물을 처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오는 단순과 소박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유행하고 있는 북유럽 스타일의 인테리어와 이어지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현재의 삶에 대한 만족이다. 매일 매순간을 즐기고, 나를 들여다보며 호흡을 고르고, 원하는 일을 하면서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휴일도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현재 나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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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 1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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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택할 때 몇 가지 기준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번역자다. 김석희 선생의 경우 대학 때부터 그가 번역한 소설이 나의 취향과 맞았다. 물론 몇 명의 번역가들은 처음의 신선함과 믿음을 깨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김석희란 이름은 아직까지 변함없다. 이렇게 번역자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역자가 쓴 글 일부를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는 것도 있었지만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책 번역을 둘러싼 소소한 이야기다. 처음 번역하려고 했을 때 먼저 번역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과 이때 요크셔 사투리를 전라도 사투리로 옮긴 것과 달리 자신은 표준어로 옮겼다는 말까지, 이런 이야기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책을 다 읽은 후 역자 후기에서 다시 위의 이야기를 읽고 반가웠다. 당시 수의사 이야기라 조금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때는 완전히 사라진 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미 번역된 적이 있는 다른 이야기들과 드라마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얻었다는 정보까지. 그리고 아마존을 검색하니 수백 개의 리뷰가 달린 그의 책들이 나온다. 솔직히 예상한 것보다 리뷰의 숫자가 적다. 그래서 다른 고전 작가를 찾아보니 더 적다. 최근 인기작들의 개수에 너무 현혹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이 리뷰 개수보다 이 작품은 훨씬 재미있다.

 

1930년대는 대공황의 시대다. 헤리엇도 수의학과를 5년 공부한 후 취직을 걱정한다. 다른 수의사 조수로 간 선배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현대판 노예와도 비슷할 정도다. 동물들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수의사 집의 다른 일도 같이 해야 한다. 늘 이런 불황기에는 남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사람들이 있다. 헤리엇도 파넌의 면접 소식을 들었을 때 이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 도착한 마을은 평화롭고 아름다웠지만 면접을 해야 할 파넌이 없다. 면접에 대한 정보도 가정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집안에서 기다린다. 이때 일어난 작은 이야기는 앞으로 펼쳐질 긴 이야기의 서막을 알리는 동시에 이 두 남자의 성격을 아주 잘 보여준다. 잘 잊는 파넌과 걱정이 많은 헤리엇으로.

 

이야기의 문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연다. 헤리엇이 거꾸로 선 송아지를 받기 위해 간 곳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곳에서 그가 경험한 것은 그가 학교에서 책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수의사의 삶을 쉽고 보람차게 그리고 묘사한 그 책들과 달리 지저분하고 힘들다. 그리고 옆에서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는 관람객까지 한 명 있다. 이제 졸업한지 겨우 7개월된 초보 수의사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일을 잘 처리한다. 이것은 파넌의 첫 인터뷰와 실습에서 벌어졌던 몇 가지 일과도 연결된다. 단순한 수의사의 일상을 다루었을 것이란 예상은 다양한 에피소드와 등장인물들로 인해 사라진다.

 

수의사를 주인공으로 다루다 보니 수많은 동물들이 나온다. 하지만 그 종류가 그렇게 많지 않다. 농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보니 농장에서 기르는 혹은 키우는 동물들에 한정된다. 실제 이 시절에 수의사의 일 대부분은 이런 종류였던 모양이다. 요즘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보는 동물병원과는 완전히 다르다. 다른 동물에 비해 개에 대한 에피소드가 적다. 개에 대한 이야기도 많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 부분만 다시 발췌해서 책 한 권으로 묶었다. 이 작가의 작품에 대한 관심도를 알려주는 대목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죽은 후 근무했던 병원은 현재 박물관이 되어 그의 독자들에게 관광명소가 되었다니 재미있다.

 

많은 동물들을 치료하면서 생긴 에피소드가 대부분이지만 그가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도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함께 사는 파넌의 동생이자 수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던 트리스탄은 굉장히 특이하다. 무엇이든지 잘 잊는 파넌 씨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이들이 직접 엮여 만드는 에피소드는 많지 않지만 병원이 모든 일의 연결점이 되다 보니 당혹스럽고 재밌는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파넌 형제가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솔직히 이성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읽으면서 웃음을 헛헛! 하고 터트리게 한다. 그리고 헤리엇을 한 눈에 사로잡은 여자 헬렌은 순진한 총각의 로맨스를 아주 잘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들의 풋풋하고 아련한 그리움은 또 다른 재미다.

 

한 편 한 편이 독립된 에피소드다. 연결되는 부분이 있지만 각각의 한 편이 완결성이 가진다. 이 책에 실린 36편은 연작소설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다. 첫 이야기를 다른 에피소드에서 또 다룬 경우가 없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앞에 일어난 일을 계속해서 다음 이야기에서 다루는 경우도 있다. 만약 이런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아마도 책 편집 과정에 사라진 에피소드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 중 일부는 시대와 맞지 않다고 한다. 책 속에도 몇 번 나왔듯이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하면서 쓴 글이기 때문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시골 수의사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또는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 이 책처럼 잘 보여주는 작품은 아직 보지 못했다. 편안하게 잘 읽혔고, 감동과 재미와 웃음 등의 다양한 감정을 맛보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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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 계속해도 될까요?
니시 카나코 지음, 전경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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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낯선 이름이지만 그녀가 쓴 소설 제목을 들으면 금방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가까이는 2015년 나오키상을 수상한 <사라바>가 있고, 조금 더 가면 <노란 코끼리>가 먼저 떠오른다. 이런 작품을 쓴 작가의 에세이였기 때문에 선택한 것도 있지만 “풋풋한 시절의 니시 가나코는 말리고 싶을 정도로 솔직하며, '웃기고 싶다'는 패기와 거침없는 자신감으로 문장과 문장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닌다.”라는 소개가 결정적이었다.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역시 앞에서 말한 소설들을 읽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뭐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그녀의 소설도 이런 종류의 웃음으로 가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되지만.

 

4개의 장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진행한다. 실제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어 낸 것인데 시간 순으로 편집된 것 같지는 않다. 읽다 보면 작가의 나이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에세이, 한자로 수필이라고 하는 이 장르를 작가는 정말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쓴 것 같다. 잡다한 신변잡기도 나오고, 맥주와 프로레슬링 사랑도 나오고, 자신의 어수룩한 삶의 에피소드도 적지 않게 다룬다.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쓴 문장도 자유분방하다. 문체도 자유롭다. 반복되는 단어를 이용해 나에게 웃음을 준 것도 적지 않다. 너무 자신의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주절거림이 집중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때는 나의 머리가 맑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기는 하다.

 

자신의 일상을 재밌게 쓴 글이다 보니 반복해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특히 친구 Y나 프로레슬러 이노키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술과 여행과 고양이는 아주 중요한 조연들이다. 술꾼의 기본자세를 제대로 보여주는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는 행동에 대한 멋진 핑계는 한때 내 주변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던 이야기다. 여행에 대해 쓴 글은 한 편으로 끝나지 않고, 두세 편으로 계속 이어지는데 아주 평범한 여행자의 모습만 가득하다. 작가 특유의 과장법과 재미난 표현이 없다면 뭐야! 하고 놀랄 정도랄까.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고, 도전하는 모습 또한 여행자의 일상이다.

 

일상을 가볍게 다루는데 표현은 과장되어 있다. 백화점 화장실 에피소드를 보면 극한에 몰린 인간의 심리 상태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프로레슬링을 보러 가려고 표 2장을 2만 엔에 구입했는데 다른 사람은 공짜표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을 때 그녀의 반응은 무한긍정으로 변하면서 프로레슬링에 강한 애정을 보여준다. 이 긍정은 말투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를 보면 또 사라지게 된다. 뽀뽀와 H한다는 표현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지적한 부분은 일본의 성에 대한 2중 잣대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자주 등장하는 ‘대박’이란 단어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설명할 때 그 많던 ‘대박’, ‘완전대박’이란 단어가 얼마나 진심이 담긴 표현인지 알 수 있다.

 

작가의 귀는 팔랑귀인 모양이다. 가전에 대한 친구의 소개를 너무 넙죽넙죽 받아들이며 전자제품을 살 때 이것이 잘 드러난다. 방문 판매하는 사람이 와서 물건을 팔면 잘 사줄 것 같다.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전과 가구 중 상당수는 돈이 없을 때 구하거나 산 싸구려다. 그렇다고 그 물건들에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귀가 얇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이야기가 많은 데 그중에서 서른 살 성인식 이론은 특히 그렇다. 아마도 나의 아동틱한 행동들 때문에 더 공감한 것인지 모르겠다. 만약 이 책에서 인생의 심오함을 찾는다면 글쎄 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이렇게 비틀고 과장하고, 때로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보고 싶다고 추천하고 싶다. 제목에 대한 답변으로 마지막을 대신한다. ‘앞으로도 계속 해주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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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넥스트 도어
알렉스 마우드 지음, 이한이 옮김 / 레드박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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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하고 잔혹한 소설이다.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이 연쇄살인마라는 설정이 그렇게 낯설지 않지만 작가는 아주 사실적인 묘사로 잔혹함과 긴장감을 높였다. 단순히 잔인한 묘사만 가득했다면 싸구려 호러물이 되었을 테지만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켜 공감대를 형성했다. 좋은 아파트가 아닌 곳에 살 수밖에 없는 그들의 내면을 충실하게 그려내면서 조금씩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여기에 탐욕적인 집주인이 등장하여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사람들의 현재를 압박한다. 그리고 사건은 언제나 그렇듯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터진다.

 

셰릴에게 사전청취를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셰릴은 가출소녀다. 그녀의 짧은 답변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3년 전 리사가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던 사건으로 넘어간다. 불법자금을 세탁하던 곳에서 우연히 본 폭력이 오랫동안 그녀를 달아나게 만든다. 물론 그곳에 훔친 돈이 그들의 추적을 더 끈질기게 만든다. 여러 나라를 떠돌며 토니 일당을 피해다니던 그녀가 런던으로 돌아온 것은 엄마 때문이다. 치매에 다른 병까지 걸린 엄마를 홀로 내벼려 둘 수 없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왔다. 당연히 머물 곳은 그 어떤 신고도 필요없는 은밀한 곳이다. 이렇게 그녀는 이 무시무시한 아파트의 입주자가 되었다.

 

리사, 가명으로 콜레트가 들어온 방의 주인은 니키였다. 하지만 그녀는 연쇄살인마에 의해 죽었고, 그의 연인 중 한 명이 되는 중이다. 방 주인이 며칠 방을 비우고, 월세도 내지 않자 집주인은 다른 세입자를 찾았다. 비싸지 않지만 깨끗한 집도 아니다. 이 방을 자주 들락거리는 소녀가 있었다. 셰릴이다. 그녀는 니키가 준 열쇠가 있어 쉽게 들어온다.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는다는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는 콜레트에게 그녀의 등장은 엄청 놀라운 일이다. 그들의 첫 만남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이후 오랫동안 지하에서 싸고 안정적인 월세로 생활하는 베스타와 이란 망명자인 호세인까지 한 명씩 천천히 등장한다. 이들 이외에 공무원인 토머스와 늘 음악을 털어놓는 음악 선생이 한 명 더해 모두 여섯 명이 살고 있다.

 

이 여섯 명은 서로 교류를 잘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교류가 많은 사람은 베스타와 호세인 정도다. 텔레비전이 없는 셰릴이 니키의 방에 자주 온 정도고 다른 사람들은 겨우 인사하는 정도다. 처음에는 이 세 명의 남자 중 누가 그 끔찍한 연쇄살인마일까 하고 추측했었다. 이 추측은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차분하게 읽으면 조금씩 드러난다. 그러다 하나의 사건이 펑 터진 후 그 이름을 바로 공개한다. 이때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랫동안 여자들을 죽인 후 미이라처럼 만들어 온 이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들려준 끔찍하고 잔혹한 이야기는 대단히 과학적이다. 건조하게 사실을 설명할 때 그 잔인함을 강해진다.

 

사실 이 소설은 누가 연쇄살인마인지 찾는 추리물이 아니다. 언제 이 살인마에게 같은 아파트 사람들이 죽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으로 채워놓은 소설도 아니다. 다만 이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와 삶의 지리멸렬함을 보여주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셰릴과 리사 두 명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핵심적인 주인공이다. 보호소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도둑질로 월세와 생활비를 만드는 셰릴이나 검은 돈을 훔친 후 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긴장을 느끼는 리사가 흐름을 주도한다. 그리고 이 둘의 좋지 못한 만남은 자신의 방에 도둑이 든 후 이웃들을 불러 모은 베스타에 의해 계속 이어진다. 이때부터 호세인을 포함한 이 네 명은 작은 유대감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소설을 읽다가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베스타의 긴 월세 계약이다. 가끔 유럽 소설을 읽을 때면 장기계약자들을 만난다. 부러운 현실이다. 하지만 이 장기계약이 그녀에게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삶의 반경을 제한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게 만든다. 이곳을 자주 찾고, 그녀를 돕는 호세인은 아직 망명자 신청이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잘생긴 외모는 늘 불안감을 느끼는 콜레트에게 잠시나마 훈풍이 불게 만든다. 일상에서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은 역시 콜레트다. 누군가 자신을 좇고 있다는 느낌과 그들 중 한 명을 본 것 같은 느낌은 연쇄살인마와는 다른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불안과 권태와 외로움이 겹쳐지는 이곳에 하나의 사건이 유대감을 강화시키고, 무시무시한 현실을 뛰어넘는 계기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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