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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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년 전 세계를 뒤흔든 사건이 하나 있었다. IS의 파리 테러 사건이다. 중동 지역에서 일어났던 테러가 유럽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전 세계는 파리에 애도했고, IS를 규탄했다. 뉴스를 잘 보지도 듣지도 않는 나에게도 이 사건은 충격이었다. 알 카에다의 9.11 테러 이후 가장 많이 전 세계의 시선을 끈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며칠 동안 언론은 파리 테러 사건으로 도배가 되었다. 파리를 추모하는 수많은 보도가 이어졌다. 그때는 아무 생각없이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왜 이런 테러가 일어났는가에 대한 분석은 뒤로 하고.

 

시리아 난민 문제를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이슬람 난민이 유럽 각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뉴스를 그렇게 심도 있게 방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발적인 테러가 며칠이나 뉴스를 도배하다시피 한 것과 대조적인 보도다. 이 보도에서도 각국의 반응과 대응은 나오지만 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심층 분석 보도는 없다. 그 지역의 정치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이 상황은 단순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예전에 베트남 난민처럼. 기억을 더듬어 보면 지난 역사에 수없이 많은 난민들이 안전한 나라를 찾아 자기 나라를 탈출했다.

 

현재 유럽의 가장 큰 문제 두 가지는 난민과 테러다. 테러의 경우 올해에도 벨기에 브뤼셀 공항에서 발생했다. 프랑스의 경우 단순하게 이슬람 이민자가 많아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브뤼셀은 그런 상황도 아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몇 가지 이유가 나오는데 크게 공감할 만한 것은 눈에 금방 들어오지 않는다. 그 대신 IS와 테러에 대한 즉각적인 규탄과 반격의 목소리가 나오고, 다른 한 편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거부 반응을 쏟아내고 있다. 대부분의 선량하고 무고한 이슬람 이민자들은 움츠리고 있고, 자신들의 무고함을 말해야 한다. 이 상황은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아주 바라는 상황이기도 하다.

 

지젝은 이 난민과 테러에 대해 언론의 일반적인 접근 방식을 거부한다. 언론이 IS와 이슬람의 문제로 축소하고 왜곡할 때, 혹은 인도주의 시선으로 볼 때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이 상황을 바라보는 좌파에 대한 질타도 잊지 않는다. 좌파의 금기를 깨자고 주장한다. 유럽 중심적 비판을 끝내야 하고, 고유의 생활방식의 수호가 그 자체로 파시즘적 징후나 인종차별적이라는 생각에 논의 자체를 회피하는 것과 이슬람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거부하는 태도와 정치 세력화한 종교를 광신과 동일시하지 말고 이슬람 교도를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광신도로 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중 몇 가지는 나에게도 해당되고, 대부분은 우파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프레임이다.

 

지젝은 ‘아프리카는 결코 자율적으로 사회를 바꾸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왜? 서구인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미국과 유럽과 중국 등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배후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IS와 학살과 난민 등은 이런 현실에서 발생한다. 살아남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파리 테러 이후 한 난민의 인터뷰는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파리 같은 도시가 이런 비상사태에 빠져 몇 년은 아닐지라도 몇 달 동안 일상생활의 평온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바로 우리가 도망친 곳입니다.” 난민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테러리스트의 희생자임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 난민 속에 테러리스트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왜곡하고 물타기 하는 정치세력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그 잘못과 모순을 알려야 한다.

 

난민 문제에 있어 “우리는 난민과 인도적 동정을 한데 묶는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난민을 도우려는 자세는 그들이 겪는 아픔에 대한 동정에 뿌리를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돕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 제발 일체의 감상일랑 떨쳐버리자.”라고 말한다. 동정과 아픔에 대한 감상은 일시적일 뿐이다. 테러에 대한 심판에서도 올바르게 심판하자고 말한다. 테러로 누가 이득을 보는가? 하고. 그리고 계급투쟁을 다시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인 연대를 강조하는 것뿐이다. 이런 전체적 시야 없이, 파리 테러 희생자들과의 비장한 연대감은 윤리의 가면을 쓴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 뒤에 이 세계적인 연대가 유토피아일 수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실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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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잡문
안도현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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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광고를 보기 전에는 시인 안도현이 시를 절필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최근에 몇 명의 작가가 절필한 것을 보았지만 그렇게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읽지 않은 책이 더 많은 나의 현실을 감안하면 아쉬울 수는 있어도 두려울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시간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면 그들의 작품이 나올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 안도현이 시를 절필하고 선택한 것은 트위터다. 140자 글자수 제한이 있는 SNS다. 이 책은 그가 3년 동안 트위터에 올린 것 중 244개를 선택해서 묶었다. 어떤 것은 한 줄이고, 어떤 것은 한계 글자수를 가득 채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래도 안도현은 시인이다.’란 감상이다. 224개의 트위터가 어떤 것은 한 편의 시로 다가왔고, 어떤 글은 그 당시의 아픔으로 가슴에 와 콕 박혔다. 한국 정치와 현실에 대한 아픔과 분노가 드러나는 순간도 자주 있었고, 세월호 사건의 큰 아픔도 같이 나왔다. 그리고 일상에 대한 단상들이 어떤 때는 가볍게, 어떤 순간은 유쾌하고 경쾌하게 표현되었다. 살짝 농을 치려는 그의 노력이 엿보여 잠깐 웃기도 했다. 많지 않은 분량이다 보니 짬짬이 읽어도 금방 다 읽게 된다. 다 읽은 후 살짝 살짝 책을 넘기면 반가운 글들이 나온다. 가끔 펼쳐보기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를 절필했다고 하지만 나에게 이 트위터 속 글들의 일부는 시로 다가온다. 어떤 글은 왠지 모르게 하이쿠처럼 다가왔다. 형식을 따지면 아닐 수 있지만. 시인으로 산 세월 때문인지 많은 글들이 정제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그의 대히트작인 <연어>와 오래 전에 읽은 시집 한 권 등이다. 얼마 전에는 같은 시인이었던 도종환이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그가 대선으로 절필선언을 한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누가 낫다고 해서 쓰는 글이 아니다. 현실에서 두 시인의 삶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사실 그들의 시집을 최근에 새롭게 읽기 전에는 그들이 이렇게 사회에 많은 참여를 하는 시인이었는지 전혀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관심이 없었다.

 

1만개의 글 중에 선택한 개수가 겨우 244개다. 많이 적다. 한 장에 하나의 트위터만 적었다. 종이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은 이 글을 잡문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과연 잡문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 짧은 글 속에서 시대와 호흡하는 시인의 일상과 철학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글은 감탄하고, 어떤 글은 의미를 곱씹는다. 어떤 글은 그냥 슬쩍 훑어보고 지나갔다. 나의 마음이 복잡할 때 더욱 그렇다. 아마 책이 아닌 트위터 상의 활자로 봤다면 지금과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스마트폰의 글들은 너무 휘발성이 강하다. 현재까지는 그렇다. 읽으면서 멋진 글이란 생각에 어딘가에 표시를 해 둔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다. 다음에 그냥 술렁술렁 넘기다 보면 발견하지 않을까. 무겁고 지친 마음에 잠시나마 휴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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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온 스노우 Oslo 1970 Series 1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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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두툼한 요 뇌스뵈의 책만 읽었던 나에게 이 책의 분량은 아주 큰 불만이었다. 200쪽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단숨에 빠르게 읽었다. 크게 머리를 쓸 것도 없었다. 빠르게 진행되고, 잔혹한 장면이 나와 쉴 틈도 주지 않았다. 옛날 킬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구성도 직선적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현실과 환상을 살짝 뒤섞은 장면이 나와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크게 고민할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에서 50년대까지 미국에서 유행했던 펄프픽션을 재현했다는 해설을 읽었을 때 내가 느낀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옮긴이의 말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들어 있다. 오슬로 1970년 시대의 첫 구성이 어떠했는지부터 지금 나오는 작품의 연관성까지. 그가 1970년대에 끌렸다는 사실은 인터뷰에 나온다. 그런데 이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기존과 다르다. 속도감과 통쾌함만 놓고 보면 이 작품에 더 주고 싶다. 실제로 이 작품은 미국에서 일본 도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다 썼다고 한다. 대략 12시간 만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한 것이다. 그가 글을 손으로 쓰는지, 타자를 치는지 모르지만 머릿속에서는 비즈니스석에 앉은 그가 쉼없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인물은 킬러 올라브다. 그가 참지 못하는 일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여자를 때리는 것이다. 처음 이야기는 농아에 절름발이인 마리아에 대한 사연이다. 멍청한 약쟁이를 남자 친구로 두고 있고, 이 남친은 마약 중독으로 꽤 많은 돈을 빚지고 있다. 마리아가 매춘부가 된 것도 이 남자 친구 때문이다. 올라브가 이 둘 사이에 개입하는 것은 마리아가 예쁘고 안쓰러웠기 때문이 아니다. 남자 친구가 그녀에게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남자 친구를 협박하고, 그를 대신해서 빚을 갚는다. 그리고 농아인 그녀의 뒤를 몰래 따라 다닌다. 사랑일까?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그에게 살인 의뢰 하나가 들어온다.

 

1970년 오슬로는 마약이 일상생활 속에 침투하던 시기다. 이때 성장하는 마약 시장을 두고 두 사람이 싸우고 있다. 한 명은 자주 올라브에게 일을 주던 호프만이고, 다른 한 명은 호프만의 적수인 일명 ‘뱃사람’이다. 호프만이 그를 불러 의뢰한 일은 자기 아내 코리나를 죽여 달라는 것이다. 청부업자가 끼지 않으면 자신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 선택은 곧 최악의 선택이 된다. 그것은 호프만의 아내인 코리나가 한 남자에게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의 잠복 끝에 발견한 사실이다. 그리고 코리나를 구타한 남자를 뒤좆아 총으로 쏜다. 청부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이것을 호프만에게 보고하는데 이상한 대답이 온다. 죽은 사람이 호프만의 아들인 것이다.

 

호프만의 총구를 피해 달아나야 한다. 그런데 돈이 없다. 코리나까지 데리고 나왔다. 살기 위해 호포만을 죽이려고 한다. 혼자서 할 수 없다. 적의 적은 동지다. 호프만의 마약 적수인 뱃사람을 찾아간다. 협조를 구한다. 뜻이 맞다. 호프만을 죽일 계획을 실질적으로 짜는 인물은 올라브고, 뱃사람은 사람과 자금을 지원한다. 이런 준비 과정 속에 코리나와 올라브 사이에 감정이 생기고, 올라브의 몇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 중 하나는 끔찍한 것이다. 올라브는 난독증이 있다고 말하면서 한 권의 책을 읽으면 두 가지 이야기를 읽는 것 같다고 말한다.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이 말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마지막 장면도 역시.

 

난독증이 있지만 늘 책을 읽는 킬러와 아름다운 여인의 결합은 왠지 잘 맞지 않다. 자신이 죽여야 하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도 약간은 진부하다. 하지만 이런 설정들이 빠른 진행과 예상하고 있던 몇 가지 가정과 맞아 떨어지면서 재밌는 장면들을 만든다. 영화로 만들기 좋은 소설이다. 실제로도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1970년대 오슬로의 눈과 그 위에 쏟아진 피를 생각하면서 잠시 허무하고 황량한 분위기에 잠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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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어 사랑하라
오음 지음 / 답(도서출판)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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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음. 낯선 이름이다. 여행산문집이라고 표지에 써 있다. 아주 감상적이다. 여행산문집에서 흔히 기대하게 되는 여행지의 정보는 전혀 없다. 어디인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글도 없다. 당연히 어떻게 가는 지, 그 곳의 풍경이 어떤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그의 여행과 그곳에서 만난 누군가와 자신의 헤어진 연인과 삶이 적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단숨에, 쉽게 읽을 수 없다. 사진이 없었다면 몇 배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떠난 시간이, 여행한 나라가, 머문 시간이 많고, 만난 사람이 늘수록 이런 일은 당연하다. 그의 글은 불친절하다. 그가 그리워하는 사람이 누군지 분명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장소마다 헷갈리는 순간이 참 많다. 내가 너무 대충 읽은 탓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정제된 문장은 수없이 고쳐 쓴 듯하다가도 무슨 말인지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순간이 생긴다. 나의 이해력 부족일까? 아니면 그의 감성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일까?

 

파편적으로 나오는 지명과 사진을 보면 그가 여행한 나라가 결코 적지 않다. 이 정보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의 에피소드만 늘어놓아도 몇 권의 여행산문집이 나올 것 같은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10년 동안의 여행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아마도 지금 그의 가슴속엔 사랑이 더 크게 꿈틀거리고 있는 모양이다. 제목도 ‘멈.추.고. 사랑하라’가 아닌가. 아마도 내가 20대에 읽었다면 그의 감성에 푹 젖을지 모른다. 그때 나도 그처럼 사랑의 아픔 속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누구나 겪는 아픔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특별하고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는지. 하지만 이것은 지나왔기에 가능하다. 경험했기에 상대적으로 쉽게 말한다. 지금도 그 당시를 회상하면 아련한 감정의 편린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책 곳곳에서 보게 되는 사진은 예쁘고 아름답고 입가에 미소를 절로 짓게 한다. 물론 어떤 사진은 아픔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이 사진들이 사랑의 감성에 빠졌던 나를 여행의 환상으로 이끈다. 떠나고 싶다는 여행의 욕망을 부채질한다. 그리고 장기 여행자만이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올 때 부러움을 느낀다. 나의 작은 소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소망을 채우기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 부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먹으면서 이른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

 

글은 차분하게 읽어야 한다. 가볍게 쓴 글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문장을 보여주기 식으로 모양을 만들어 쓴 글이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쓴 부분도 적잖이 있다. 하지만 역시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에피소드들이다. 계산오류로 인한 누군가의 실직과 이야기를 얻었다고 좋아하는 작가의 모습이 엘러베이트 거울에서 드러날 때 그가 느낀 감정은 나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속내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뜨끔했다. 내 인생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몇 번인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조금은 밝은 글과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책을 썼으면 좋겠다. 그의 여행 경력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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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할머니와 함께 요리를 - 토스카나에서 시칠리아까지, 슬로푸드 레시피와 인생 이야기
제시카 서루 지음, 정지호 옮김 / 푸른숲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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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브라운 대학의 연구기금을 지원받아 1년 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배운 요리법을 적은 책이다. 단순히 요리법 책이라고 하기에는 저자가 만난 12명의 이탈리아 할머니들과의 교감이 너무 깊다. 책의 구성도 한 할머니를 만나고, 그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과 요리와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풀어놓는다. 그 다음에 그 할머니가 요리한 음식에 대한 요리법을 간략한 설명과 더불어 적어놓는다. 솔직히 말해 요리법의 경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용어와 단어가 수없이 나와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요즘 유이하게 즐겨보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쿡방이다 보니 몇 가지 들은 것이 있다. 아쉬운 것은 그 요리를 직접 먹어보지도 눈으로 보지도 못해 그 맛이나 모양을 충분히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각 요리법마다 사진이 없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이기는 하다.

 

저자가 할머니를 찾아가는 방식에도 정해진 규칙이 없다. 처음 찾아간 할머니는 어릴 때 자기집 가사도우미의 어머니다. 인맥을 이용해 첫 만남을 가졌고, 이 다음도 소개를 통해 이어진다. 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끝나면 요리법이 나오고, 다시 다른 할머니와의 이야기와 그 할머니의 요리법이 나온다. 단순한 구성인데 앞에 나온 간단한 에세이가 그 요리법에 강한 이미지를 덧씌운다. 그리고 각 할머니의 이야기가 시작하는 장, 첫 쪽에 간단한 격언 같은 것이 실려 있다. 이 말은 할머니들의 인생 신조 같은 것이다. 무심코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 잠시 숨을 고르며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기 이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이탈리아 요리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요리가 전부였다. 파스타, 피자, 젤라또 등이다. 쿡방에서 샘 킴이 자연주의 이탈리아 요리를 할 때도 그렇게 많은 종류의 음식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유명한 프랑스 요리의 기초를 만들어 준 곳이 이탈리아였음을 감안하면 나의 이 무지와 무식은 참으로 부끄럽다. 그리고 하나의 요리를 만들기 위해 그들이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보면 더욱 더 부끄러워진다.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 숨겨진 공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몇 가지 요리는 우리의 나물 요리와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어떤 요리는 삼계탕이 떠오르기도 했다. 먹는 것만 좋아하는 내가 잠깐이나마 요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의 매력이 있다.

 

지금도 편협한 입맛이지만 예전에는 더욱 심했다. 처음 외국에 나갔을 때 토속적인 입맛은 새로운 도전을 많이 꺼렸다. 익숙하거나 비슷한 음식은 먹었지만 조금만 더 토속적인 음식이 나오면 당장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런 일들은 조금씩 더 외국에 나가고, 한국에서도 다른 나라 음식을 찾아 먹으로 다니면서 점점 사라졌다. 어떤 때는 너무 도전적이다. 물론 금방 꼬리를 내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런데 이 요리책을 보면서 거의 접해보지 못한 토끼 고기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마 파스타를 비롯한 많은 이탈리아 요리가 대중적으로 퍼진 것이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저자는 슬로우푸드를 추구한다. 이탈리아 할머니들의 요리법은 이것과 잘 맞아 떨어진다. 아직도 예전의 방법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철 과일과 채소를 이용한 음식은 읽으면서 가장 많이 입맛을 다시게 만들었다. 달콤한 디저트는 새벽에 이 책을 읽을 때 허기를 더 많이 느꼈다. 진한 에스프레소와 함께 하는 아침 식사 이야기는 머릿속에 커피향을 채워주었고, 입안 가득 침이 고이게 했다. 하지만 요리법을 읽으면서 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 순간이 오면 멍해지고 생각이 잠시 멈추게 된다. 그리고 이성이 움직인다. 지저분해지는 부엌과 낯선 용어와 요리 도구 등이 부정적인 생각을 불어넣는다. 그렇지만 그 맛난 음식들을 먹고 싶다는 욕망은 커진다. 이탈리아 요리를 만들고 싶은 사람에게 좋은 요리책이 될 것이고, 이탈리아 요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요리가 있는지 잘 알려주는 에세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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