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teen_포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3
이시다 이라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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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가의 이름을 보지 않고 읽었다면, 이시다 이라의 작품이란 걸 몰랐을 것이다. 중학생이 주인공인 학원물과 이시다 이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시다 이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슬로 굿바이>, <1파운드의 슬픔>같은 연애소설이다.

이시다 이라는 정말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다. 연기변신을 시도하는 배우처럼 작가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걸까? 긍정적인 면도 반대도 있겠지만, 요즘은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다. 다양한 느낌의 작품을 접할 수 있지만, 작품이 조금 얇아 보인다.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하다, 경제를 이야기하고, 청소년의 우정을 이야기한다…'작가만의 느낌'이란걸 찾기가 어렵다. 

네 명의 14살 소년(다이, 데츠로, 준, 나오토)의 좌충우돌 이야기가 이어진다. 각 장은 이어지지 않고, 옴니버스 형식으로 독립되어 있다. 그래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초반부는 상당히 지루했으나, 장이 넘어갈수록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학원물 특유의 신선함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바로 이점이 <포틴>을 예쁘게 볼 수 없는 근본 이유다. 왜일까?

'과장된 설정'이 답이다. 베르너 증후군(조로증)에 걸린 나오토, 폭력 아버지를 죽게한 다이, 동성연애자 친구 등등. 인물부터 사건까지 모든 게 과장되어 있다. 원조교제 소녀, 죽음이 임박한 환자 등 작품소재 또한 진부하다. 작가는 14살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하고, 어른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한마디로, 작가가 학원물에 익숙하지 않다는 게 곳곳에서 드러난다.

<포틴>은 어색함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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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13-07-06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으니, 과하게 비판한 듯 하네요ㅋ 나름 괜찮은 작품인데.
다시 리뷰할 예정
 
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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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사랑받는 작가는 분명 이유가 있다. <마더나이트>를 읽으며 왜 커트 보네거트에 열광하는지 알게 되었다. 심각한 상황에서 독자를 웃게 하는 작가, 어깨에 힘주지 않고 메시지를 전하는 작가, 그가 바로 커트 보네거트다. 이제껏 그를 몰랐던 건 슬프지만, 더 늦기 전에 알게 된 건 다행이다.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마더나이트>의 구성은 독특하다. 먼저 '하워드W. 캠벨2세의 고백록' 미국판을 편집한 편집자의 말로 시작하고, 이어 '하워드W. 캠벨2세의 고백록'이 이어진다. 이런 구성이 어떤 의도인지 생각해 보았다. 이는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직접적으론 편집자가 언급한 독일어 자작시 부분, 명예훼손과 외설을 우려해 중요한 삭제가 이루어졌다는 두 곳을, 본문에서 읽으며 혼자 좋아했다는 정도만 말해 두겠다. 

'하워드W. 캠벨2세의 고백록'의 화자는 표면적으론 나치의 라디오 선전원이었지만, 사실은 미국의 첩보원이었던 하워드W. 캠벨2세다. 아버지를 따라 독일로 온 하워드는 마치 장난처럼 위르타넨 소령에게 미국 첩보원으로 포섭된다. 운명이었을까? 하워드는 나치의 라디오 선전을 담당하며 첩보원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아무도 그가 스파이인 것을 몰랐으니까. 위르타넨 소령을 포함한 몇 명(총 3명)을 제외하곤. 전쟁이 끝나고 전범이 된 그는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을 감쪽같이 속였다. 나는 히틀러의 오른팔처럼 우쭐거리며 돌아다녔고, 어느 누구도 마음속에 깊이 감춰둔 진실한 나의 모습을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미국 첩보원이었다는 사실을 과연 증명할 수 있을까?"(p.68)라고.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세상 모두를 속인 나치 라디오 선전원, 아니 미국 첩보원의 드라마틱한 인생사다. 

특별히 이야기 하고 싶은 건 두가지다. 등장인물의 희화화와 과장, 작품에 숨겨져 있는 희곡코드.

1) 등장인물의 희화화

세상 모두에게 비난받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하워드지만, '정상적인' 인물은 그밖에 없다. 그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과장되어 있고 비정상이다. 몇몇 부분을 보자. '오거스트 크랩타우어'의 사망장면.(p.124) 헬가의 짐을 옮기려고 계단으로 올라온 그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충성했던 하워드 캠벨 씨 같은 사람의 아내를 위해 죽는다면, 나에겐 영광이오."란 말을 남기고 푹 쓰러져 죽어버린다. 함께 있던 닥터 엡스타인은 부검하는 척 거칠게 다뤄놓고는 "나는 치과의사요"(p.125)라고 한마디 던진다.

아이히만과 하워드의 대화.(p.218) 하워드는 빈정거림을 시도한다. "당신은 일개 군인이었죠?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군인처럼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명령을 따르기만 한 거죠?" 그러자 아이히만의 반응은 대단하다. 희화화의 극치라고나 할까. 그는 하워드에게 자신의 진술서를 본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변론을 알고 있는가?"

그 외 몇 걸음마다 숨을 돌리고 스물까지 세면서 계단을 오르는 킬리 신부, "조금 있으면 모두 죽게 될 테니까 말하는 건데, 난 형부를 사랑해요."(p.146)라는 어린처제 레지 노트, 순수한 악을 처단한다며 까불다가 다치는 버나드B.오헤어 등등. 하여간 모든 인물이 코믹하고, 사회 일반의 건전한 도의감과는 약간 엊나가 있다. 저자는 이들과 하워드를 대조하며, 하워드가 처한 역설적 상황을 강조한다.  

2) 작품에 숨겨진 희곡 요소

- '하워드W. 캠벨2세의 고백록'내의 각 장은 10페이지 남짓이다. 굉장이 짧은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특히 1장부터 4장은 하워드를 감시하는 간수가 각각 등장하고 곧 사라진다. 아르놀트 마르크스, 안도스 구드만, 아르파트 코바치, 베르나르트 멩겔. 이건 마치 배경이 바뀌거나 등장인물의 퇴장등으로 구별되는 '희곡의 장(Scene)'을 연상시킨다. 또한 간수와 하워드의 대화가 주요내용이란 점도 희곡의 대립적 구조와 대칭된다. (1장부터 4장은 든 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작품 전체적으로 이런 특징은 계속된다.)

- 희곡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개성있는 인물이다. 1)에서 이야기한 희화화된 등장인물은 이에 부합한다. 특히, p.282,283 레지와 하워드가 주고 받는 대화는 마치 희곡을 보는 듯하다. 처음 아무 생각없이 읽다, '이건 완전히 희곡인데'라며 놀랐었다. 무대에서 공연하는 듯한 둘의 대화. 엄청난 개성의 소유자 레지. 작가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이건 완벽한 증거이다.

- 나중에 이야기 하겠다던 작품 앞 '편집자의 말'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희곡 앞부분엔 '막이 오르기 전후에 필요한 무대 장치, 인물, 배경 등을 설명하는 글'인 '해설'이 있다. '하워드W. 캠벨2세의 고백록' 미국판 '편집자의 말'을 희곡의 '해설'과 병치시켜 보자. 어떤가? 한마디로, '편집자의 말'은 작품의 희곡적 요소이다. 희곡의 해설처럼 <마더나이트>를 해설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이제 작품 외적인 요소를 보자. 주목한 것은 한 페이지를 깨끗하게 비워둔 작품 편집이다. '하워드W. 캠벨2세의 고백록'내 한 장(Scene)이 다른 장(Scene)으로 넘어갈 때, 한 페이지는 아무것도 없다. 원작도 그런지, 문학동네 편집자가 임의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후자라면 잘못된 추론이겠지만, 전자라면 '희곡의 장(Scene)'을 강조하려는 의도도 고려해야 한다. 정말 궁금하다. 원작도 그런지, 문학동네 편집자가 임의로 편집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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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9-03-15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원작도 그럴겁니다. 전형적인 천재형 작가인 괴짜 커트라면 그런 발칙한 발상을 하고도 남을 겁니다. 저도 이거 조만간 읽어볼려고 했는데 벌써 접수하셨군요~~~^^

쥬베이 2009-03-15 22:34   좋아요 0 | URL
아 lazydevil님도 노리고(^^) 계셨군요ㅋㅋㅋ
이 작품 진짜 강추입니다!!
커트 보네거트, 제 베스트 작가가 될거 같아요^^

2009-06-28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화염 조선 - 전통 비밀병기의 과학적 재발견
박재광 지음 / 글항아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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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임진왜란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다. 요즘엔 '한국사 전'이나 '역사추적'같이 흥미진진한 역사 다큐가 많지만, 당시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인상 깊었다. 나레이션을 맡으신 고원정 작가님이 재연화면 중간중간 등장하시는 것도 나름 파격적인 구성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며 특히 놀란 게 있다. 바로 조선의 무기. 활과 창뿐이라고 생각했던 조선에는 천자총통, 지자총통같은 대포도 있었고, 비격진천뢰라는 신무기도 있었다. (비격진천뢰가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칭을 기억하고 있었음^^ 이름만.)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발명자는 누구이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제원, 발전모습 등은 관심을 두지 못했다. 너무 어렸으며(초등학생^^), 차마 조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을, 이 책으로 속시원하게 한풀이했다.

<화염조선>은 '우리의 전통무기를 살펴보고, 이들에 담긴 선현들의 지혜를 되세겨 보고자 하는 책'(p.5참조)이다. 한민족의 장기이자 전통무기인 활부터 비거, 삼안총, 불랑기 같은 생소한 무기까지, 우리의 전통무기는 이 책을 통해 생생하게 다가온다. 저자는 사진자료뿐만 아니라, 그림, 도표까지 활용해 입체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화약병기의 경우, '부리, 격목, 약통'등 생소한 용어가 많아 이해하기가 싶지 않다. 그런데 저자는 p.22에서 각 총통의 구조를 그림으로 설명한다. 마치 설계도를 보는 듯한. 그림을 보니 생소한 용어도 싶게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그림자료가 빛을 발하는 부분은, 거북선의 구조를 설명한 p.239이하^^)

처음부터 p.88까지는 조선의 주력 무기인 화약병기의 발전사이다. 주목해야 할 인물은 최무선. 최무선은 화약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하고, 중국의 원명 교체기를 틈타 화약제조법을 배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화약병기를 실전에 배치해 왜구소탕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권근이 왜구를 격파한 최무선을 축하하며 쓴 시를 보자. '님의 재략이 때맞춰 내어나니/30년 왜란이 하루 안에 평정되도다/ (중략) /주유가 갈대숲에 불 놓은 것이야 우스갯거리일 뿐이고/한신이 배다리 만들어 건넜다는 이야기야 자랑거리나 될까보냐. (후략)'(p.27) 최무선의 공이 얼마나 컸으면 저리 격찬했을까. 아무튼, 훗날 조선의 자랑이 된 화약병기는 바로 최무선의 노고가 씨앗이 된 것이다.

p.89부터는 색다른 무기가 속속 소개된다.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건, 15년간 이름만 알고 있던 꿈의 무기 '비격진천뢰'(p.122이하). 비격진천뢰는 간단히 말해 조선시대 수류탄 유사한 무기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비격진천뢰란 발사하면 날아가서 폭발과 동시에 천둥 번개와 같은 굉음과 섬광, 수많은 파편을 쏟아내는 무기로 일종의 작열탄이다.'(p.123참조)라고. p.129에선 비격진천뢰로 왜적을 격파한 기사가, p.139이하에선 사용법이 소개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가장 무서워 했다는데, 일본 측 기록을 보자.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구경하고 있는데, 이것이 갑자기 폭발해 그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 같이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p.133)

거북선과 조선의 주력 전함 판옥선은 p.220부터 50페이지가량 서술된다. 이 부분에서 특히 주목한 것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조선수군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압도한 이유. 다른 하나는 거북선의 구조논쟁, 즉 2층설과 3층설의 대립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왜군을 완벽히 제압한 건 누구나 알지만, 이유를 물으면 대답이 궁색해진다. 아마 '이순신 장군의 대단한 지휘력, 거북선의 존재'라고 답하지 않을까. 저자는 좀 더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저자가 드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주력전함 판옥선의 구조적 우수성. 둘째, 대형 화포의 효율적 활용.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했기에 파도를 헤쳐가는 능력은 떨어졌지만, 안정성이 좋았고 좌우선회력이 뛰어났다. 이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섬과 암초가 많은 우리나라 바다에 적합한 구조였다.'(p.269참조) 또한 목재의 질도 상대적으로 우수했으며, 판옥선은 높았고 거북선은 판자를 덮었기에 왜군의 전술운용이 어렸다고 지적한다. 대형화포의 경우 운용시 가장 어려운 것은 이동성이다. 그런데 이를 배에 장착하면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거북선 구조논쟁은 자세히 소개하지 않겠다. p.252이하 참조하시길.)

조선의 무기하면 으레 활과 창을 떠올렸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조선은 무기 개량과 신무기 개발에 끊임없이 노력한 과학선진국이요, 군사강국이었다. 때론 무기체계를 과신하고 신기술 도입이 늦어진 적도 있었지만, 조선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이런 위대한 문화유산이 널리 알려지지 않고, 국사교과서에조차 제대로 소개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화염조선>은 우리가 이제껏 알지 못했던 조선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오래동안 조선의 전술, 무기를 연구한 저자의 노고가 없었다면, 전통무기에 담긴 선조들의 애국정신,지혜를 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의 노고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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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흐트와 아들
빌렘 얀 오텐 지음, 유동익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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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품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모호하다. 근본원인은 두 가지. 주제의식을 파악하기가 어려운데다, 등장인물의 정보 내지 사건의 단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캔버스에 의해 '창조자'라 불리는 화가 '펠릭스 빈센트', 그의 아내 '리데베이 랑어베인', 빈센트의 친구인 여기자 '민커 뒤파위스', 유명한 개인 미술 소장가 '스페흐트', 이 4명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정보나 생각, 감정 등은 아주 흐릿하다. 이유는 화자가 사람이 아닌 사물 '캔버스'이기 때문이다. 즉, 등장인물이 '판 스헌덜 화방'에 있던 캔버스에 의해 관찰되기에, 독자는 극히 제한된 부분만을 볼 수 있다.

스페흐트의 아들 '싱어'나 갑자기 이야기되는 '테인'(p.103이하)의 경우, 이런 제한성은 확대된다. 이들은 실제 등장하지 않고, 4명의 핵심등장인물 간 대화를 통해 소개된다. 독자는 '캔버스의 관찰(1차)'과 '등장인물 간 대화(2차)'라는 이중의 간접성을 거쳐 그들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특히, 빈센트의 학교친구였다는 '테인'은 거의 투명하다. (p.106에서 약간의 정보가 제시되기는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호함은 작품의 단점인가? 아니다. 작가는 주제의식을 심화하는 장치로 모호함을 의도적으로 조장한다. 모호함은 스페흐트를 중심으로 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심화시키며, 또한 중후반 캔버스-테인-싱어-스타인(빈센트와 리데베이의 갓난아기)-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모호함은 <스페흐트와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 전제로, 미묘한 매력의 원천인 것이다.

좀 자세히 보자. 왜 모호함이 캔버스-테인-싱어-스타인-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인가? 이야기 흐름을 미세하게 관찰해보면, 화자인 캔버스의 성격(과연 이 표현이 적절한지는 몰라도)이 변화하는 걸 느낄 수 있다. 관찰능력을 가진 화자가 '성장했다'는 차원이 아니다. 후반부 화자는 사물이 감당할 수 없는 삶과 죽음, 인생의 성찰까지 이야기하는 단계에 이른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해리성 정체장애(다중인격) 측면에서 해석해 보았다. 빈센트에 의해 그려진 테인, 싱어는 캔버스에서 부활하고, 캔버스는 이들 모두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나는 테인이었다. 나는 그의 아이였다. 나는 리데베이였고, 민커였다. 나는 그의 앞에 서 있는데도 그가 보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우리가 얼마나 작고, 얼마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보호받지 못했고, 우리가 얼마나 가치 없는지를 봤어야만 했다.'(p.205)

주제의식도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캔버스가 빈센트를 '창조자'라고 부르는 점, 캔버스의 중후반 성격변화, p.133.134 서술 등을 종합하면, (1) '창조와 인간 존재의 근원이란 종교적 주제'가 도출된다. 또한 빈센트의 그림완성 즈음 출산하는 리데베이, 죽어가는 태아의 절규를 연상시키는 p.182,183 서술을 종합하면, (2) 만연한 '낙태에 대한 경고'란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p.182,183의 화자가 태아라고 가정하고 읽어보라. 소름이 끼칠 정도다.) 또한, 스페흐트와 민커의 상반된 주장에 집중한다면 (3) 일반적인 미스터리 작품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차마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작품 곳곳에 열린 해석이 가능한 단초가 널려 있다. 한마디로 <스페흐트와 아들>은 '완전성'보다는 '개방성'을 특징하는 작품.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고민하게 하는 책처럼 좋은 책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네델란드 최고 권위의 리브리브문학상 수상작인 <스페흐트와 아들>은 좋은 책이다. 작품이 품은 모호함과 개방성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들 것이다. 행복한 고민을^^ 빌렘 얀 오텐은 새하얀 캔버스를 준비했다. 그 위에 무엇을 그릴지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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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9-03-09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작품, 몹시 야심찬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작품이네요. 쥬베이님의 서평을 보니 작가가 멋지게 소화했나봅니다./ 참... 그간 어디 다녀오셨어요? 한동안 살림살이까 몽땅 사라져서 이사 가신 줄 알았습니다!!!

쥬베이 2009-03-14 18:0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그간 시험준비하느라고 거의 못왔어요
복귀했더니, 알라딘이 협조를 안해줘서 싸우고 다른데로 옮길라 했습니다ㅋㅋ
잊지 않고 찾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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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는 얼핏 연애소설 같지만, 연애소설은 아니다. 도리어 추리, 미스터리에 가깝다. 특히 현재에서 과거로 차근차근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은, 이런 느낌을 배가한다. 재미있게도 사쿠라바 가즈키는 영화 [박하사탕]에서 이런 구성을 착안했다고 한다. (앞날개 참조)

1장은 결혼준비로 분주한 '하나'와 '오자키'의 모습, 하나의 양아버지 '준고'와 하나의 미묘한 관계가 핵심이다. 준고에 대한 하나의 미묘한 감정은 주목할 만하다. (결국, 이 작품의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는 준고와 함께한 어린 시절을 이렇게 표현한다. '먼 과거가 캄캄한 물결이 되어 어두운 원망의 감정과 함께 밀려왔다.'(p.15)라고. 또한 준고가 뒤에서 껴안자, '몸속에서 거품이 부글부글 일었다. 소름이 끼칠듯한 혐오감이 온몸으로 번졌다.'(p.24)라고 한다. 하나는 준고를 증오하고 있다. 준고의 행각에 의혹이 집중되는 상황.

하지만, 하나는 준고를 증오하면서 증오하지 않는다. 역설적인 이 말은 하나의 미묘한 심리상태와 어울린다. 결혼식에 준고가 오지 않아 먼저 식을 시작하려 하는데, 하나는 "아빠 없이는, 나 결혼 안 할 거야!"(p.36)라며 소리치고, 뒤늦게 도착한 준고를 보고 '낯선 사람들 앞에서 한심함을 드러내고 있는 내 하나뿐인 혈육. 그 한 사람만의 은밀한 퇴폐가 황홀했다. 역시 내 남자는 너저분해도 아름다웠다.'(p.41)라고 한다. 준고에 의지하고 일면 자랑스러워하는 하나, 도대체 둘은 어떤 관계인가?

2장부터는 등장인물별로 시점이 바뀐다. 2장은 하나와 결혼한 오자키의 시점으로, 3년전 하나와의 첫 만남이 중심이다. 하나와는 정반대인 오자키의 삶이 제시되지만, 초점은 역시 준고와 하나이다. 타인이 바라보는 준고와 하나의 모습을 통해 비정상적인 부녀관계를 더욱 극명하게 부각한다. 하나의 직장동료들은 준고를 하나의 기둥서방이라 수근거린다. 준고가 젊은데다, 도를 넘는 친밀감을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주목할만한 부분을 보자. 하나가 오자키에게 준고에 대한 생각을 말하는 장면이 있다. "우리 아버지는, 최악이고 최고에요. (중략) 이대로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떠나고 싶은지도 모르겠어요.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고, 어떻게 하면 떠날 수 있는지도 전혀 모르겠어요."(p.119) 역시 모호하다.

둘의 관계를 상징하는 중요소재가 제시된다. 오자키는 준고네 집에서 하루를 보내며 전시회에서 본 이상한 그림을 떠올린다. "그 뒤엉킨 나무 두 그루 그림의 제목은 '체인 갱'이었다. 쇠사슬에 묶인 두 죄수라는 뜻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나 상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뒤엉킨 채 비쩍 마르고 지쳐 간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가지를 뻗는다."(p.140) 결말을 되짚으면 이는 직접적인 상징이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3장은 준고의 시점이다. 경찰인 다오카가 준고를 찾아오고,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 3장과 하나의 시점인 4장에서 미스터리였던 대부분의 비밀이 밝혀진다. 준고의 과거 일부(p.209), 살인사건의 비밀(p.185,243이하), 사진기의 비밀(p.234) 두 사람의 관계(p.188,223,257) 등등.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정말 저런 관계일지는 몰랐다. 작품성을 별론으로 하고, 저런 설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걱정스럽다.

여기서 기리노 나쓰오의 <잔학기>와 이 작품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의 행동은 <잔학기>의 게이코와 유사하다. 오시오 할아버지는 준고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인물로, 하나와 준고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간파한다. 하나를 준고에게서 떼어내려고 노력(p.251)하지만 하나의 반응은 충격적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납치범 겐지에게 사랑을 느꼈던 게이코처럼, 하나역시 준고를 사랑하게 된건가. 단지 하나가 어렸기 때문 일수도 있다. 준고와 헤어진다는 걸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지도. (준고가 하나를 안고 '엄마'라고 부르는 기괴한 장면p.336은 게이코에게 했던 겐지의 행동과 닮아 있다.)

아쉬운 게 있다. 사쿠라바 가즈키는 더 썼어야 했다. 준고와 하나의 만남이 핵심인 1993년에서 끝내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결혼식 후 사라진 준고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고, 두 사람이 얽힌 살인사건은 흐지부지다. 결정적으로 하나의 탄생과정과 유년시절의 비밀-준고의 과거와 맞물린-이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2008년 현재를 끝부분(제7장으로)에 배치해 이야기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작품의 핵심인 하나의 내면갈등이 좀 더 부각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내 남자>는 굉장히 잘 읽히고 충격적인 설정이 인상적이다. 물론 설정에 거부감을 가질 분도 많을 것이다. 일본에서조차 반사회적, 반도덕적이란 비난을 받았을 정도니. 하지만, 이 작품의 가치는 충격적인 설정도 추리적 구성도 아니다. 하나와 고마치, 두 여성의 미묘한 내면묘사, 이것이 <내 남자>의 진정한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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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8-12-23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나보네요?ㅇ.,ㅇ 긴가민가 한 소설이었는데...^^저도 다음에 책살때 참고해야겠어용~~

쥬베이 2008-12-23 22:56   좋아요 0 | URL
시즈님!!^^ 반가워요 반가워요ㅋㅋㅋ
이 책은 남자보다는 여자분들께 잘 어울려요
충격적 설정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참 궁금합니다.

보석 2008-12-23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술 읽히는 재미있는 책이 아닐까 싶네요.^^ 그러나 구매는..음;

쥬베이 2008-12-23 22:5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보석님^^
맞아요. 술술 읽히고 나름 흥미있습니다.
근데, 설정이 너무 '반도덕적'이라...거부감이 들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