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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흐트와 아들
빌렘 얀 오텐 지음, 유동익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작품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모호하다. 근본원인은 두 가지. 주제의식을 파악하기가 어려운데다, 등장인물의 정보 내지 사건의 단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캔버스에 의해 '창조자'라 불리는 화가 '펠릭스 빈센트', 그의 아내 '리데베이 랑어베인', 빈센트의 친구인 여기자 '민커 뒤파위스', 유명한 개인 미술 소장가 '스페흐트', 이 4명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정보나 생각, 감정 등은 아주 흐릿하다. 이유는 화자가 사람이 아닌 사물 '캔버스'이기 때문이다. 즉, 등장인물이 '판 스헌덜 화방'에 있던 캔버스에 의해 관찰되기에, 독자는 극히 제한된 부분만을 볼 수 있다.
스페흐트의 아들 '싱어'나 갑자기 이야기되는 '테인'(p.103이하)의 경우, 이런 제한성은 확대된다. 이들은 실제 등장하지 않고, 4명의 핵심등장인물 간 대화를 통해 소개된다. 독자는 '캔버스의 관찰(1차)'과 '등장인물 간 대화(2차)'라는 이중의 간접성을 거쳐 그들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특히, 빈센트의 학교친구였다는 '테인'은 거의 투명하다. (p.106에서 약간의 정보가 제시되기는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호함은 작품의 단점인가? 아니다. 작가는 주제의식을 심화하는 장치로 모호함을 의도적으로 조장한다. 모호함은 스페흐트를 중심으로 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심화시키며, 또한 중후반 캔버스-테인-싱어-스타인(빈센트와 리데베이의 갓난아기)-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모호함은 <스페흐트와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 전제로, 미묘한 매력의 원천인 것이다.
좀 자세히 보자. 왜 모호함이 캔버스-테인-싱어-스타인-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인가? 이야기 흐름을 미세하게 관찰해보면, 화자인 캔버스의 성격(과연 이 표현이 적절한지는 몰라도)이 변화하는 걸 느낄 수 있다. 관찰능력을 가진 화자가 '성장했다'는 차원이 아니다. 후반부 화자는 사물이 감당할 수 없는 삶과 죽음, 인생의 성찰까지 이야기하는 단계에 이른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해리성 정체장애(다중인격) 측면에서 해석해 보았다. 빈센트에 의해 그려진 테인, 싱어는 캔버스에서 부활하고, 캔버스는 이들 모두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나는 테인이었다. 나는 그의 아이였다. 나는 리데베이였고, 민커였다. 나는 그의 앞에 서 있는데도 그가 보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우리가 얼마나 작고, 얼마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보호받지 못했고, 우리가 얼마나 가치 없는지를 봤어야만 했다.'(p.205)
주제의식도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캔버스가 빈센트를 '창조자'라고 부르는 점, 캔버스의 중후반 성격변화, p.133.134 서술 등을 종합하면, (1) '창조와 인간 존재의 근원이란 종교적 주제'가 도출된다. 또한 빈센트의 그림완성 즈음 출산하는 리데베이, 죽어가는 태아의 절규를 연상시키는 p.182,183 서술을 종합하면, (2) 만연한 '낙태에 대한 경고'란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p.182,183의 화자가 태아라고 가정하고 읽어보라. 소름이 끼칠 정도다.) 또한, 스페흐트와 민커의 상반된 주장에 집중한다면 (3) 일반적인 미스터리 작품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차마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작품 곳곳에 열린 해석이 가능한 단초가 널려 있다. 한마디로 <스페흐트와 아들>은 '완전성'보다는 '개방성'을 특징하는 작품.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고민하게 하는 책처럼 좋은 책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네델란드 최고 권위의 리브리브문학상 수상작인 <스페흐트와 아들>은 좋은 책이다. 작품이 품은 모호함과 개방성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들 것이다. 행복한 고민을^^ 빌렘 얀 오텐은 새하얀 캔버스를 준비했다. 그 위에 무엇을 그릴지는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