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지구인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31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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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후의 지구인>의 느낌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다. 동화 풍의 [작은 십자가], 코메디 [악을 저주하자], [통신판매], 공포 미스터리 [서풍], [결정], [창문 안], SF [겨울이 찾아온다면], [처형], [개척자들], [TV쇼]등. 그래도 한가지 특징을 꼽으라면, '공포 미스터리'를 고르고 싶다. 전혀 공포스럽지 않은 순간에서 가장 큰 공포와 미스터리를 선사하는 호시 신이치의 능력, 역시 대단하다.

[결정] 이야기의 대부분이 친구와 화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도토리 민화관>의 [취중대화]와 같은 구성. 양자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 대화라고는 하지만 화자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 줄 뿐이다. 재미있는 체험을 했다고 친구가 찾아와 이야기를 건넨다. 우편함에 있던 봉투에서 시작된 친구의 기묘한 이야기, 봉투의 정체는? 친구에겐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결말의 반전과 미스터리함을 기대하시길.

[창문 안]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등장인물도 한명이고 그리 복잡한 설정도 아니지만, 미스터리한 분위기도 좋았고 마지막 반전 역시 대단했다. 산 속 좁은 길을 걷고 있는 나, 어디선가 "도와주세요"라는 소리를 듣는다. 아니, 들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뭐지? 뭘까? 아무튼 화자는 길을 계속 가고, 서양식의 낡은 저택을 발견한다. 여기서도 이상한 체험을 하는데 2층 창문에서 뭔가가 움직인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결정 낡은 저택으로 들어가는 화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최후의 지구인>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

[개척자들] 공포분위기와 SF가 결합된 작품이다. <최후의 지구인>의 느낌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배경은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 지구를 떠나 행성을 개척한 개척자들이 살고 있다. 한가지 문제가 있다. 급격한 경련과 함께 죽어버리는 병이 퍼진 것이다. 개척자들은 원인이 음식이란 걸 밝혀낸다. 합성음식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천연음식의 뭔가가 결핍되었던 것. 원인은 알았지만, 대책이 없다. 천연음식이라곤 행성에 없었다. 유일한 천연음식은 인간의 고기. 이들의 과연 어떻게 난관을 헤쳐갈 것인가?

이외에도 인구증가와 감소문제를 다룬, 미래 예언과 같은 작품 [최후의 지구인], 평범한 직장인이 점쟁이를 만나 벌어지는 오싹한 이야기 [서풍], 우주 유배지를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이 인상적인 [처형]이 마음에 들었다.

<최후의 지구인>, 호시 신이치의 다양한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양한 느낌의 작품이 고루 실려있기에, 호시 신이치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권할 만하다. SF, 공포, 코메디, 동화등을 넘나드는 호시 신이치표 무한 상상력에 몸을 던져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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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있는 천국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30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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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플라시보 시리즈를 서평 하면서 가장 어려운 건, 내용을 얼마나 소개할지 정하는 것이다. 쇼트-쇼트라 자칫 잘못하면 작품 전체를 고스란히 말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반전이 있는 작품은 더욱 고민이다. '그럼 내용 소개를 하지 말지 그래?'할지 모르지만, 내용 언급 없는 서평은 서평이 아니라, 에세이일 뿐이다. 아무튼, 지금까지는 가급적 내용 소개를 자제하고 인상적인 작품위주로 간략하게 살펴 봤는데, 이번엔 가급적 많은 작품을 이야기하겠다.

<악마가 있는 천국>엔 미래과학,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절반이상이고 다양한 느낌의 작품이 조금씩 섞여 있다. 전체적인 수준은 <희망의 결말>, <도련님과 악몽>와 비슷하다. 수록작품의 완성도가 고르고, 인상적인 작품도 많다.

가장 먼저 이야기 하고 싶은 작품은 [귀여운 포리]다. 설정이 기발하고, 공포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쓸데없는 낭비없이, 짬짬이 밀수도 해서 돈을 모은 선원이 있다. 돈은 모았지만 여자에게 인기는 없다. 평범한 삶의 전기를 마련하고 싶었을까? 나이 든 집시여인을 찾아가 문신을 하기로 한다. 아무래도 이 선원은 별종이다. 양배추 문신을 하겠다는 거 아닌가. 집시여인은 만류한다. "엄청난 일을 당할 거에요. 평생 후회할 거라고요."(p.142) 기어이 양배추 문신을 하지만 역시 일이 벌어진다. 문신자리가 곪고, 양배추 무늬대신 여자 얼굴이 생긴 것이다. 놀랍게도 여자 얼굴은 살아있다. 이런 일이. 팔에 자리 잡은 여자 얼굴, 선원의 운명은?

이와 유사한 분위기의 작품은, 사고가 많은 교차로에 얽힌 이야기 [교차점], 학대당하는 부인이 옆집에 이사 온 후에 벌어지는 사건 [옆집 아내]이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 중엔 [사랑의 통신]과 [정열]이 마음에 들었다. [사랑의 통신] 여자에게 인기없음을 한탄하는 남자가 있다. 고민끝에 우주에 전문을 뿌린다. '저와 교제해주실 여성분 안 계십니까?'(p.97) 인연인지 어느 먼 별에서 전문에 반응을 보인다. 이렇게 우주를 넘나드는 사랑은 시작된다. 남자는 기대와 두려움에 떨며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한다. 상대가 보내온 이미지는 이럴수가, 지구의 여성보다 훨신 아름다운 것이다. 한걸음 더 나가 직접 만나러 지구로 오겠다는 상대.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어떤가? 펜팔을 염두에 두고 쓴 거 같지만, 사이버 세계의 만남과도 공유점이 있다. 혹시 이메일과 채팅등 사이버 세계에서 이뤄지는 만남을 예견했던 건 아닌지.

[정열] 우주연구소 회의실, 다른 태양계로의 탐험을 위한 프로젝트 논의중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엄청난 거리와 시간. "항성간 비행은 거리와 시간에 대한 도전입니다. 무엇보다 편도 200년 가까운 시간이기 때문에 한 세대로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최초 승무원의 손자 세대가 되어서야 겨우 목표로 한 별에 닿을 수 있습니다."(p.45) 인생의 전부를 삭막한 우주에서 보내야 하지만, 인류를 위해 많은 젊은이가 우주탐사를 자원한다. 그러던 중, 정체불명의 우주선이 지루에 착륙하고, 3대에 걸쳐 우주탐사를 한 우주인을 보게 되는데.

그 외에도, 우주인 지원에 탈락한 데 앙심을 품은 청년의 범죄를 소재로 한 [무중력 범죄], 자유자재로 둔갑할 수 있는 여우와 우주여행 이야기 [우주여우],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젤리상태의 뭔가가 지구에 떨어져 벌어진 이야기 [조사], 우주 개척을 위해 지구를 떠난 이들을 위문하는 우주 서커스단의 이야기 [서커스 여행]이 있고, [야기된 문명], [어슴 푸레한 별에서], [귀로], [꿈의 도시], [탈출구]등도 비슷한 느낌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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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결말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29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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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결말>엔 16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보통 25편 내외가 실리는 플라시보 시리즈에서 16편은 적은 수다. 그만큼 쇼트-쇼트보다는 약간 긴 작품이 실려 있다는 얘기. 16편이 실린 <수많은 금기>, 11편이 실린 <왕자가 되지 못한 왕자>의 빼어난 완성도 만큼이나 이 작품 역시 좋다. 한 두페이지 분량에선 시도할 수 없었던 구성과 전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상상력을 접할 수 있다.

탈옥한 강도범이 여자 혼자사는 집에 침입하는 설정인 [침입자와 나눈 대화]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이상 말할 수가 없다. 한마디만 더하면 바로 스포일러. [현실]은 '호시 신이치표 스토리의 무한폭주'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꿈을 매개로 다양한 삶이 펼쳐지는데, 상상력의 한계를 보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내 자식을 위해서], [하늘에 떠 있는 죽음의 신], [멋진 식사], 이 세 작품은 <희망의 결말>의 최고 걸작이다. [봇코짱], [이봐, 나와!]같은 걸작과 비교해서 처지지 않는다. 드라마로 만든다 해도 손색없을 거 같다.

[내 자식을 위해서] 지역 저명인사를 가장한 범죄조직의 보스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남자는 보스의 아들이 살인사건을 저질렀고, 구할 방법은 정신이상으로 인한 범죄를 주장하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정신이상을 확실하게 주장하기 위해 아버지 역시 미친척 해야 한다는 남자. 보스는 아들을 위해서 체면이고 뭐고 신경쓰지 않고 미친척 한다. 하지만. 충격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하늘에 떠 있는 죽음의 신] 장소는 비행기 안, 위기상황이 발생해 비행기의 고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스튜어디스는 승객을 안정시키지만 반응이 이상하다. 삶의 희망인 아들이 죽었기에 살 의미가 없다는 남자, 가족에게 거액의 보상금이 나오기 때문에 맘 놓고 죽을 수 있다고 좋아하는 남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차라리 죽겠다는 커플 등등. 직업정신을 발휘, 삶의 희망을 주려는 스튜어디스를 무색게하는 사람들 정말 충격이다.

[멋진 식사] 이전 배우자를 잃고 재혼한 부부. 겉으로는 사랑이 넘치지만 꿍꿍이는 따로 있었다. 재산을 노리고 상대를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다. 아내는 스테이크에 남편은 브랜디에, 독약을 섞는다. 죽음의 만찬이 차려지고 긴장감을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이상한 택배에 이어 탈옥수가 들이닥친다. 부부의 음모는 어떻게 될까? 감탄을 거듭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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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12-07-1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작품은 페이지를 표시하지 않았네요.
다시 읽다 새삼 발견.
 
도련님과 악몽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28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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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코짱>을 기점으로 플라시보 시리즈의 그 이후 작품은 모두가 대단한 걸작이다. 혹시 플라시보 시리즈에 대한 시각이 관대해진 건 아닌지 초반 작품을 다시 읽어봐도 마찬가지다. 우연하게 좋은 작품이 몰린 걸 수도 있고, 취향 문제일 수도 있지만, 분명 특이하다. <도련님과 악몽> 역시 대단하다. '이것이 호시 신이치다! 이것이 쇼트-쇼트의 정수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전체 분위기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초반은 호러풍, 중반은 타임머신 등이 등장하는 미래과학 이야기, 종반은 외계인과 우주 이야기.

공포 분위기의 시작은 [눈 오는 밤]이다. 부모의 애틋한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분위기 반전은 오싹했다. 겨울의 고요함이 물신 느껴지는 밤, 노부부는 2층에서 공부하는 아이를 걱정한다. 야식이라도 갖다 줄까, 괜히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자녀를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 훈훈하다. 강도가 침입함으로써 분위기는 1차 반전되고, 결말에서 또 한번 반전된다.

[응시]의 설정은 일본 공포영화에서 본 적 있다. 영화의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데, 호시 신이치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듯 하다. [꿈속의 남자]같은 경우, 얼핏 보기엔 전혀 무섭지 않다. 귀신도 유령도 없고, 끔찍한 내용도 아니다. 하지만, 결말을 돌아보면 소름이 돋는다. 이런게 진정한 공포물이 아닐까? 간단히 소개하면, 반복되는 꿈 때문에 고민하는 어느 사장의 이야기 정도. [불운]은 유령선이 등장하기에 분류한다면 공포물에 가깝지만, 무섭기 보다는 '재미'있다. 얼마전 이야기 한, 호시 신이치와 유령 등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봐야 할 듯.

중반은 미래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 많다. 시작은 [친구를 잃은 밤]. 지구에 마지막 남은 코끼리의 최후가 긴급뉴스로 타전된다. 할머니와 손자는 뉴스를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할머니, 코끼리는 왜 사라져 버린 거야?" "이 지구상에는 코끼리가 좋아하는 장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거야." (중략) "나는 어른이 되면 코끼리와 놀아 줄 수도 있는데." "어릴 적에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어른이 되면 코끼리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게 되지. 그런 시대가 계속 되었기 때문에, 코끼리도 저렇게 한 마리만 남게 된 거야."(p.82) 가상의 이야기가 이렇게 생생하게 다가오다니…잔잔하면서 묵직한 울림을 남기는 작품이다.

[헛된 시간]도 사회적 메시지가 분명하다. '광고제거기'를 만든 과학자를 통해 광고가 넘쳐나는 현실을 풍자한다. [건조시대]와 [백주의 습격]은 타임머신이 중요소재란 점이 유사하다. 특히 [백주의 습격]은 서부극을 연상시키는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끝 부분은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우주의 네로] 지구를 침입한 외계인은 "파멸의 시기를 늦추려면 재밌는 걸 해 보라"고 요구한다.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지구의 운명은? [현명한 여자들]은 외계인이 침입해서, '지구의 여자를 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이다. 설정 자체가 성차별적 내용인지라 여성분들이 기분 나빠할지 모르겠다. 크게 셋으로 분류한 흐름과는 어긋나지만, [밤의 침입자]는 간략하게 나마 소개해야 겠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집에 침입한 탈옥수 이야기로, 결말이 통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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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8-10-10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이제야 호시 신이치의 책을 주문했습니다. 바로 이 책이에요. 기대가 큽니다~~^^
 
삼면기사, 피로 얼룩진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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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삼면기사는 신문 사회면 한구석 '휴지통'코너 같은 것이다.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라며 놀라고, 때론 황당하기까지 한 삼면기사에서 가쿠타 미쓰요는 이면에 감춰진 인간을 찾는다. 그러한 상황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던 갈등과 고뇌를 돌아보며, 짧은 기사 속에서 왜곡되고 은폐되었던 삶을 돌아본다. 이들의 고뇌를 이해하고, 누구나 삼면기사 속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이 책과 하나가 될 수 있다. 

6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소재가 된 실화사건을 간략히 살펴보자. [사랑의 보금자리] 살해한 여성의 시체를 마루 밑에 26년간 숨겨온 사건. [밤 불꽃놀이] 인터넷으로 불륜상대의 아내를 살해해 달라고 부탁한 여성의 이야기. [저 너머의 성] 주부가 20살이나 어린 남고생과 음란 행위를 벌인 사건. [영원의 화원] 남자 담임교사 급식에 약물을 섞은 여고생 이야기. [빨간 필통] 괴한이 침입해 공부하던 여중생을 살해한 사건. [빛의 강] 간호에 지쳐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살해한 남자이야기.

인상적인 것은, 사건의 중심에 여성을 위치시키고, 여성의 관점으로 사건을 재해석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외견상 남성이 저지른 사건을 다룬, [사랑의 보금자리], [빨간 필통]조차 여성의 갈등구조로 풀어낸다. 남성은 전면에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가쿠타 미쓰요는 섬세하고 유려한 문체로 여성의 심리를 그려낸다. 특히, 결국엔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된 여성의 쓸쓸함, 일상의 지루함이 묻어 있는 [저 너머의 성]의 아이코 심리묘사, 여동생에 대한 미묘한 감정, 열등감이 폭발하는 [빨간 필통]의 미치 심리묘사는 전체가 시를 연상시킨다.

[사랑의 보금자리] 소재인 실화사건은 간단한 구도다. '남자가 여자를 살해했고, 오래동안 시체를 숨겨왔다' 끝이다. 하지만 소설에는 후사에, 다이시 부부와 후사에의 언니 미에코, 마사후미 부부가 등장한다. 가쿠타 미쓰요는 후사에를 화자로 내세워 관찰자 역할을 맡기고, 언니와 동생의 대조, 다이시의 숨겨진 모습 등의 설정을 추가한다. 살인사건 자체보다, 사건의 중심에서 무너져 가는 언니를 바라보는 동생의 시선에 더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스포일러 있음) [빨간 필통] 누구나 경험했을 자매간 갈등을 극적으로 형상화 했다. 실제사건의 의혹(내지 모호함. 집에 침입해 차녀만 찌르고 달아났다는 게 석연치 않다.)을 파고들어 새롭게 해석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자기가 갖지 못한 걸 가진 동생, 자기가 모르는 눈부시고 충실한 시간을 보내는 동생, 질투와 좌절에 괴로워하는 화자의 감정이 섬뜩하리만큼 절절히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 안은 조용했다. 쇳소리도 완전히 멈췄다. 미치는 자기가 왜 그곳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미 자매가 사용하지 않는 수다방에 도대체 왜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냉장고를 열고 도대체 무엇을 꺼내러 왔는지 잊은 것처럼. 미치는 자신이 하려던 일을 떠올리기 위해 축 늘어뜨린 오른손을 본다. 식칼이 쥐어져 있다.(p.244)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읽는 것처럼 행복한 게 있을까? 읽는 내내 즐거웠다. 범죄를 소재로 했지만 범죄의 추악함보다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갈등과 고뇌가 부각된다. 공감할 수 있다. 특히 가쿠타 미쓰요의 빼어난 묘사는 이 작품의 백미다. <삼면기사, 피로 얼룩진>, 가쿠타 미쓰요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멋진 작품이다. 국내에선 과소평가된 가쿠타 미쓰요의 매력을 느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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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11-04-03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리뷰가 도통 안써져서 엄청 힘들었던 기억이 남^^ 지금 읽어도 리뷰가 영 별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