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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면기사, 피로 얼룩진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삼면기사는 신문 사회면 한구석 '휴지통'코너 같은 것이다.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라며 놀라고, 때론 황당하기까지 한 삼면기사에서 가쿠타 미쓰요는 이면에 감춰진 인간을 찾는다. 그러한 상황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던 갈등과 고뇌를 돌아보며, 짧은 기사 속에서 왜곡되고 은폐되었던 삶을 돌아본다. 이들의 고뇌를 이해하고, 누구나 삼면기사 속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이 책과 하나가 될 수 있다.
6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소재가 된 실화사건을 간략히 살펴보자. [사랑의 보금자리] 살해한 여성의 시체를 마루 밑에 26년간 숨겨온 사건. [밤 불꽃놀이] 인터넷으로 불륜상대의 아내를 살해해 달라고 부탁한 여성의 이야기. [저 너머의 성] 주부가 20살이나 어린 남고생과 음란 행위를 벌인 사건. [영원의 화원] 남자 담임교사 급식에 약물을 섞은 여고생 이야기. [빨간 필통] 괴한이 침입해 공부하던 여중생을 살해한 사건. [빛의 강] 간호에 지쳐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살해한 남자이야기.
인상적인 것은, 사건의 중심에 여성을 위치시키고, 여성의 관점으로 사건을 재해석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외견상 남성이 저지른 사건을 다룬, [사랑의 보금자리], [빨간 필통]조차 여성의 갈등구조로 풀어낸다. 남성은 전면에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가쿠타 미쓰요는 섬세하고 유려한 문체로 여성의 심리를 그려낸다. 특히, 결국엔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된 여성의 쓸쓸함, 일상의 지루함이 묻어 있는 [저 너머의 성]의 아이코 심리묘사, 여동생에 대한 미묘한 감정, 열등감이 폭발하는 [빨간 필통]의 미치 심리묘사는 전체가 시를 연상시킨다.
[사랑의 보금자리] 소재인 실화사건은 간단한 구도다. '남자가 여자를 살해했고, 오래동안 시체를 숨겨왔다' 끝이다. 하지만 소설에는 후사에, 다이시 부부와 후사에의 언니 미에코, 마사후미 부부가 등장한다. 가쿠타 미쓰요는 후사에를 화자로 내세워 관찰자 역할을 맡기고, 언니와 동생의 대조, 다이시의 숨겨진 모습 등의 설정을 추가한다. 살인사건 자체보다, 사건의 중심에서 무너져 가는 언니를 바라보는 동생의 시선에 더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스포일러 있음) [빨간 필통] 누구나 경험했을 자매간 갈등을 극적으로 형상화 했다. 실제사건의 의혹(내지 모호함. 집에 침입해 차녀만 찌르고 달아났다는 게 석연치 않다.)을 파고들어 새롭게 해석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자기가 갖지 못한 걸 가진 동생, 자기가 모르는 눈부시고 충실한 시간을 보내는 동생, 질투와 좌절에 괴로워하는 화자의 감정이 섬뜩하리만큼 절절히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 안은 조용했다. 쇳소리도 완전히 멈췄다. 미치는 자기가 왜 그곳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미 자매가 사용하지 않는 수다방에 도대체 왜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냉장고를 열고 도대체 무엇을 꺼내러 왔는지 잊은 것처럼. 미치는 자신이 하려던 일을 떠올리기 위해 축 늘어뜨린 오른손을 본다. 식칼이 쥐어져 있다.(p.244)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읽는 것처럼 행복한 게 있을까? 읽는 내내 즐거웠다. 범죄를 소재로 했지만 범죄의 추악함보다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갈등과 고뇌가 부각된다. 공감할 수 있다. 특히 가쿠타 미쓰요의 빼어난 묘사는 이 작품의 백미다. <삼면기사, 피로 얼룩진>, 가쿠타 미쓰요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멋진 작품이다. 국내에선 과소평가된 가쿠타 미쓰요의 매력을 느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