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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비가 내린다. 빗소리를 들으며, 어린시절을 추억한다. 어머니께서 비오늘 날 해주셨던 간식, 그 시절 읽던 책과 TV프로, 그리고 함께 놀던 친구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고, 사소한 문제들이 그 시절 친구관계에선 너무나 큰 문제였단 사실에 작게 미소짓는다. 한가지 생각한다. 만약 내가 절친한 친구를 죽이게 된다면? 아니, 내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면? 사소해 보이지만, 내겐 절실한 문제 때문에 벌어지는 살인은 의외로 의식 가까이 있다.
오츠 이치의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는 <ZOO>에 이어 두번째로 접하는 그의 소설이다. <ZOO>가 뭐낙 충격적이고 강렬했기에, 후속작에 대한 기대는 당연히 컸고, 불안하기까지 했다. '지나친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 아닌가? 하지만,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를 읽고 난 지금, 행복하고 뿌듯하다. 왜? 오츠 이치란 작가를 제대로 봤다는 자부심, 역시 그는 '시대의 천재'라는 재확인, 등등. 오츠 이치는 내 지나친 기대를 최고의 소설로 부응했다. 오츠 이치, 그는 최고다.
아이들이 행방불명되는 사건때문에 흉흉한 마을. 세 명의 아이가 있다. 절친한 친구사이인 야요이와 사쓰키. 그리고 야요이의 오빠 켄. 누가 과연 이후에 벌어질 충격적 사건을 예상이나 했을까? 켄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야요이는 사쓰키를 떠밀어 살해하고, 야요이와 켄은 사쓰키의 사체를 유기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이들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를 읽으며 다음 세가지에 주목했다. 첫째, 야요이가 사쓰키를 죽인 이유, 그리고 살해당시 심리. 둘째, '과연 켄은 사쓰키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 들인 것일까' 하는 점. 셋째, 원한을 품을 만한데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사쓰키(오츠 이치)의 서술태도. 그리고 마지막, 충격적 결말. 하나씩 살펴보자.
야요이는 왜 절친한 친구인 사쓰키를 살해한 것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눈높이를 야요이나 사쓰키 또래로 맞추어야 한다. 야요이와 사쓰키는 모두 켄을 좋아하고 있다. 특히 야요이는 '결혼하지 못하니까 다른 집에 태어나고 싶다고 한 거야?'(p.22)라고 묻는 사쓰키의 물음에 침묵으로 사실상 긍정하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야요이는 친오빠동생 관계를 넘는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사쓰키는 말한다. "나도, 나도 켄 오빠를 좋아해."(p.23) 저 말 한마디는 곧 '죽음의 말'이었다.
야요이는 위에서 말한대로 켄에 대한 극단적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켄은 자기만이 독점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런 그를 사쓰키가 좋아한다는 것은 그녀의 독점욕에 대한 도전이다. 즉, 사쓰키는 자기만이 사랑해야 할 '오빠를 넘 본 천하의 죽일 년'이었던 것이다. 이런 감정은 그 또래 아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원시적 독점욕. 야요이가 비정상적인 정신이상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과연 켄은 사쓰키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처음 켄은 사쓰키의 사체를 발견하고 침착하게 야요이에게 전후사정을 묻는다. 그리곤 어머니에게 말하자고 한다.(p.26) 여기까지는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런데, 그는 머믓거리는 야요이의 반응에 사체를 은닉하기로 결정한다. 아주 이상하다. 사쓰키가 야요이의 말대로 사고사한 것이라면, 어른에게 사건을 말하도록 설득해 문제를 해결하는게 자연스럽다. 그러면 왜 그는 사체은닉에 앞장선 것일까?
두가지를 생각했다. 켄은 야요이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통해, 사쓰키의 죽음에 야요이가 깊게 관계되어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남매간의 직감을 통해...또 다른 해석은 이미 켄이 사쓰키의 살해장면을 목격했으리란 것이다. 그랬기에, 살인자가 되버릴 동생을 위해, 살인자의 오빠가 되버릴 자신을 위해, 그토록 적극적으로 사체은닉에 나선 것은 아닐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해석이다. 소설속 어디에도 이런 해석론을 뒷받침할 단서는 나오지 않는다.)
죽임을 당한 사쓰키의 서술태도를 좀 살펴보자. 한창 꽃피울 나이에, 그것도 절친한 친구에게 살해된 사쓰키. 누가 보더라도 그녀의 죽음은 처절하고, 한스럽다. 하지만, 사쓰키는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를 유지한다. 자기를 죽인 야요이나, 시체은닉을 주도하는 켄에게 극한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이미 죽어버렸기에, 체념한 것일까? 이유가 어떠하던간에 사쓰키의 저런 서술태도는 소설을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그녀가 자기 감정에 충실했다면, 독자는 소설에 절대 몰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결말을 이야기해 볼까. 정말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그 어떤 추리소설과 비교해도 못하지 않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 난 결말을 보고, '앞부분 그 장면이 그런 의미였구나, 그 소재는 저런 의미로 사용됐구나'하고 감탄했다. (스포일러 때문에 아주 조금만 언급하겠다. 떠돌이 개, 66과 한짝만 사라진 샌들, 이것이 결말의 힌트다. 숨겨져 있다.) 오츠 이치는 이미 모든 걸 치밀하게 계산했던 것이다. 온 몸을 휘감는 공포. 이런 식으로 공포에 떨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이 여름, 오츠 이치의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는 당신에게 극한 충격과 전율을 선사할 것이다. '시대의 천재' 오츠 이치, 그는 절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도 최고지만, 같이 수록되어 있는 <요코>는 더욱 훌륭했다. 개인적으로 더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리뷰에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