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8월
품절


나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가지에서 떨어졌다. 마치 슬로모션처럼 주위 경치가 천천히 위로 흘러갔다. 방금 올라온 몇 개의 가지를 우두둑 부러트리면서 나는 멈추지 않고 떨어졌다. 가지 하나에 세게 부딪쳐 내 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리며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계속 떨어졌다. 허공에서 좋아하는 샌들이 한쪽 벗겨진 것이 한없이 안타까웠다.-24쪽

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나를 벽장에 숨겼다. 켄 오빠는 보물을 숨기는 것처럼, 장난을 꾸미는 악동과도 같이 나를 깊이깊이 쑤셔 넣었다. 야요이는 공포와 불안의 덩어리를 감추듯, 신의 눈으로부터 자신의 죄악을 멀리 치우듯 깊이깊이 쑤셔 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벽장문이 닫혔다.-61쪽

야요이는 눈동자를 빛내며 "정말? 정말? 하고 몇 번이나 물었다. 상상한 것이다. 일제히 반짝이는 화려한 빛의 꽃잎이 날려 폭포 같은 빛의 홍수가 하늘을 장식하는 모습을, 박력 있고 환상적이지만 불과 십 몇 초밖에 피지 못하는 짧고 덧없는 여름의 꽃을.-104쪽

다시 그 아래쪽은 썩은 종이 종류가 많았다. 뭐라고 붓글씨가 적힌 것이며 변색되어 누렇게 된 종이 같은 것이 빗물에 원형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섬유가 풀어져 굳어져 있었다. 흡사 아이들이 버린 생각으로 꽉 들어차, 어른이 되어 죽어갈 때까지 긴 시간을 들여 하나로 응축된 것처럼.-140쪽

돌담과 함께 잠자고 있었을 각 시대 아이들의 추억은 가을 바람에 휩싸여, 마치 여름날의 덧없는 꿈 이야기였던 것처럼 사라져 갔다. 그런 광경을, 아직까지 내 샌들이 숨겨져 있는 나무 계단 위, 사당에 모셔진 신의 앞에 앉아 바라보면서, 세 명의 죄인은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찿아올 미래를 향해, 자신들로부터 멀어져 간 유년의 날들을 향해......-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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