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가락에서 솟구친 피가 탱크속에 흘러들어 사이다를 복숭앗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맑디맑은 색깔이 거품과 함께 톡톡 터지고 있었다.-13쪽
"집에 불이나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남동생은 죽고 나만 살아났어요. 그 다음날, 다 타 버린 집터의 땅바닥에서 이 버섯을 발견했습니다. 세 개가 서로 나란히 붙어 있어서 나도 모르게 따 버렸어요. 이래저래 생각해봤는데, 여기 가져와 표본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게 가장 좋을 거 같았어요. 불에 타서 없어져 버린 것들을 모두 이 버섯과 함께 봉인하고 싶어요."-26쪽
고스란히 드러난 내 발은 그의 손 안에 있었다. 그가 너무도 종아리를 세게 잡았기 때문에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타일 이음새에 발가락 끝을 건 채 그저 가만히 바닥에 떨어진 헌 구두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한 짝은 거꾸로 뒤집히고 다른 한 짝은 옆으로 쓰러져서, 날개를 쥐어뜯긴 두 마리 작은 새의 시체처럼 보였다.-41쪽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페이스를 무너뜨리지 않고, 타인에게 폐가 된다는 것에 둔감하기만 한 이런 타입의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입으로는 미안해요, 미안해요를 거듭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11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