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꿈꾼 나라 - 실록으로 읽는 세종의 위업
이석제 지음 / 인간과자연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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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과 글인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먼저 한글은 현재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들 중에서 창제자와 창제년도가 명확히 밝혀진 몇 안 되는 문자이며, 다른 나라의 문자를 빌려 쓰지 않고, 제자(制字) 원리의 독창성을 보유한 문자라는 점이다. 또한, 발음 기관의 모양을 상형하여 기본자를 만들고, 획을 더해 소리 세기를 나타냄으로서 글자 모양에 소리의 자질을 반영하여 과학적으로 구성된 문자라는 것도 한글의 우수성을 잘 대변해주는 특징이다. 음소 문자이지만 음절 단위로 모아쓰기를 함으로서 의미를 빠르고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어 정보 처리의 효율이 높다는 점과 몇 개의 기본 글자로 많은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경제성과 효율성을 갖춘 문자라는 것도 한글의 또 다른 장점이다. 무엇보다도 적은 수의 문자를 체계적으로 구성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다는 점이 한글의 문자적 우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글의 문자적 우수성으로 인해 유네스코(UNESCO)는 '세종대왕 문맹 퇴치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제정하여 해마다 세계에서 문맹 퇴치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수여하고 있다.

 


<세종이 꿈꾼 나라>는 저자 이석제가 한글창제 등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위대한 업적들을 남기기 위해 세종이 보냈을 셀 수 없이 많은 불면의 밤들, 수많은 생각과 고뇌들을 <세종실록>이라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료를 통해 돌아보고 정리한 책이다. 오늘날 한글은 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기능적인 글자로 인정받고 있지만, 정작 한글 창제의 역사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글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공동연구에서 탕생한 것으로 막연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세종이 꿈꾼 나라>는 한글의 우수성을 조명하기보다는 세종의 인간적인 모습, 한글이 어떠한 배경과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사실 한글의 진정한 위대함은 문자적 우수성 보다는 그 탄생 배경에 있는지도 모른다.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음을 가엾게 생각하는 ’애민정신‘,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자주정신‘, 이로 인해 독창적으로 새로운 문자를 만든 ’창조정신‘과 누구나 글자를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한 ’실용정신‘이야말로 진정한 한글의 위대함을 나타내 주는 것 아닐까? 이러한 세종의 애민정신은 노비들에게 100일간의 출산 휴가를 부여하고, 출산 1개월 전 복무를 면제시켜준 사례와 (세종실록 50권, 12년), 사역인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자 노비에게도 육아 휴가를 부여한 일화 (세종실록 64권, 16권)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를 만난 적은 없소.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그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

 


1909년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린 안중근 의사가 거사 후 체포되어 심문 중에 한 외국인에 대해 한 말이다. 그는 누구이고 왜 안중근은 한명의 이방인을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하며, 최상의 예를 갖추어 존경을 표했을까? 안중근이 지칭한 사람은 평생을 한국을 위해 헌신한 호모 헐버트 (Homer B. Hulbert) 박사이다. 호머 헐버트 박사는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 ‘육영공원’의 교사가 되어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조선 말글을 공부했으나, 한글을 접하자마자 그는 한글에 매료되었고, 배운지 4일 만에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허버트 박사는 단순히 우수성을 전하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그의 일생을 걸고 투쟁했다. 맹목적으로 한자만을 고집하던 사대부들의 보수성에 맞서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하며 한글 전용을 주장했고, 1889년 조선 말글의 우수성에 대해 <뉴욕 트리뷴>지에 기고하며 한글의 자모를 세계 언론에 최초로 소개했고, 1891년에는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민필지>를 출간했다. 일부 한국인들마저 국가와 민족에 반하는 삶을 택한 엄혹한 시기에 한국에 아무런 의무가 없는 한 이방인에 불과했던 헐버트 박사는 어떻게 자신과 가족의 삶까지 희생하며 이렇게까지 한글을 알리고 한민족을 위해 행동할 수 있었을까? <세종이 꿈꾼 나라>를 읽으며 헐버트 박사의 헌신 이유는 어쩌면 한글 창제 배경에 대한 깊은 감복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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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11-30 13: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헐버트 박사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잊어서는 안될 고마운 분이 맞을듯요. 독립신문에서 한글이 최초로 띄어쓰기를 시도하는데 그것도 헐버트 박사의 공이었대요.

잭와일드 2021-11-30 14:12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 아리랑을 서양식 음계로 처음 채보한 것도 허버트 박사였죠.

mini74 2021-11-30 19: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헐버트 박사님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요. 한국에 묻히고 싶다하셨던 분. 잘 읽었습니다 *^^*

잭와일드 2021-11-30 19:20   좋아요 2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scott 2021-12-09 16: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일드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감동의 리뷰 였습니다 👍

잭와일드 2021-12-09 22:30   좋아요 3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mini74 2021-12-09 16: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 축하드립니다

잭와일드 2021-12-09 22:31   좋아요 3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12-09 16: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잭와일드 2021-12-09 22:31   좋아요 2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1-12-09 20:4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잭와일드님! 이달의 리뷰에 당선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잭와일드 2021-12-09 22:31   좋아요 3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쎄인트saint 2021-12-09 17: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잭와일드 2021-12-09 22:31   좋아요 3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12-09 18: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잭와일드 2021-12-09 22:31   좋아요 4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12-09 21: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당선되신거 축하드려요 ^^

잭와일드 2021-12-09 22:31   좋아요 3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12-09 21: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잭와일드 2021-12-09 22:31   좋아요 4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지 1 - 아모르 마네트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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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의 제목 <직지(直指)>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의미한다. 소설을 접하기 전부터 <직지>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민족적 가치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정확한 명칭과 의미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알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학창시절 의무교육을 통해 <직지><직지심경>이라는 불교의 경전으로 오인될 수 있는 이름으로 처음 접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직지>의 정확한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로 이는 '백운화상이 편찬한 마음의 실체(근본)를 가리키는 선사들의 중요한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직지>는 백운화상이라는 고려시대 고승이 역대 선승들의 선문답을 정리한 '요절(要節)'로서 부처의 말씀을 아난존자가 옮겨 적은 걸 의미하는 '불경(佛經)'이 아니다. (직지 151)



앞의 것이 이미 사라지는가 하더니 뒤의 것이 다시 생기고...

앞과 뒤가 이어져 진리에 닿을지니. (직지 191

 


소설을 접하기 전에는 고려시대 불경의 보전을 위해 청주의 작은 사찰에서 탄생한 현존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이라는 것이 <직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주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직지>의 정확한 명칭과 의미에 대해 알 수 있었고, 나아가 <직지>가 담고 있는 가치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앞과 뒤가 이어져 진리에 닿는다.<직지>의 문구처럼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과 새롭게 깨달은 진리의 파편들을 완전한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벗어나 끊임없이 진리를 향하여 다가설 것을 독려하는 <직지>의 위대한 통찰,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진실에의 접근을 시도하는 소설 <직지>와도 그 맥을 같이 하는 듯 했다.

 



2권으로 구성된 소설 <직지>는 창으로 심장을 관통 당한 채 귀가 잘리고 목에 흡혈의 흔적까지 남아있는 참혹한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1권은 기자인 '기연'이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잔혹한 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 <직지>와의 연관성을 발견하게 되고, 이렇게 미스터리한 살인사건의 진실은 <직지>의 미스터리로 연결된다. 2권에서는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적 사실에 작가적 상상력이 가미되어 탄생한 조선의 여인 '은수'<직지>와 구텐베르크의 연결고리가 되어 조선과 유럽을 무대로 펼치는 활약을 다룬다.

 



저자는 '최고의 목판본 다라니경에서부터 최고의 금속활자 직지, 최고의 언어 한글,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로 이어지는 흐름을 언급하며 지식의 전파와 보급의 측면에서 인류의 지식정보혁명에 기여해온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직지 17) <직지>와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의 직접적인 관련성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지식과 정보를 전파하고 공유하려는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알파벳과 문장부호 등을 포함해서 약 60자 정도만 주조하면 되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에 비해 <직지>는 수많은 한자를 주조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금속활자 인쇄의 장점은 수많은 활자를 미리 주조해두고, 필요한 것만 가져다 조판하여 빠르게 인쇄할 수 있다는 것인데 <직지>는 한자가 갖는 언어적 특징 때문에 장점을 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탄생하기 이전에 세종대왕은 한글을 반포했다. 한글은 만든 목적이 분명하고 만든 사람과 만든 시기가 분명한 세계 유일의 언어이다. 글을 모르고는 지식을 습득할 수 없고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활의 향상, 문화의 향상을 도모할 수 없다는 애민정신과 실용주의를 기반으로 탄생한 한글은 오늘날 우리가 학문적,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소설 속에서 과거의 '은수'와 현재의 '기연'<직지>의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연결된다. 그들이 닿고자 했던 진리, 애써 전하고자 했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은수는 목에 걸린 은십자가 목걸이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목걸이에 새겨진 글귀를 되뇌었다. '템푸스 푸지트 아모르 마네트 (Tempus fugit Amor Manet)', 은수는 라틴어를 깨우치면서 이 글귀가 '세월은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는 뜻인 걸 알게 되었다. (직지 2157

 



인간이란 무엇일까? 욕망을 품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고 그 욕망을 어떻게 조절하고 통제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이었다. 이는 진리는 감각으로 경험하는 현실이 아닌 이성으로 인지하는 이데아(idea)에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이나 사사로운 욕심에서 발생하는 마음인 '인심(人心)'과 인의예지라는 본성에서 기인하는 '도심(道心)'과 관련한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론 논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설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인간에게는 행복이 최고의 목표가 아니야. 인간은 때때로 행복보다 불행을

택하기도 해. 그게 더 의미가 있다면... (직지 289)



소설에서 과거에서 또 현재에서 진리를 추구했던 두 여인이 깨달았던 것은 부처의 지혜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져 온 우주가 연꽃같은 장엄함으로 가득찬 세계가 된다는 '화엄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 아닐까? 연약하기 짝이 없는 작은 싹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 무거운 흙의 무게를 이겨낸 후 땅 위로 몸을 내미는 순간의 장엄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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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 최신 버전으로 새롭게 편집한 명작의 백미, 책 읽어드립니다
조지 오웰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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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 보다 더욱 평등하다."

(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 - 동물농장 -

 


대한민국 헌법 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음을 규정하고 있다. 평등하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권리와 의무를 포함한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등한 상태를 더욱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평등하다는 것 자체가 등급이나 수준 차이 등의 높낮이가 존재하지 않는 동등한 상태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이미 평등한 상태에 도달한 대상을 어느 쪽이 더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평등은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비교급이나 최상급으로 표현할 수 없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등과 민주사회 구현을 목표로 했던 혁명가들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특정집단에게만 특권을 부여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반민주적 행태를 보인 것을 역사 속에서 수없이 지켜봐왔다. 조지 오웰은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 보다 더욱 평등하다는 동물농장의 계명을 통해 형식적으로는 평등을 외치며 실제로는 특정 집단에게 권력과 특권을 부여하는 사회의 부조리와 특권의식을 풍자하고 있다.


 

조지오웰은 1945년 이 책을 처음 출간하면서 "동물농장, 한 편의 동화 (Aniaml farm : A fairy story)"라는 제목을 붙였다. 부제에서도 나타나듯 동물농장은 정치적 알레고리 (Allegory)이자 동물우화이다. 동물농장은 사건의 배경과 이를 묘사하는 언어가 축어적이고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는 비유적이고 이면적인 의미를 가진다. 일차적으로 동물세계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세계에 대한 풍자와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다. 오웰이 표현한 동물농장의 이면의 의미는 볼셰비키 혁명과 소비에트연방의 수립과정 그리고 그 이후의 모습이다. 유산자와 무산자간 계급차별이 사라진 자리에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라는 또 다른 계급이 생겨나 평등과 자유 실현이라는 이념은 한낱 구호에 그치게 된 동물농장 속 동물들의 삶은 혁명 전 제정 러시아 시대나 혁명 이후 소비에트연방 시대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민중들의 삶이기도 하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오웰은 작가의 글을 쓰는 동기에 대해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을 들면서 자신의 글쓰기의 출발점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고,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사실을 조명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여 스탈린과 소비에트 전체주의 체제를 겪은 오웰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이 소설을 썼다. 이는 이 시대에 살면서 전체주의나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해 글을 쓰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고,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태도라는 오웰의 발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동물농장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단지 러시아의 근현대사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오웰은 특정시대만의 산물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근원으로 반복되는 사회구조와 역사에 주목하였고, 이는 소설 동물농장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의 풍자 대상은 당시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을 착취하는 모든 형태의 독재체제에 확대 적용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동물농장은 반세기 이전의 과거에 일어난, 이미 확정되어버린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이야기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우리 삶을 다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알베르 까뮈는 모든 혁명가는 압제자 (oppressor)나 이단자 (heretic)로 끝난다고 말한다. 혁명가의 말로는 혁명의 동기가 된 순수한 이념과 열정을 망각한 채 헤게모니를 쥐고 지배하거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이단으로 단죄 받는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도 나폴레온은 부패한 압제자가 되었고, 스노볼은 변절자로 몰려 농장에서 쫓겨난다. 그렇다면 모든 혁명은 성공할 수 없는 것일까? 동물농장의 중요한 통찰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오웰은 혁명 초기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권력층의 배반과 함께 행동하지 않는 대중의 무기력함 또한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 혁명의 이념이 지배층의 권력욕으로 변질되지 않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대중들의 비판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전체주의와 독재는 지배층만의 산물은 아니며, 오히려 권력에의 무비판적 순응이 역사의 진화를 가로막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나이가 들자 도살업자에 팔려가 죽임을 당한 말 복서는 비판의식 없는 어리석은 충성심의 상징이다. 한나 아렌트의 주장처럼 악은 대중들의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사유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될 수 있고, 대중의 침묵은 결과적으로 체제에의 동조로 작용한다.

 


또한 오웰은 악성 프로파간다와 날조된 사실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대중을 분열시키는 과정에도 주목했다. 나치정권의 선전장관 괴벨스를 연상시키는 스퀼러는 공산당의 기관지였던 프라우다를 상징한다. 대중을 선동의 대상으로 여긴 괴벨스는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며, 대중은 작은 거짓말 보다는 큰 거짓말을 잘 믿고 이는 곧 '진실'이 된다는 말을 남겼다. 러시아어 프라우다는 역설적이게도 '진실'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스퀼러의 존재는 과거는 객관적 진실의 영역이 아니고, 기록의 조작과 기억의 통제를 통해 왜곡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동물평등을 규정한 불가침의 7계명에 대한 기록을 날조하고, 이에 대한 기억마저 왜곡시켜 결국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 보다 더욱 평등하다."라는 단 하나의 계명만이 남는 과정 속에는 항상 스퀼러가 있었다. 대중의 기억을 말살하고 조작하기 위해서 스퀼러는 과거를 지우거나 왜곡하고, 각종 궤변과 공포를 이용한 선전·선동전술을 사용하였다. 오웰의 풍자는 의제설정을 통한 여론통제와 사실 왜곡을 일삼는 언론, 거짓이 사실을 압도하는 가짜뉴스 (fake news)와 탈진실 (Post-truth)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오웰은 구성원들이 건전한 비판의식을 가진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지식인의 역할도 강조했다. 그는 대중에게 객관적 사실이 충분히 제공되는 것만으로도 편견과 오판을 줄이고 독재체제의 등장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오웰은 소설 '1984'에서 '보편적 기만과 거짓이 지배하는 시대에 진실을 말하고 사실을 수집하는 것 자체가 혁명적 행동'이라고 표현하였다. 결국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독재와 전체주의 체제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거짓 선동과 사실의 말살이며,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양심의 자유와 거짓을 정화하고 진실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개인의 자유도 지켜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위하여 동물들의 힘으로 건설한 동물농장은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장원농장 (The manor farm)으로 회귀하고 동물들은 다시 노예상태로 전락한다. 나폴레온을 비롯한 돼지들은 이웃 농장주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고 카드놀이를 하며 술을 마신다. 그 광경을 지켜본 농장의 동물들은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구분 조차할 수 없었다. 자본과 권력을 대변하는 이들 지배층들은 영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명백한 사실은 지배계층은 결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을 호위하는 ""들이 아니라 의심의 순간에 대중들을 침묵시키며 그들의 지배를 단단하게 유지시키는 우둔한 ""들이며, 비판의식 없이 지배당하는 ""들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완벽할 수 없고, '사람' 그리고 ''은 이념만으로 결코 재단할 수 없다. 항상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생각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 과감히 저항하는 용기가 중요한 이유이다. 부패한 권력의 파티가 무르익어가는 그날 저녁, 농장의 동물들이 밤하늘 속에서 절망적인 어둠이 아닌 빛나는 무수한 별들과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희망을 보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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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28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압제자나 이단자가 되지 않은 혁명가는 죽임을 당한 혁명가뿐이란 말이 생각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잭와일드 2021-11-28 23:06   좋아요 1 | URL
네 같은 의미로 알베르 까뮈도 모든 혁명가는 압제자 (oppressor)나 이단자 (heretic)로 끝난다고 한 것 같아요.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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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근대 이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였던 통치체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계기로 국민국가체제로 재편되었다. 찰스 틸리는 국민국가 확산의 핵심원인을 전쟁에서 찾는다전쟁을 준비 또는 회피하기 위해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투입할 수 있는 체제가 바로 국민국가라는 것이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전쟁을 일으키는 반복 속에서 국민국가의 위상은 강화되었고, 대부분의 인간은 태어나면서 국가에 소속된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국민국가에는 태생적으로 폭력성과 강제성이 내재되어 있다. 국가의 경계가 바뀔 때마다 주변부의 인간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가의 틀 안으로 끌려들어가거나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 과정에서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 디아스포라다. 저자는 디아스포라를 전쟁, 식민지배, 노예무역 등 외적인 이유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으로 정의한다. 삶의 기반은 일본에 있지만 민족적으로는 조선인이고 한국국적을 보유한 저자의 모어는 일본어이다. 저자는 모어가 과거 식민지배자의 언어라는 것, 태어날 때부터 본래 모어여야할 한국어를 빼앗긴 상태라는 것을 늘 거북하게 의식하며 살았다. 이처럼 디아스포라들은 어떠한 역사와 구조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분열되어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항상 막연한 불안과 긴장을 강요당해왔다. 디아스포라적 삶의 궤적이란 자신의 아이덴티티로부터 일방적인 추방과 부정, 정체성 분열과정을 거치며 빚어진 수세대에 걸친 삶의 일그러짐을 의미한다.



"식민주의는 타자의 계통적 부정으로 피지배 민족을 절박한 지경까지 몰아넣어 진정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도록 만든다." (p. 105)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왜 여기에 있는가?'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관통하는 질문이다.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의 의미는 국민국가의 틀 안의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기반이 있으며,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조국이자 고국이며 모국인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국 (선조의 출신국), 고국 (자기가 태어난 나라), 모국 (현재 국민으로 속해있는 나라)의 삼자 분열로 국민국가를 넘어선 저 어딘가에서 자신의 근원을 찾아야 하는 디아스포라에게 국민의 의미는 전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이상적인 모국은 모든 형태의 부조리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디아스포라들이 언어도, 문화도, 국민으로서의 체감도 없는 모국의 국민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다. 이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운명에 저항하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실존에 관한 것으로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속한 문화를 거슬러 자기 내부의 역사를 발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구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벨기에에 입양된 미희 나탈리 르무안느가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에 한국 출신 입양아가 베트남풍 모자를 들고 등장한 이유는 당시 작가 자신도 한국과 베트남의 문화 차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이력을 국가, 인종, 문화를 둘러싼 차별과의 싸움으로 규정한다.



이 책은 저자의 디아스포라적 시선을 통해 탄생했다. 디아스포라적 시선이란 다수자들이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 불편한 진실에 대한 소수자들의 문제제기를 말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디아스포라적 예술가들은 주변인으로서 갖는 이중, 삼중의 마이너리티적 속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경험과 기억, 욕망을 다루고 있다. 문승근의 활자구에는 뿌리도 없고 토대도 없다. 외적인 힘에 굴복하여 굴려지면서 흔적을 남기는 활자구는 마치 작가의 디아스포라적 삶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쇼니바레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 이미지나 미적 취향의 역사성, 정치성을 폭로하고 있다. 독일인 다수에의 동화와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의 유지, 양자간의 갈등은 펠릭스 누스바움 예술의 모티프가 되었다.



"나는 근대 국민국가의 틀로부터 내던져진 디아스포라야말로 '근대 이후'를 살아갈 인간의 존재형식이 앞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 6)



월드컵은 전세계 다양한 참가국간의 국가대항전이라는 형식으로 인해 '국가' '민족'이 가진 특성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2018년 월드컵 결승전은 다인종 프랑스와 단일민족 크로아티아간의 싸움이었다. 크로아티아가 백인 슬라브계 단일민족으로 팀을 구성한 반면, 프랑스는 자국의 포용적 이민정책을 대변하듯 엔트리의 23명중 21명을 이민자 출신으로 채웠다. 경기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인종 갈등을 녹여낸 세대와 인종 갈등 속에서 자라난 세대간의 경쟁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승리를 지켜보며 나는 에르네스트 르낭을 떠올렸다. 르낭은 민족이란 공동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이미 희생하였거나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인간들로 구성된 거대한 결속이라고 하였다. 또한 르낭은 민족 창출의 근본적 요소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주장한다.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망각과 용서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민족은 기억이 아닌 망각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의 존재형식에 대한 가능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함께 하는 삶을 위한 자발적 희생과 기억을 이겨낸 용서는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위로하고 인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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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유령 방과후강사 이야기
김경희 지음 / 호밀밭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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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는 사전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노동자의 정의가 이렇다면 나도 노동자로서 살아온 세월이 꽤나 길다고 할 수 있는데, 내가 노동자임을 인지하고 노동자에게 행해지는 차별과 불합리에 대해 의식화한 기간은 생각 보다 짧았던 것 같다. 그러한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 중 하나는 잡지 <꿀잠>을 만난 것이다. <꿀잠>10개 언론사의 기자 20명의 재능기부로 탄생한 비정규직을 위한 특별잡지다.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잡지라는 슬로건처럼 노동자들의 삶과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잡지 판매수익금 또한 비정규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한다고 알고 있는데, 아쉽게도 현재는 발간되지 않고 있다.



<꿀잠>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건 가벼운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을 때였다. 첫 페이지는 잡지 속 화려한 광고에 익숙해진 내게 어쩌면 무심코 넘겨질 페이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잘 차려입은 여성 모델들의 모습은 충분히 눈길을 끌만한 것이었지만, 별다른 특별한 것이 없는 광고라고 생각했고, 광고의 대상 또한 내 관심 분야가 아닌 여성복이었기 때문이다.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가락을 주저하게 만들었던 건 여성모델의 사진 아래에 남겨진 글이었다.



아름다워요. 또렷하고 밝게 빛납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어둡군요. 흐릿합니다. 누구인지, 왜 거기에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 청소를 하고 계셨군요. 깨끗해야 하는 것을 닦느라 더러워진
당신 손안의 걸레를 이제야 보았습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문구를 읽고 나서 다시 사진을 보았다.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광고를 위해 촬영된 것이 아닌 LED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진 대형 옥외광고물을 찍은 것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에는 문구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나는 발견할 수 있었다. 모델의 밝은 미소를 부각시켜주는 조명판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청소 아주머니가 걸레로 닦고 있는 모습이 불빛에 비춰진 실루엣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광고는 이윤추구를 위해 사람들의 눈을 잡아끌며 상냥한 인사를 건네고 있는 반면 사회의 버팀목인 노동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는 밝은 곳이 잘 보이지만 밝은 조명 안에서 바라보면 어두운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특정부분만을 강조하는 스포트라이트로 인해 땀의 눈물과 소중함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노동으로 일군 삶이야말로 자랑스럽고 떳떳해야 하고, 그 땀의 웃음이 밝고 아름답게 빛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노동이 웃음이 되는 세상, 노동이 보람이 되는 세상을 간절하게 꿈꾼다는 잡지 <꿀잠>의 존재이유와 지향점을 나는 첫 페이지만으로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한 장의 사진만으로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이 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잡지 <꿀잠>은 내게 '당신의 노동은 안녕한가?'라고 묻고 있었다.



유령이라는 말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방과후강사는 특수고용직 또는 프리랜서 직군이라 노동자로서의 법적인 신분 보장을 못 받는다는 의미도 있다.” (P. 114)



방과후강사 김경희가 쓴 <꿈꾸는 유령>을 읽으며, <꿀잠>의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의 충격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학교라는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수면 밑에 그처럼 다양한 업무형태가 존재했었고, 그 중 40%가 넘는 종사자들이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나는 솔직히 알지 못했다. 사회가 주목하는 대상들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낮추며 암묵적인 희생을 견디고 있는 노동자들이 학교라는 공간에도 있다는 걸 <꿈꾸는 유령>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무엇 보다 가슴 아픈 건 에세이의 제목이기도 한 꿈꾸는 유령이라는 표현이었다. 방과후강사들은 마치 유령처럼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노동을 수행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은, 복도를 서성이는 유령이 된 기분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자신이 지도한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이 아닌 정규직 교사의 이름으로 대회에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육을 위해 종사했지만, 방과후학교 박람회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숱한 인내가 필요하다. 또한 특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꿈을 꾸는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키며, 더 나이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P. 191)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국정과제 1로 추진했지만, 비정규직은 늘어나고, 정규직 일자리는 감소하는 등 고용의 질은 오히려 더 퇴보하는 모양새다. 이러한 현실에서 희망은 무엇일까? 저자 김경희는 꿈을 꾸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믿음을 아직 놓지 않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실천과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바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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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1-11-27 2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쭈욱 글 읽었는데 글 잘 쓰십니다. 밑의 핫뮤직 페이퍼는 저 십대때 월간 팝송 잡지 생각도 나고.. 잭와일드님의 글을 오늘 첨 읽었고 첨 알었습니다. 글 많이 쓰셨는데.. 여적까지 모르고 있었네요. 반갑습니다. 저도 님의 글 읽으니 더 분발해야겠어요~

잭와일드 2021-11-28 18:5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11-27 2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공적 논의와 개인적 노력이 만나는 곳, 그 경계는 어디쯤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잭와일드 2021-11-28 19:00   좋아요 1 | URL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과정이 많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