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자 효과로도 불리는 ‘제노비스 효과 (Genovese effect)’는 사건에 대한 목격자가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되어 개인이느끼는 책임에 대한 부담이 적어져, 피해자를 도와주지 않고 방관하게 된다는 심리현상을 일컫는 용어이다. ‘제노비스 효과’라는 명칭은 1964년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 사건’에서 비롯됐다. 뉴욕 퀸즈에 거주하던 키티 제노비스가 자신의 아파트 근처에서 칼을 든 강간범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38명의 살인 목격자 중 아무도 경찰을부르지 않았다 (Thirty-Eight Who Saw Murder Didn’t Call the Police.)”라는 헤드라인을 낸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따르면 제노비스는 세 차례나 칼에 찔렸다. 새벽 3시15분, 첫 비명을 들은 아파트 주민들은 지켜만 봤다. 목격자 중 누군가가 그만하라고 소리치자 범인은 도망쳤다. 쓰러진 제노비스를 아무도 돕지 않자 범인은 돌아와 피해자를 또 찔렀다. 비명 소리에 아파트 창문들의 불이 켜지자 범인은 다시 도망갔다. 제노비스가 힘겹게 아파트 안쪽으로 기어가는 순간 범인은 또 다시 나타나 한번 더 찌르고 몹쓸 짓까지 저질렀다. 사건을 목격한 사람은 38명이었지만 누구도 피해자를 돕지 않았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제노비스는 이미 숨져 있었다.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사건의 실상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세 차례 폭행이 35분간 이어지는 동안 피해자를구조하지 않은 현실에 ‘냉혹한 도시’, ‘사라진 시민정신’, ‘인간성의 소멸’ 등의 후속 보도가 잇따랐다. 보도에 따르면 범인이 사라졌을 때 38명의 목격자 중 어느 누구라도 그녀를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면 그녀는 살 수 있었다. 사건에 대한 보도의 파급효과가 커짐에 따라 ‘제노비스 신드롬 (방관자 효과)’이라는 새로운 심리학 용어가 생겨났다. 제노비스 사건은 ‘다원적 무지 이론’과 함께 아직도 범죄심리학의 주요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제노비스 신드롬 (방관자 효과)’는 일반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자의 주위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와줄 확률은 낮아지고,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더 길어진다는 의미를 담은 용어다. 이는 목격자가 많다보니,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도움을 주겠지 하는 심리적 요인 때문인데, 이렇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가리켜 심리용어로 ‘책임분산’이라고 한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제노비스 사건’은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긴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 것을 단순히 개인의 성격적인 측면으로 해석하기보다 사회적 상황 요인을 고려해 해석해야 함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제노비스 사건에는 기막힌 반전이 숨어 있었다. 사건에 대한 충격으로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던 피해자의 남동생이 끈질긴 진실 추적 결과 당시 사건의 실제 목격자는 6명이었고 이중 2명이 경찰에 신고했다는 사실을 2007년에 밝혀낸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2016년이 되어서야 오보를 인정하는 사과 기사를 냈다. 정작 당시 오보를 낸 당사자였던 사건 데스크는 연이어 제기되는 의혹을 부인한 채 편집국장·칼럼니스트 등으로 승승장구하다 오보가 완전히 드러나기 직전인 2006년 사망했다. 사건의 범인도 2016년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어쩌면 ‘제노비스 사건’의 진정한 시사점은 사회나 주변 상황 요인이 방관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방관은 그 자체로 구조적인 악을 창출해낸다는 것 아닐까? 애초에 38명의 방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 사건의 목격자는 38명이 아닌 6명이었고 이들 중 2명이 경찰에 신고를 했다. 하지만 거대언론들은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극적인 기사를 내고보도와 보도로 인한 파급효과에 대한 책임에 대해 외면했다. 당시 특종 욕심에 눈이 먼 기자는 확인되지 않은 경찰의 이야기를 기사화하였고, 사건 한달 후 경찰이 목격자는 6명이었다고 최종수사결과를 발표했지만 뉴욕 타임스는 정정기사 조차 내지 않았다. 제노비스 사건의 방관자는 누구였을까?

임가비 작가의 <혐오스러운 방관자>를 읽으며 제목의 ‘혐오스러운’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생각했다. 소설에서 선미는 3번의 방관을 한다. 학창시절 왕따 피해자인 친구 ‘민수’를 외면했던 것, 성형외과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시절 진료 중 환자들을 성폭력의 제물로 삼았던 의사를 방관했던 것, 살인범의 사전 범행을 목격했음에도 눈감았던 것이 그것이다. 선미가 행한 3번의 방관에서 선미는 사건에 대한 거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학창시절에는 ‘민수’의 처지를 이해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며, 성형외과에서는 유일한 목격자는 아니지만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몇 안되는 목격자였고, 공익제보를 한 간호조무사에 의해 사건이 수면위로 드러난 이후에도 자신의 일상에 피해를 준 공익제보자를 원망한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마지막 사건에서도 절실하게 도움을 구하는 피해자를 외면하고 만다. 아마도 작가는 상황적 요인에 의해서가 아닌 진실 앞에 눈을 감고 책임을 외면하는 ‘제노비스 사건’의 진정한 방관자를 염두에 두고 ‘혐오스러운’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을까? 


브릿G 작품소개 <혐오스러운 방관자>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np_id=262588&novel_post_id=11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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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산으로 2020년 프로야구의 시계도 한동안 멈춰있었지만 한국프로야구는 지난 5월 5일 무관중으로 개막하였고, 일본과 미국 리그도 개막이 가시화되고 있어서 야구팬으로서는 참 반가운 요즘이다. 엄성용 작가의 <크리스 데이비스처럼>은 프로야구가 개막을 맞아 브릿G 야구 소설을 모아놓은 큐레이션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 부제인 ‘소녀와 노인은 친구가 되었다.’처럼 이 소설은 은퇴후에 별다른 소일거리 없이 TV로 프로야구중계시청을 유일한 낙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노인과 이러한 노인의 일상에 뛰어들어 온 이웃집 소녀와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야구’는 베일에 가려진 은퇴 전의삶을 뒤로 하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무뚝뚝한 노인과 한없이 사랑스럽고 친절한 소녀가 우정을 쌓는 매개체가 된다. 소녀는 메이저리그를 좋아하고 노인은 한국프로야구를 좋아한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야구라는 스포츠를 좋아한다는점에서 그들은 한 마음이 된다.

소설을 읽으며 제목이 왜 <크리스 데이비스처럼> 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재 메이저리그에 실존하는현역 선수인 크리스 데이비스는 작품 전개에 주요 모티프로 작용하고 있다. 재미 있는 것은 메이저리그에 크리스 데이비스라는 이름을 가진 선수는 2명으로 그들의 묘한 관계가 작품에서 잘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내야수인 크리스 (Chris)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외야수인 크리스 (Khris)가 그들인데, 이들은 동명이인에 타율 보다 홈런, 타점으로 승부를 거는 거포형 선수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둘의 영혼이 바뀐 게 아니냐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로 두 선수의 전성기와 타격 사이클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0cm에 100kg이 훌쩍 넘는 볼티모어의 크데 (크리스 데이비스)에 비해 180cm에 90kg 남짓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크데는 메이저리그에서는 드물게 왜소한 체격을 가지고 있지만, 하드웨어적 열세를 극복하고 40개 이상의 홈런을 치는거포로 성장한 선수이다. 즉,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크데는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 볼티모어의 크데와 이름만 같은 ‘짭데‘였다가 이를 실력으로 극복하고 등명해나가면서 ‘참데‘, ‘찐데‘ 라는 타이틀을 쟁취한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다. 소설에서 힘든 현실 속에서도 엄마와 함께 긍정적인 마인드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소녀는 메이저리그의 ‘크데‘를 보며 희망을 키워나간다.

 

“원래 엄청 못하는 선수였는데, 갑자기 홈런을 뻥뻥 치는 거예요! 이름이 같은 선수가 또 있는데, 그 선수는 다른 팀 홈런왕이어서 맨날 비교당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완전 역전!”

“정말 좋아하는가 보구나.”

“네. 저도 그럴 수 있잖아요.”


이렇게 나이답지 않게 성숙하지만 맑고 투명한 소녀다움을 잃지 않고 있는 ‘공주‘에게 찾아온 비극을 지켜보는 독자들은한층 더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크리스 데이비스 처럼>은 노인과 소녀, 비극, 복수 등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클리셰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전개과정을 지켜보는 묘미를 느낄수 있는 단편이다. 작년 54타수 연속 무안타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역대 최장 연속 타수 무안타라는 불명예 기록을 수립한 볼티모어의 크데는 올해 시범경기에서 3경기 연속홈런을 치는 등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코로나 사태 발발로 리그 전체가 중단된 상황이니 삶은 참 아이러니한 것 같다.



브릿G 작품소개 <크리스 데이비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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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권리를 찾기 위한 안내서
김지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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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사회는 원칙의 공정성과 절차의 공정성이 준수되는 사회이다. 사회 구성원이 합의하여 만든 게임의 규칙이 존재해야하고 그 룰을 통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공정한 혜택의 기회가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원칙의 공정성을 뒷받침해줄 투명한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사회는 공정한 사회일까? 불행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듯 하다. 개인의 노력 보다 사회경제적 배경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점점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헬조선', 'N포세대', '수저계급론' 등 늘어나는 신조어는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헬조선'과 함께 거론되는 '노오력'이라는 신조어도 있다. '노력''노오력'은 다르다. '노력'이 달성가능한 목표를 위해 개인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노오력'은 개인이 달성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목표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목표를 달성할수 없는 사회구조 안에서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그것을 개인의 능력과 태도, 열정의 부족으로 돌리는것... 이것이 '노오력'의 실체다.

 

우리가 바라보는 사회는 공정함 보다는 인종과 국가, 성별, 문화 등에서 기인한 수많은 차별로 얼룩져 있다. 각자가 처한개별적 삶의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과 그것이 누적되어 이루어지는 역사와 사회구조에 좌우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수자들이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 불편한 진실에 맞서소수자로서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살리며 세상을 향해 작지만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는 과정 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에서 저자 김지윤은 사회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는 약자와 소수자, 비주류들에 관한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른바 방 안의 코끼리 (Elephant in the room)’ 문제다. ‘방 안의 코끼리'는 누구나 문제라는 걸인식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쉽게 언급하지 못하는 무겁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 ‘코끼리사회라는 안에 자리잡고 있는 그동안 해결되지 못한 채 누적되어 온 남겨진 숙제를 의미한다. 강제 물리력 행사와 수많은 유인책 등에도 방안에 들어앉아 꿈쩍하지 않는 코끼리를 보며 사회의 주류들은 이를 애써 외면한채 코끼리의 행동반경에서 벗어나 살아가지만 비주류들은 사회의 최일선에서 코끼리로 인해 초래되는 위험과 불편들을 온몸으로 떠안으며 살아간다. 책에서 사회 비주류로 언급되는 건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경제적 빈곤층 등이다. 사회로부터 외면 받고 소외받는 이들은 다양한 시각과 기준으로 분류되었지만 소수자적 위치, 마이너리티라는 공통점을 내포하고 있다. 저자는이를 인지하면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성운동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을 다음과 같다.

 

이 사회는 성공에 핀 조명을 맞추고 이를 몇 백배 빛나는 스토리로 만든다. 왜 그러냐고? 알파걸의 성공은 화려한 승전으로 남지만, 취약 계층 여성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은 여봐라 내놓을 수 있을 만큼 눈부신 기록으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P. 51)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통계 숫자 보다 더 중요한건 차별과 성희롱으로 인해 마트 창고에서 눈물 흘리는 여성이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니던가.” (P. 53)

 

저자는 여성운동이 폭넓은 공감대와 당위성을 갖는 것은 사회에서 여성이 가진 소수자적 위치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은 물리적 숫자로 보면 당연히 소수가 아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기 때문에 사회적 소수자다. 따라서, 여성이 존중받고 차별받지 않는 공동체를 꿈꾸면서 다른 소수자 집단을 차별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운동이 아니라 기득권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권리확장의 문제보다 시급한 것은 기본적 인권 보장과 확보라고 주장한다. , 더 많은 여성이 기득권 집단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권과 관련된 차별로 인해 고통 받는 여성이 없도록 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처럼 여성운동은 몇몇 알파걸들의 유리 천장 깨기가 아니라 수많은 봉순이 언니들이 함께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생각한다. 유리 천장을 부수고 올라간 찬란하게 빛 나는 소수를 위해서 아직도 대다수의 여성들은 바닥에 쏟아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며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에의 <개인적 체험>에서 버드는 말한다. “분명히 이건 나 개인에게 한정된,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이야.” 그렇지 않다. 장애인의 문제는 개인적인 체험이 아닌 사회적인 체험이다.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P. 102)

 

장애인을 둘러싼 차별을 바라보는 시각도 여성운동을 바라보는 시각과 연장선상에 있다.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 만큼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점철된 것도 없을 것이다. 저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정체성은 장애로 모든 것이 규정되어버리는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특성은 장애 앞에서 빛을 잃는다. 왜냐하면 그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한 개인이 가진 수많은 장점과 특성은 장애라는 한 특성에 모조리 뒤덮여 버리고 만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로부터 일방적인 추방과 부정, 정체성 분열과정을 거치며 일상이 무너지고 삶이 일그러지는 고통을 받는다. 이런 부정할 수 없는, 부정하기 힘든 현실로 인해 장애인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외면받게 된다. 저자는 사회는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 그 누구도 고립되고 소외받지 않게 하는 기본적인 책임이 있으며 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해야만이 장애가 개인적 체험이 아닌 사회적 체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빈곤층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동일하다. 저자는 비만의 문제를 경제적 계급의 문제로서 분석한다. 비만은 단순히 개인적인 음식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 가정환경에서부터 사회구조 및 경제 계급의 차별에서 기인한 측면도 있다는 의미에서다.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 살수록 아동 청소년 비만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저자의주장을 보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문제는 변화한 시골 풍경이 아니라 비만의 사회 구조화라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할수 밖에 없었다. 경제소득의 불균형으로 인해 비만이 생겨나고, 비만으로 인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다리가 사라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닌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구든 여러 가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무거운 정체성이 자신이 사회적 강자인지 아니면 약자인지를 결정하게 한다.” (P. 126)

결국,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정체성 중 어느 정체성이 자신을 가장 잘 규정한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나는 주류도 될 수 있고, 비주류도 될 수 있다.” (P. 8)

 

당신은 주류인가? 비주류인가?” 이는 저자의 중요한 문제제기이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사회 정치적 환경과 이슈들은우리를 이 같은 질문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든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강자일지라도 성정체성이나 신체적 특성 등 우리를 대변하는 다른 정체성에 관한 문제제기에서는 소수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이중, 삼중의 마이너리티적 속성을 갖고 있다. 저자가 결국 정답은 사회 구조의 변화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이고 이를 위해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어떤 시민 운동이든 성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외연 확장과 외부로부터의 지원이다. 저자가 여성의 권리는 곧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인권 보장과 확보를 주장했듯이 방안에 있는 코끼리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차별로 괴로워하는 서로 다른 소수자 집단에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연대해야 한다. “우리가 중대한 일에 대해 침묵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종말을 고하기 시작합니다. 결국에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적들의 말이 아닌 친구의 침묵이 될 것입니다."라는 마틴 루터 킹의 말처럼 말이다.

 

헤겔은 인류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뿐이라고 일갈한바 있다.” (P. 251)

 

세상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어쩌면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가시화되고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선의로 포장된 무례가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공정한 사회로 가는 길은 하나일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과 삶이 다르므로 각자의 삶에 말을 걸고 삶의 사소한 부분부터 변화에 대한 의지를 불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의 작은 순간들이 누적되어 한 사람의 일생을 구성하듯 세상의 변화도 생각보다 작은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착취와 억압 없이 삶 그 자체가 빛나는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에 불러일으킨 새로운 바람들이 당신은 조용히 세상을 흔들 수 있다.”는 간디의 말을 증명해낼 수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조류를 거슬러서 배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건 이러한 바람들이 존재하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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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뇌 창비세계문학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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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가 밝힌 창비세계문학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독자들이 창비의 세계문학을 통해 다른 시공간에서 우리와 닮은 삶을만나고, 가보지 못한 길을 걸으며, 그 길 끝에서 새로운 길을 찾길 바라는 것이다. 또한 무한경쟁에 내몰린 젊은이와 청소년들이 문학을 통해 삶의 소중함과 기쁨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획의도를 감안하면 창비가 세계문학 시리즈의 첫 시작을 여는 책으로 왜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선택했는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괴테의 초기 명작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지만 사실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반복되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독일어 발음과 동떨어진 베르테르라는 잘못된 표기가 계속해서 통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한 불멸의 고전으로서 앞으로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힐 것이 분명한 이 작품을 위해 창비는 새롭게 해석한 번역판을 내놓으며 관습에서 탈피하여 독일어 원어의 발음에 가까운 베르터로 바로잡았다.

 

한국에서는 주인공 이름의 표기를 둘러싸고 약간의 혼동이 존재하긴 하지만 모든 청년들은 베르터처럼 사랑하기를 원했고, 모든 처녀들은 로테처럼 사랑받기를 원했다.”는 저자 괴테의 말처럼 소설이 탄생한지 2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소설의 주인공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절대적 사랑을 갈망하는 순수한 영혼과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로서, 또 사회모순을 직시하는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로서 청년들의 영원한 상징으로서 남아 있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괴테가 25세의 나이에 쓴 첫 소설로 친구의 약혼녀를 사랑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소설은 편지글의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의 내밀한 생각과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한남자의 순수성과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데서 오는 절망과 상실감,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와 편견에서 오는 모멸감을 감수하는 모습들은 베르터를 보다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며, 독자들이 베르터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베르터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노란색 조끼와 푸른 연미복을 입고 있다. 괴테는 세계적인 대문호이자 정치가였지만 빛과 색채를 연구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저술한 <색채론>에서 색의 근원을 노랑과 파랑 두가지로규정하고 있다. 노랑은 가장 빛에 가까운 색이고 파랑은 가장 어두운 색이기 때문에 이 두가지 색의 조화는 빛과 그림자, 힘과 나약함, 포용과 분리를 상징하며 두 가지 색의 공존 자체가 역동적인 의미를 생성하는 근원이라는 의미에서다.

 

삶의 아포리즘을 내포한 여타의 고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살아가면서 이러한 괴테의 생각에 공감하게 되는 순간들을 많이 맞이했던 것 같다. 베르터의 열정적 사랑이 금빛 물결이 되어 흘러가다가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여 저 푸른 심연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삶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 이러한 삶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은 무엇일까? 나는 베르터의 고백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랑, 이러한 충직함, 이러한 정열은 결코 문학으로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랑은 우리가 교양이 없고 거칠다고 일컫는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살아 있다. 그 반면 교양이 있다는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구일 뿐이다!” (p. 134)

 

베르터는 "내가 아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으니, 유일하게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이 마음뿐"이라 말한다. 로테를 향한 자신의 마음의 열정과 진심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베르테르의 순수함과 진정성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유념해야할 진리이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가 세대를 거듭하면서 청춘의 고전으로서 빛을 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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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페미니즘 선언
낸시 프레이저.친지아 아루짜.티티 바타차리야 지음, 박지니 옮김 / 움직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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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행동주의 페미니즘, 그 첫 걸음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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