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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근대 이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였던 통치체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계기로 국민국가체제로 재편되었다. 찰스 틸리는 국민국가 확산의 핵심원인을 전쟁에서 찾는다. 전쟁을 준비 또는 회피하기 위해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투입할 수 있는 체제가 바로 국민국가라는 것이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전쟁을 일으키는 반복 속에서
국민국가의 위상은 강화되었고, 대부분의 인간은 태어나면서 국가에 소속된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국민국가에는 태생적으로 폭력성과 강제성이 내재되어 있다. 국가의 경계가 바뀔 때마다 주변부의 인간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가의 틀 안으로 끌려들어가거나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 과정에서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 디아스포라다.
저자는 디아스포라를 전쟁, 식민지배, 노예무역
등 외적인 이유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으로 정의한다. 삶의 기반은 일본에 있지만 민족적으로는 조선인이고 한국국적을 보유한 저자의 모어는 일본어이다. 저자는 모어가 과거 식민지배자의 언어라는 것, 태어날 때부터 본래
모어여야할 한국어를 빼앗긴 상태라는 것을 늘 거북하게 의식하며 살았다. 이처럼 디아스포라들은 어떠한
역사와 구조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분열되어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항상 막연한 불안과 긴장을 강요당해왔다. 디아스포라적 삶의 궤적이란 자신의 아이덴티티로부터 일방적인 추방과 부정, 정체성
분열과정을 거치며 빚어진 수세대에 걸친 삶의 일그러짐을 의미한다.
"식민주의는 타자의 계통적 부정으로 피지배 민족을 절박한 지경까지 몰아넣어 진정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도록 만든다." (p. 105)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왜 여기에 있는가?'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관통하는 질문이다.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의 의미는 국민국가의 틀 안의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기반이 있으며,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조국이자 고국이며 모국인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국 (선조의
출신국), 고국 (자기가 태어난 나라), 모국 (현재 국민으로 속해있는 나라)의 삼자 분열로 국민국가를 넘어선 저 어딘가에서 자신의 근원을 찾아야 하는 디아스포라에게 국민의 의미는 전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이상적인 모국은 모든 형태의 부조리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디아스포라들이
언어도, 문화도, 국민으로서의 체감도 없는 모국의 국민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다. 이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운명에 저항하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실존에 관한 것으로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속한 문화를 거슬러 자기
내부의 역사를 발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구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벨기에에 입양된 미희 나탈리 르무안느가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에 한국 출신 입양아가 베트남풍 모자를
들고 등장한 이유는 당시 작가 자신도 한국과 베트남의 문화 차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이력을 국가, 인종, 문화를 둘러싼 차별과의 싸움으로
규정한다.
이 책은 저자의 디아스포라적 시선을 통해 탄생했다. 디아스포라적 시선이란 다수자들이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 불편한 진실에 대한 소수자들의 문제제기를 말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디아스포라적 예술가들은 주변인으로서 갖는 이중, 삼중의
마이너리티적 속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경험과 기억, 욕망을 다루고 있다.
문승근의 활자구에는 뿌리도 없고 토대도 없다. 외적인 힘에 굴복하여 굴려지면서 흔적을 남기는
활자구는 마치 작가의 디아스포라적 삶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쇼니바레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 이미지나 미적 취향의 역사성, 정치성을 폭로하고 있다. 독일인 다수에의 동화와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의 유지, 양자간의 갈등은
펠릭스 누스바움 예술의 모티프가 되었다.
"나는 근대 국민국가의 틀로부터 내던져진 디아스포라야말로 '근대
이후'를 살아갈 인간의 존재형식이 앞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 6)
월드컵은 전세계 다양한 참가국간의 국가대항전이라는 형식으로 인해 '국가'와 '민족'이 가진 특성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2018년 월드컵 결승전은 다인종 프랑스와 단일민족 크로아티아간의 싸움이었다. 크로아티아가 백인 슬라브계 단일민족으로 팀을 구성한 반면, 프랑스는
자국의 포용적 이민정책을 대변하듯 엔트리의 23명중 21명을
이민자 출신으로 채웠다. 경기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인종 갈등을 녹여낸 세대와 인종 갈등 속에서
자라난 세대간의 경쟁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승리를 지켜보며 나는 에르네스트 르낭을 떠올렸다. 르낭은 민족이란 공동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이미 희생하였거나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인간들로 구성된 거대한 결속이라고
하였다. 또한 르낭은 민족 창출의 근본적 요소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주장한다.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망각과 용서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민족은 기억이 아닌 망각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의 존재형식에 대한 가능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함께
하는 삶을 위한 자발적 희생과 기억을 이겨낸 용서는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위로하고 인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