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1 -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함지은 북디자이너 / 열린책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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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죽음>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가브리엘 웰즈로 추리소설 작가다그가 소설 상에서 직면한 상황은 조금 특별하다어느 날 아침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그 동안 고민해오던 신작 소설의 첫 문장에 대한 영감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극중 작가인 가브리엘 소설의 첫 문장이자 동시에 이번 베르베르 소설의 첫 문장이기도 한 그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누가 나를 죽였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브리엘은 자신은 죽었고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조차 모르는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이렇게 그가 선택한 첫 문장은 그 자신이 풀어내야 하는 질문으로 바뀌게 된다가브리엘은 추리소설 작가로서 수많은 트릭을 설계해왔지만이제 희생자인 동시에 수사의 주체로서 과거 자신의 삶을 토대로 범인을 추리하여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해야 한다가브리엘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영매(靈媒) ‘뤼시 필리피니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죽인 사람을 찾고자 한다용의선상에 오른 것은 4명이다그에게 재결합을 요구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해 앙심을 품었을지 모를 옛 연인 사브리나’, 자라면서 서로를 밀어내게 된 쌍둥이 형 토마 웰즈’, 그의 죽음으로 이득을 얻을 편집자 알렉상드르’, 그의 작품을 쓰레기로 치부하며 증오심을 드러냈던 비평가 장 무아지가 그들이다.


소설은 누가 날 죽였지?’라는 첫 문장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서 범인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범죄의 희생양이 되어 저승에 있는 영혼이 이승에 있는 영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자신을 죽인 범인을 찾는다는 독특한 설정과 용의자들에 대한 검증을 통해 점차 진실에 다가가는 추리소설의 형식은 소설에의 몰입도를 높이는 요소들이다하지만 작가 베르베르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세계 속에서 추리에 집중하던 독자들은 이 소설이 전형적인 추리소설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퀴블러 로스의 이론대로 처음에는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분노를 표출했던 가브리엘이 타협과 수용의 과정에 다다른 것처럼 범인이 누구인지와 살인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집중했던 독자들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점차 작가 베르베르가 던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으로 눈을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원제는 <Depuis l'au-dela>로 프랑스어로 저승으로부터라는 의미이고영문판 제목 ‘From Beyond’는 저 너머로부터로 해석된다그에 반해 한국어판은 다소 직설적으로 죽음을 제목으로 선택하였다베르베르가 사후세계와 영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타나토노트>, <나무>, <등 그의 전작들을 지켜봐 온 팬들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사후세계나 영혼은 그동안 소설이나 영화로 많이 다뤄졌던 만큼 신선한 소재는 아니지만베르베르는 남들이 터부시되는 주제를 피하지 않고 응시하면서 빛나는 상상력으로 미지의 세계를 탐구해왔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이번 소설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중학교 중간고사 기간에 <개미>를 처음 접한 이래로 나는 베르베르가 쌓아올린 세계를 즐겁게 탐험하는 베르베르 키즈였기 때문이다.


"죽음 뒤에 또 다른 삶이 이어지는지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확실한 것은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이용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르베르의 신작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참석했던 강연에서 나는 그의 죽음에 대한 철학을 들을 수 있었다. ‘신은 존재할까영혼이란 무엇이고사후세계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누구나 쉽게 떠올리지만 그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아직 인류가 탐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 생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삶은 한번뿐이라는 사실이다누구에게나 단 한번 주어지고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삶은 소중한 것이다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생의 마지막 단계인 죽음에 대해 성찰하면서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삶의 마지막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현재의 삶에 더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살아있는 순간순간을 온전하게 살아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책은 <죽음>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이를 통해 베르베르는 우리에게 삶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삶이 내포하고 있는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 '누가 나를 죽였지?'로 시작했던 가브리엘의 질문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지? (1권 57)’와 마지막 순간에 얻은 깨달음을 가지고 죽은 자들이 더 살 수 있다면... (1권 58)’을 거쳐 나는 왜 태어났지? (2권 313)’로 진화한다가브리엘의 첫 질문 '누가 나를 죽였지?'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나는 어떠한 형태로 죽음을 맞이했고왜 그러한 마지막을 맞이했던 것이지?’일 것이다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그가 돌아본 것은 자신의 삶이었다결국 어떻게 죽었는지 혹은 죽어야 하는지의 문제는 어떻게 살아 왔는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로 귀결된다이와 관련하여 베르베르는 연명치료로 대표되는 현대의학으로 변질되는 삶의 의미에 대해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멈추는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지도 못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1권 212)

나는 살아 있고 당신들은 죽었다.” 필립 K. 유빅』 -


삶을 하나의 여정으로 본다면 죽음은 스토리를 매듭 짓는 마지막 종착지라고 할 수 있다나만이 할 수 있는 나레이션으로 내가 마침표를 찍는 것인데현대의학은 나레이션의 주체를 의사와 가족으로 바꾸어 놓았다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인지본인의 선택은 고려되지도 않은 채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연명의료를 통해 삶을 물리적으로 연장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베르베르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우리는 과연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우리 삶의 주체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 죽음을 통해 을 제시하고자 하는 베르베르가 우리에게 전하는 또 하나의 메시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 가브리엘은 가장 근원적이면서 신비로운 질문 나는 왜 태어났지?’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이는 떠돌이 영혼이 된 가브리엘이 새롭게 쓰려는 소설의 첫 문장이자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다또 베르베르의 차기작 <판도라의 상자>가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본 소설을 통해 삶의 종착지인 죽음에 대해 논했던 베르베르가 출생에 대해서는 어떤 통찰력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죽음>은 베르베르의 자전적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베르베르처럼 프랑스의 장르문학 작가로 묘사되고 있는 가브리엘은 베르베르가 자신을 소설 속에 투영시킨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가브리엘의 소설 제목 <죽은 자들>이 베르베르의 소설 <>의 제목을 불어의 문자적 유사성에 기반한 패러디라는 것만 봐도 베르베르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가브리엘은 대중에게는 호평을 받는 반면에 주류 문학계에서는 저평가되고 있는 베르베르의 상황을 대변하는 듯하다. ‘장 무아지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문단은 순문학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장르문학의 존재가치를 폄하한다가브리엘의 독자가 많은 건 대중이 좋은 문학에 대한 안목이 없기 때문이며장르문학은 상상의 소산일 뿐 진짜 문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맞서 문체 중심의 문학과 상상력 중심의 문학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것이라는 가브리엘의 주장은 폐쇄적인 문단을 향한 베르베르의 외침이다베르베르는 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시도되는 모든 노력들은 존중받아야하고 오히려 문학을 획일화하려는 어떠한 관점이나 시도도 허용 되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이러한 베르베르의 문학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는 자신의 죽음을 자각한 가브리엘 웰즈가 이제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이후 환생과 영혼으로 남는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영혼으로 남아 글쓰기를 계속 하는 선택을 내리는 대목에 잘 나타나 있다.


글쓰기가 나를 구원한다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진정한 나로써 존재하는 유일한 순간이다오직 이 공간에서 만큼은 사건을 뒤따라가는 게 아니라내가 그것들을 창조해낸다.” (2권 185)


베르베르는 자기반성도 빼놓지 않는다아이디어는 훌륭하지만 엄격함섬세한 심리 묘사가 부족하다'는 코난 도일의 지적 (2권 96~97)과 '건조한 문체직설적인 본론과 반전 없는 결말'을 언급한 메트라톤의 지적 (2권 282)은 베르베르가 냉철한 자기평가를 통해 드러낸 자신의 치부인 동시에 문학적 발전을 위한 그의 의지표명이다좋은 문학이란 무엇일까? 삶에 대한 아포리즘을 기반으로 시간의 선택을 받아 세기를 뛰어넘는 고전이 된 책? 상상력을 통해 동시대인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는 책?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가브리엘은 영혼이 되어 깨달은 여섯 가지에 대해 회상한다그것은 인간의 삶은 짧으며 선택은 결국 우리 스스로 내리는 것이라는 것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것만물의 변화를 인위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는 것 등이었다변화하고 움직이는 만물 중에는 좋은 문학에 대한 기준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좋은 문학이란 어떤 것인지 이 자리에서 단언할 순 없지만 적어도 문단의 획일화된 기준 보다는 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는 시도를 하고 있는 가브리엘 혹은 베르베르이 그 진실에 가까운 위치에 있을 거라 확신한다.


사람은 어릴 때 받은 사랑만큼 사랑할 수 있는 거라고 말했어요우리가 어릴 때 부모한테 받은 뽀뽀가 마치 포커 칩과 같아서어른이 되어 사랑이라는 포커 게임을 할 때 그걸 쓸 수 있다고 했어요어릴 때 받은 포커 칩이 많을수록 게임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1권 94)


가브리엘이 마지막으로 깨달은 것은 모든 삶은 유일무이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완벽한 것이며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지금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며 오직 이 삶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었다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 된다그러한 순간순간들이 모여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베르베르의 소설을 읽고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주말 저녁 행복한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힘겨운 삶 속에서 내가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가족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이것 이상의 응원이 있을까각자가 가진 삶의 조각들이 가족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조각(One Piece)으로 완성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행복 아닐까? 아직 한창 어리광 피울 나이의 딸에게 보내는 내 진심과 사랑이 아이의 앞으로의 삶에 큰 자산이 되길 바란다그리고 딸과 함께 베르베르의 소설들을 읽고 토론하게 될 가까운 미래를 상상한다벌써부터 그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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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24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특히 마지막 두 문단이 참 와닿아요.
가족과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분위기도요. 배르베르의 이 소설은 제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리뷰 참 좋아 댓글 드리고 책도 담아갑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잭와일드 2021-11-28 19:02   좋아요 0 | URL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Book] 3 1 운동 새로 읽기 [개정판] -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한
3.1문화재단 지음 / 예지(Wisdom)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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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내에서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하나의 민족, 두 개의 한국, 이 민족적 비극의 기원은 무엇일까? 오늘날 북한이 왜 악의 축 (axis of evil), 악당국가 (rouge state)로 불리게 되었고, 남한은 반공주의 속에서 군사 쿠데타에 이은 군부독재를 겪게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과 그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민족적 비극의 근원인 동시에 올바른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한 통일 민주국가 수립이라는 민족사적 과제 달성의 단초이기 때문이다.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엄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최우선으로 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광명정대하게 하라.

3·1 운동 기미독립선언서 - 공약 삼장

 


집회 횟수 1,548, 집회 인원 2,046,938, 사망자 7,509, 부상자수 15,849, 수감자수 46,306.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기록된 3·1운동의 규모와 피해상황이다. 일본의 폭압적 진압도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열망을 막을수는 없었다. 만세운동의 열기는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로 퍼져나갔다.

 


내 손톱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해 순국한 유관순 열사가 남긴 말이다.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단편적 사건들의 단순 합이 아니라 시대를 구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소들의 총체인 동시에 이들이 빚어낸 유기적 결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3·1 만세운동의 진정한 주역은 어쩌면 민족과 국가를 위한 진심을 보이고 사라져간 민중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유관순들이었다. 민중이란 특정 계급이나 계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국가와 사회를 이 루며 역사를 구성하는 유동적인 계급, 계층의 연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민중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학생, 노동자, 농민, 상인들은 당시 시대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보지는 못했지만, 민족의 앞날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행동하였고, 이를 통해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위대한 힘의 존재기반은 민중에게 있으며, 이는 핍박과 분열, 갈등이 빚어낸 시대의 소음 속에서 일순간에 타오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날의 3·1 운동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바로 윌리엄 터너의 명화 <전함 테메레르>.

 


영화 <007 스카이폴>에는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나이가 들어 노쇠한 스파이 제임스 본드가 한 점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쓸쓸한 뒷모습을 여과 없이 노출하며 그가 바라본 그림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였다. 테메레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에 조국을 구하고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영웅이었다.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flagship) 빅토리호를 구하고 두 척의 배까지 나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은퇴의 기로에 선 스파이는 그림 속 범선을 보며 세월의 무게와 시대의 변화를 읽었던 것일까? 인간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처절하고 애잔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새삼 놀라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있다.

 


윌리엄 터너와 그의 대표작 <전함 테메레르>'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를 대신하여 2020년부터 영국 20파운드 지폐의 새로운 모델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전함 테메레르>BBC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영국 그림으로 꼽히기도 했다. 터너와 그의 작품 <전함 테메레르>가 영국인들에게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트라팔가 해전 승리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의 중앙에는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기함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1838년 영국 해군은 테메레르호를 런던의 운수업자에게 팔아넘겼고 배를 산 운수업자는 배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템즈 강가로 산책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다.



트라팔가에서 테메레르는 넬슨 제독의 생명을 구하진 못했지만 조국 영국을 구했다. 테메레르의 빅토리호 구원이 없었다면 19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아닌 저물어가는 일몰이었을지도 모른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르도 있었다고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그를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1919년 고통스럽고 핍박 받는 현실 속에서도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응답했던 사람들, 그들의 정신, 투쟁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이들이다. 그들은 일제에 협력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집안을 일으켰으며, 해방후에도 단죄되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다. 진정한 역사 바로잡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중들, 수많은 유관순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녀의 몫도 있을까? 우리는 윌리엄 터너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들을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정신과 투쟁, 숭고한 희생은 <전함 테메레르>가 되기 충분하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이름 없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201610월 광화문을 밝힌 촛불은 20174월까지 이어졌고, 오히려 전국 150여개 시군으로, 전세계 31 개국 71개 도시로 퍼져나갔다. 누군가는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고 했지만, 1,700만여개의 빛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을 이끌어내며 찬란하게 빛났다. 독일의 공익정치 재단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에 참여한 우리 국민을 2017'에버트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특정 국가의 국민이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상이 제정된 이래 최초의 사례였다. 재단은 민주적 참여권의 행사와 평화적 집회의 자유는 생동하는 민주주의의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에 집회에 참여한 모든 분들을 대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3·1 운동의 정신은 아직 살아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그들의 후손으로서 꺼지지 않는 촛불로 세상의 진보를 이루어나아가고 있다. 쉽사리 변하지 않는 사회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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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천 개의 고원을 만나다 - 들뢰즈-가타리와 만난 대중지성 청년의 철학-생활 에세이
고영주 지음 / 북드라망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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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천개의 고원을 만나다>의 저자 고영주는 <천개의 고원>을 읽고 이를 자신의 삶과 연관하여 글을 쓰고, 이를 묶어 책으로 펴냈다. <천개의 고원>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쓴 철학서다. 이들은 무의식과 욕망의 관점에서 사회 배치를 분석하고 절대불변하는 진리를 부정하고 다양체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행위도 이러한 관점으로 분석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언제나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을 포착해내고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 그를 가려낸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집단이더라도, 가족이든 다른 뭐든 간에 나아가 그 사람에게 고유한 무리들을 찾아내고 그가 자기 안에 가두어 놓고 있는, 아마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그의 다양체들을 찾아낸다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오랫동안 기다려 온 둘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 또는 딸로 세상에 태어난다. 또 가족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고 마침내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 또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 가정이란 단어를 정의한다면 한 가족이 함께 살아가며 생활하는 사회의 가장 작은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 가정은 인간이 태어나 하나의 인격체로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사회적 동물로 진화하기 위한 최소 단위의 생활 공동체인 것이다. 가정은 정형화할 수 없기 때문에 형태와 구성은 제각각이자만 하나의 가정은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으로 하나의 우주적 세계를 이룬다.

 

내 아이가 눈을 뜨고 나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순간, 처음으로 지은 미소, 첫 걸음마, 처음으로 말을 한 순간... 이는 내가 자식으로서 부모님과 공유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내가 부모로서 앞으로 내 딸과 공유해갈 기억들이기도 하다. 앞으로 나와 내 가족은 삶의 어떤 순간순간들을 공유하며 추억을 만들어나갈까?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사랑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지 결코 빠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또한, <청년, 천개의 고원을 만나다>을 읽으며 아이가 성장하면서 더 많은 기회와 선택을 통해 더 많은 고유한 본성을 찾아내주는 것 또한 부모의 역할이자 진정한 사랑을 이루는 행위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인간이 자기 마음속에 자신만의 특별한 부모, 양육자의 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현실의 부모가 부재하거나, 부모와 아이가 너무 달라서 서로 이해하기 어렵거나, 부모가 정신적, 정서적 자원이 부족해 아이를 양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자신들 내면의 양육자 상을 통해 에너지를 보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양육자 상이 주로 모성의 이미지인 것은 기술적이고도 역사적인 한계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의 주장처럼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돌봄과 육아의 이론은 존재하지 않듯이 그것은 모성의 이미지도, ‘부성의 이미지도 될 수 있고 그보다 훨씬 더 기상천외하고 다양한 이미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 고영주가 추석에 직접 장작을 피우고, 돌판을 옮겨 고기를 구워 제사를 준비하면서 명절의 딱딱한 환경이 낭만적인 캠핑의 리듬으로 재탄생되었던 사례를 보며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제사의 본질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은 것아닐까? 그 사람이 현재는 죽고 없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제사를 지내는 행위도 많은 부분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결혼 이전에 돌아가셔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시댁 어르신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수많은 음식을 준비하는 것, 제사를 지내기 위한 준비는 대부분 여성들이 도맡아서 하는 것들 말이다. 삶의 다양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천개의 고원>을 읽고 나서 제사를 지내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 생각났다. 얼마 전 읽었던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에 등장하는 사례가 마침 떠올랐던 것이다.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 시선으로부터 중 -

 

<시선으로부터>에서 제사는 고인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가족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며 추모를 하는 행위로 묘사된다. 이것이 저자 고영주가 언급한 리토리넬로아닐까? 바로 차이반복을 통한 시공간의 재구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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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러시 - 우주여행이 자살여행이 되지 않기 위한 안내서
크리스토퍼 완제크 지음, 고현석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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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위대한 개츠비 -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항상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인간은 현재의 삶을 딛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저마다 개별적 삶을 살면서도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를 이루고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는 과정을 거쳐 역사를 이루며 발전하는 인간의 삶이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별자리는 저마다 거리와 밝기가 다른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또한각각의 별들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제각기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하지만 별들은 인간의 가시거리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별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해내지 못하고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군집된 별자리로 인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도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직선적 사건이 아닌별자리처럼 시공간이 뒤섞인 원심형의 배열에 가깝다. 동시대에서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또 누군가는 현재를 넘어 미래를 향해 있는 것은 인간이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Kronos)' 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 (Kairos)'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꿈꾸고 호흡하게 하는 두 번째 심장이다상실과 결핍몰이해라는 인간의 현실적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의 삶이 군집을 이룬 채 살아가는 별들과 서로 닮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예전부터 우주를 대상으로 하는 SF 소설을 좋아했다. 현실에서 느끼는 상실감과 결핍에서 벗어나 저 반짝이는 아득한 공간을 향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또한, 세월의 흔적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SF 소설의 주인공들도 저마다가 직면한 세계에 맞서 살아가는 우리와 똑같은 존재라는 동질감도 느낄 수 있었다. SF가 그리는 미래의 어느 시점은 그 아득한 시간의 간극이 걷히면 또 다른 우리의 모습으로 남는다언젠가 우리도 현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한 누군가와또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존재와 공존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TO INFINITY AND BEYOND!)”

 

우리가 바라는 모든 꿈은 계속할 용기만 있다면 모두 이루어진다고 말한 월트 디즈니의 말을 대변하듯이 디즈니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에서 버즈 라이트이어는 무한한 공간 저 너머를 향한 꿈과 희망을 설파하고 있다.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는 집단적 경험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맨 오브 라만차에서 보았듯이   사람만 믿는 이야기일지라도  꿈이 강렬하고 진실하기만 하다면 꿈은 공유되고 전파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반대로 고리끼의 희곡 밑바닥에서는 희망은 누구에게나 절실한 것이지만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장밋빛 희망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밑바닥 삶들 앞에 어느 날 찾아온 노인은 희망이 되지만 노인이 사라진 후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이들은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서 꿈과 현실의 간극만큼의 충격을 안고 이전보다 더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때로는 희망도 어떤 이들에겐 독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절망은 '헛된 희망'을 동반하는 것이다.

 

우주기술과 우주탐사는 미래파의 도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지금, 그리고 여기의 문제인 것이다.” (p. 365)

 

아이직 아시모프 이후 우주탐사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스페이스 러시>우주 여행이 자살 여행이 되지 않기 위한 안내서라는 부제처럼 우주라는 공간을 냉철한 시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책이다. 현시점에서 인류가 확보한 과학기술을 통해 어떤 것이 가능하고, 어떤 것은 다소 문제가 있으며, 어떤 것은 그저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SF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허황된 희망들, 예를 들어 워프 속도로 여행하는 텔레포트 (순간이동)이나 테라포밍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의 환경을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것) 등을 통해 지구 밖에서 지구 보다 호화롭게 살 가능성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NASA의 수석작가로도 활동한 저자 크리스토퍼 완제크는 지구에 야기되고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는 곧 위험이 닥칠 거라는 생각 때문에 지구를 떠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스페이스 러시>라는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정부간 체제의 우월성을 가리는 경쟁의 무대에서 벗어나 민간 기업들이 우주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며 경쟁하는 뉴 스페이스의 시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류가 물에 다리를 놓고 하늘에 길을 냈듯이 언젠가는 인류가 자연스럽게 우주로 진출해 진화를 향한 대담한 첫 걸음을 내딛을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시점을 기준으로 본다면 인간의 우주탐사는 지구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의 인류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테드창의 소설 <거대한 침묵>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한 앵무새들이 인류에게 “잘 있어사랑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지만 무심한 인류는 이마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지성을 가진 외계 생명체를 찾기 위해 광대한 우주를 향해 고정되어 있는 아레시보 전파 망원경에만 귀를 기울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이처럼 우리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편견과 집착에 사로잡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거나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트럼프의 아르테미스 계획의 허황됨을 비판하면서 현재의 지구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우주를 바라봐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보며 지식의 최대 적은 무지함이 아니라 허황된 지식이라는 스티븐 호킹의 말이 떠올랐다저자가 <스페이스 러시>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에 떠밀리지 말고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아닐까그것이 비록 광속이나 워프 항법의 속도에 한참 못 미치는 저속이라고 하더라도 그 방향만 정확하다면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그곳에 매번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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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 고종의 밀사 헐버트의 한국 사랑 대서사시
김동진 지음 / 참좋은친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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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 2019년은 2 8 독립선언과, 3 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였다. 2019년에 나는 100년의 그 때처럼 동경 재일본 한국 YMCA에서 열린 2 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191928일 그렇지. 그땐 우리에게는 오직 독립뿐, 좌도 우도 없었다.'

 


기념식에서 2 8 독립선언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나라 잃은 식민지 청년들의 독립을 향한 순수한 열망을 느꼈다. '사람', 그리고 ''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시각만으로는 결코 재단할 수 없는 것이고, 여기서 벗어나야만 '사람', ''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린 언제부턴가 이를 잊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2019년은 이념에서 벗어나 '사람', ''을 향한 진심을 보여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Homer B. Hulbert) 박사의 7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헐버트 박사의 70주기를 기념하여 헐버트 박사 기념 사업회 회장인 김동진씨는 헐버트 박사의 일대기를 정리한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를 발간하였다. 이전에도 김동진씨는 최초의 헐버트 평전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과 헐버트 박사의 논문 57편을 우리말로 옮긴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를 저술한 바 있다.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는 한국은 물론 미국과 일본에 남아 있는 헐버트 박사의 드러나지 않은 행적을 추적하여 그의 생애를 총괄적으로 정리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3 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국민 참여 기념사업' 도서로 선정하였다.

 


헐버트 박사는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 '육영공원'의 교사를 역임한 교육학자였고,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한 한글학자였다. 또한, 최초의 종합역사서이자 근대 역사학의 출발점으로 평가 받는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와 한민족의 역사, 문화, 생활상을 집대성하고, 을사늑약의 부조리를 표출한 '대한제국의 종말(The Passing of Korea)'를 저술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헐버트는 YMCA를 탄생시킨 선교사이자 계몽주의자이기도 했다. 헐버트는 YMCA는 선교를 넘어 교육, 계몽을 포괄하는 사회단체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헐버트가 기초한 한국 YMCA 헌장의 핵심내용은 'YMCA의 목적은 교육, 계몽, 선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한국인들을 위해 싸울 것이다. 그들은 모든 권리와 재산을 빼앗겼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대변할 것이다." (P. 325)

 


헐버트 박사가 남긴 여러 행적들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한국인들 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는 건 헐버트 박사를 대표하는 수식어처럼 그의 모든 행적 저변에 깔려 있는 한국과 한민족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단순한 사랑을 전하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헐버트는 그의 일생을 걸고 투쟁했다. 맹목적으로 한자만을 고집하던 사대부들의 보수성에 맞서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하며 한글 전용을 주장했고, 주권침탈의 야욕을 드러냈던 청나라, 러시아, 일본에 한국을 대변하여 맞섰다. 이를 위해 언론을 통해 고국인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한국과 한민족의 사회 문화적 우수성을 알렸다. 헐버트 박사가 1889년 한글의 우수성을 뉴욕트리뷴지에 기고하며 한글의 자모를 최초로 소개했다는 사실과 을사늑약 저지를 위해 고종 황제와 전보를 주고받았다는 기사(뉴욕타임스)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처음 공개하는 사실들이다. 또한, 헐버트 박사는 을사늑약의 무효화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위한 고종 황제의 특사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의 역사는 투쟁과 부역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고통스럽고 핍박 받는 현실 속에서도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응답했던 사람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했던 이들이 있었던 반면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이들도 존재했다. 한국인들마저 국가와 민족에 반하는 삶을 택한 엄혹한 시기에 한국에 아무런 의무가 없는 한 이방인에 불과했던 헐버트 박사는 어떻게 자신과 가족의 삶까지 희생하며 이렇게까지 한국과 한민족을 위해 행동할 수 있었을까? 한민족의 한과 얼이 서려 있는 구전 민요 '아리랑'의 가사를 최초로 채록하고 서양 음계로 채보한 사람이 헐버트 박사라는 사실은 그 진실의 조각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원칙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는 헐버트가의 가훈으로부터 형성된 그의 인간애가 한국과 한민족 특유의 '()'을 만나 언어와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 아닐까?

 


헐버트는 자신이 보유한 다양한 학문에 대한 스펙트럼을 한국에 기꺼이 공유해주었고,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한국의 시대적 아픔에 공감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헐버트 박사는 올바른 가치관의 형성도 중요하지만 그 가치관을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그의 삶을 통해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헐버트의 삶에 대해 1909년 안중근 의사는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라고 말했고, 그의 사후 7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저자 김동진은 "헐버트야말로 조선의 척박한 현실을 마다 않고 한민족에 동화한 진정한 한민족의 벗이자, 바른 삶의 좌표를 행동으로 제시한 가치관적 영웅이었다."고 응답하고 있다.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단편적 사건들의 단순 합이 아니라 시대를 구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소들의 총체인 동시에 이들이 빚어낸 유기적 결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의 진정한 주역은 어쩌면 민족과 국가를 위한 진심을 보이고 사라져간 민중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민중들이 아닐까? 민중이란 특정 계급이나 계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국가와 사회를 이루며 역사를 구성하는 유동적인 계급, 계층의 연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민중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학생, 노동자, 농민, 상인들은 당시 시대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사건이나 교육을 계기로 민족의 앞날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행동하였고, 이를 통해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내었다. 이렇게 교육 및 계몽을 통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위대한 힘의 존재기반은 민중에게 있으며, 이는 핍박과 분열, 갈등이 빚어낸 시대의 소음 속에서 일순간에 타오른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 이들이 있었다. 푸른 눈의 한국인, 한국인 보다 한국과 한민족을 더 사랑했던 헐버트 박사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 헐버트 박사의 삶이 갖는 의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바로 윌리엄 터너의 명화 <전함 테메레르>.


 

영화 <007 스카이폴>에는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나이가 들어 노쇠한 스파이 제임스 본드가 내셔널 갤러리에서 한 점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쓸쓸한 뒷모습을 여과 없이 노출하며 그가 바라본 그림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였다. 테메레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에 조국을 구하고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영웅이었다.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flagship) 빅토리호를 구하고 두 척의 배까지 나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은퇴의 기로에 선 스파이는 그림 속 범선을 보며 세월의 무게와 시대의 변화를 읽었던 것일까? 인간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처절하고 애잔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새삼 놀라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있다.

 


윌리엄 터너와 그의 대표작 <전함 테메레르>'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를 대신하여 2020년부터 영국 20파운드 지폐의 새로운 모델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전함 테메레르>BBC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영국 그림으로 꼽히기도 했다. 터너와 그의 작품 <전함 테메레르>가 영국인들에게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트라팔가 해전 승리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의 중앙에는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기함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1838년 영국 해군은 테메레르호를 런던의 운수업자에게 팔아넘겼고 배를 산 운수업자는 배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템즈 강가로 산책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다.



트라팔가에서 테메레르는 넬슨 제독의 생명을 구하진 못했지만 조국 영국을 구했다. 테메레르의 빅토리호 구원이 없었다면 19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아닌 저물어가는 일몰이었을지도 모른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르도 있었다고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그를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중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들의 몫도 있을까? 헐버트 박사는 그의 생전 소망대로 서울 마포 양화진에 묻혔다.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이었고, 이듬해인 1950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또한, 20137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고, 2014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과 2015년 서울아리랑페스티벌, 1'서울아리랑 상'에 추서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그에 대한 예를 다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윌리엄 터너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를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의 정신과 투쟁, 숭고한 희생은 <전함 테메레르>가 되기 충분하다. 헐버트 박사는 자랑스러운 우리 과거의 일부분인 동시에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이름 없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웨스터민스터 사원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헐버트 박사는 이제 한국인의 가슴 속에 묻혀 영원히 불멸의 생을 이어갈 것이다. 이것이 우리 한국인들이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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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1-11-22 0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을 축하하러 오시지 않았다면 조금 더 오래 가족 곁에 머물러 사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정말 한국인들은 그를 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잭와일드 2021-11-22 09:52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당시 80대 후반의 고령이셨고, 여독까지 겹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