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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유령 방과후강사 이야기
김경희 지음 / 호밀밭 / 2021년 4월
평점 :
'노동자’는 사전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노동자의 정의가 이렇다면 나도 노동자로서 살아온 세월이 꽤나 길다고 할 수 있는데, 내가 노동자임을 인지하고 노동자에게 행해지는 차별과 불합리에 대해 의식화한 기간은 생각 보다 짧았던 것 같다. 그러한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 중 하나는 잡지 <꿀잠>을 만난 것이다. <꿀잠>은 10개 언론사의 기자 20명의 재능기부로 탄생한 비정규직을 위한 특별잡지다.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잡지라는 슬로건처럼 노동자들의 삶과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잡지 판매수익금 또한 비정규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한다고 알고 있는데, 아쉽게도 현재는 발간되지 않고 있다.
<꿀잠>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건 가벼운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을 때였다. 첫 페이지는 잡지 속 화려한 광고에 익숙해진 내게 어쩌면 무심코 넘겨질 페이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잘 차려입은 여성 모델들의 모습은 충분히 눈길을 끌만한 것이었지만, 별다른 특별한 것이 없는 광고라고 생각했고, 광고의 대상 또한 내 관심 분야가 아닌 여성복이었기 때문이다.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가락을 주저하게 만들었던 건 여성모델의 사진 아래에 남겨진 글이었다.
"아름다워요. 또렷하고 밝게 빛납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어둡군요. 흐릿합니다. 누구인지, 왜 거기에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 청소를 하고 계셨군요. 깨끗해야 하는 것을 닦느라 더러워진
당신 손안의 걸레를 이제야 보았습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문구를 읽고 나서 다시 사진을 보았다.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광고를 위해 촬영된 것이 아닌 LED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진 대형 옥외광고물을 찍은 것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에는 문구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나는 발견할 수 있었다. 모델의 밝은 미소를 부각시켜주는 조명판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청소 아주머니가 걸레로 닦고 있는 모습이 불빛에 비춰진 실루엣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광고는 이윤추구를 위해 사람들의 눈을 잡아끌며 상냥한 인사를 건네고 있는 반면 사회의 버팀목인 노동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는 밝은 곳이 잘 보이지만 밝은 조명 안에서 바라보면 어두운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특정부분만을 강조하는 스포트라이트로 인해 땀의 눈물과 소중함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노동으로 일군 삶이야말로 자랑스럽고 떳떳해야 하고, 그 땀의 웃음이 밝고 아름답게 빛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노동이 웃음이 되는 세상, 노동이 보람이 되는 세상을 간절하게 꿈꾼다는 잡지 <꿀잠>의 존재이유와 지향점을 나는 첫 페이지만으로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한 장의 사진만으로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이 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잡지 <꿀잠>은 내게 '당신의 노동은 안녕한가?'라고 묻고 있었다.
“유령이라는 말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방과후강사는 특수고용직 또는 프리랜서 직군이라 노동자로서의 법적인 신분 보장을 못 받는다는 의미도 있다.” (P. 114)
방과후강사 김경희가 쓴 <꿈꾸는 유령>을 읽으며, <꿀잠>의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의 충격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학교라는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수면 밑에 그처럼 다양한 업무형태가 존재했었고, 그 중 40%가 넘는 종사자들이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나는 솔직히 알지 못했다. 사회가 주목하는 대상들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낮추며 암묵적인 희생을 견디고 있는 노동자들이 학교라는 공간에도 있다는 걸 <꿈꾸는 유령>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무엇 보다 가슴 아픈 건 에세이의 제목이기도 한 “꿈꾸는 유령”이라는 표현이었다. 방과후강사들은 마치 유령처럼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노동을 수행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은, 복도를 서성이는 유령이 된 기분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자신이 지도한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이 아닌 정규직 교사의 이름으로 대회에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육을 위해 종사했지만, 방과후학교 박람회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숱한 인내가 필요하다. 또한 특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꿈을 꾸는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키며, 더 나이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P. 191)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국정과제 1호’로 추진했지만, 비정규직은 늘어나고, 정규직 일자리는 감소하는 등 고용의 질은 오히려 더 퇴보하는 모양새다. 이러한 현실에서 희망은 무엇일까? 저자 김경희는 꿈을 꾸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믿음을 아직 놓지 않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실천과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바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