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스
타리에이 베소스 지음, 정윤희 옮김 / 살림Friends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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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는 서른일곱 살 남자다. 몸은 성인이지만 지적 장애로 인하여 그의 내면은 어린아이다. 그런 그를 돌보아야하는 것은 마흔 살의 누나 헤게다.

누나 헤게는 마티스에게 끊임없이 일자리를 찾으라고 종용을 한다. 마티스의 상태를 알고 있는 헤게가 마티스를 밖으로 내몰고 마티스를 무엇인가 하라고 자꾸 압박하는 것은 마티스에게 돈을 벌길 바란다는 것보다 인간으로서 놀고만 살수는 없으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라는 말일 것이다.

누나에게 내몰려 밖으로 나와 일자리를 찾아보지만 그에게 일자리를 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설혹 일자리를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마티스에게 주어진 일을 보통의 사람들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결과에 주인도 마티스도 실망을 한다. 마티스에게 ‘한 번의 도전은 한 번의 실패’를 의미한다. 장애를 가지고 있으므로 실패에 무심할 수 있으면 차라리 좋으련만 불행히도 마티스는 자신이 남들보다 뒤쳐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들과 똑같이 하고 싶은데 안 된다는 것, 결과를 보고 사람들은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는 것을 마티스는 안다. 그래서 기가 죽고 누나에게도 면목이 없다. 

어떤 일에 대한 시도가 실패로 끝나는 일이 거듭되자 마티스는 무언가 시도하는 게 겁이 난다. 틀릴까봐, 제대로 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면서 누나에 대한 미안하다. 마티스의 심정이 어떻든 헤게는 그 나름대로 입장에 의거 마티스가 세상에 나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티스는 익숙한 사람, 익숙한 세상을 향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시도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이 무서워 자신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만 찾고 세상을 향하여 나가는 게 겁이 나 죽을 것만 같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운 마티스는 상대적으로 주변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 하나하나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 의미부여가 평범한 사람들의 사고 같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사고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불필요한 일에 대한 집착처럼 보인다. 멧도요새에 대한 일이나 벼락 맞은 포플러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그 증거다.

마티스와 헤게 나무로 불렸던 포플러 나무 중 한그루가 벼락에 맞자 마티스는 전전 긍긍한다. 혹시 벼락 맞은 나무가 마티스라고 불리는 나무가 아닐까 불안하다. 불안함에 근거로 없이 벼락 맞은 나무가 헤게의 나무로 치부하면서도 누나가 자기만 두고 죽지 않을까 겁도 난다. 마티스가 정규 호수의 정규 뱃사공으로 일을 나갔다가 자신의 첫 손님이자 마지막 손님인 벌목꾼을 데리고 집에 왔는데 그 벌목꾼이 자신의 집에 머물면서 누나는 늦은 나이지만 이성에 눈을 뜨게 된다. 누나의 변화에 불안을 느낀 마티스는 누나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벌목꾼이 누나를 빼앗아 갈지도 모르겠다. 누나로부터 버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마티스에게 누나와 벌목꾼이 가족으로서 함께 살아가고자 보여주는 작은 시도들이 먹힐 리가 없다. 벌목꾼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하든 그는 이미 누나를 자기로부터 빼앗아 갈 사람일뿐이다. 벌목꾼으로부터 누나를 되찾아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티스는 결국 헤게의 인생에서 자신이 빠져주는 것만이 자기가 할 일이라는 것을 알고 호수로 낡은 배를 몰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렸다. 또 독버섯 사건 이후의 그의 행동과 사고를 볼 때 조금만 더 노력하면 평범한 사람들과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이전과는 다른 사람을 셋이 함께 영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마티스의 선택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3인칭 시점으로 쓰여 진 이 작품은 사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기보다는 섬세한 내면 묘사로 작품을 끌고 가고 있어 묘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일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 머릿속에 마티스는 착하고 여리고 고뇌하는 모습이다. 마티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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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날아든다 푸른도서관 32
강정규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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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규씨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몇 번 빌린 적은 있지만 강정규씨의 작품을 읽은 것은 처음이다. 그의 작품을 처음 읽어 본 독자로의 첫 느낌은 ‘낯섦’이었다. 고향이야기, 분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알겠는데 독자 대상이 무척이나 궁금하게 한 책이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보니 작품은 청소년을 독자 대상으로 잡고 있었다. 청소년이라고 다 같은 독서의 폭과 깊이를 가진 것은 인정 할지라도 과연 이것이 청소년을 독자 대상으로 하는 작품일까 잠시 고민해 본다.  

<새가 날아든다.>는 3부로 구성이 되어 있고 총 7작품이 있다.  

‘구리반지’는 사회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분단으로 인하여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낡은 구리반지를 통하여 전하고 있다. 삼거리 ‘삼거리 국밥집’ 또한 열병으로 앓는 자식의 약을 구하러 왔다가 분단으로 인하여 고향집에 돌아가지 못해 자식과 생이별을 한 후 국밥집 식모살이를 거쳐 국밥집 주인이 되어 몸이 성치 못한 춘자씨를 양딸로 받아들이고 유기견을 거두면서 사는 양순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내가 몸이 성치 않은 춘자를 거두듯 누군가 자신의 몸이 성치 않는 자식을 거두어 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다배 이야기’를 보면서는 늙고 병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다니구치 지로의 <개를 기르다>를 잠시 떠올린다. 둘 다 늙고 병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있는데 두 작가가 풀어가는 방식과 전달하려는 것이 참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가 날아든다’를 보면서는 모 TV 방송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의 해산관을 위해 집 떠난 후에 홀로 남을 남편을 위해 여러 가지 것을 준비하면서 두 노인이 주고받는 대화는 한 폭의 그림 같다. 빨래 줄에 널어놓은 조끼에 딱새가 알을 낳고 부화하기까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손주, 꿩알, 딱새가 새끼 까는 일을 통하여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자연스럽지 않다. ‘낮달’은 순덕이네가 이사를 오면서 이야기가 전개 된다. 이 작품에서는 화자는 병약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순덕이를 통하여 느껴지는 것은 강인함이다. 가진 것은 없어도 그는 마음은 따듯함으로 가득했고 자기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화자보다 두세 살 많고 사춘기에 화자보다 일찍 접어든 순덕과 화자의 의사 놀이, 순덕이가 보이는 성에 대한 관심이 우습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순수함에 미소 짓게 한다. 그러나 전쟁은 사람들의 인생을 비틀어놓는다. 고모나 순덕이의 죽음은 피어보지도 못한 꽃이고 아픔일 뿐이다.

‘뿔떼와 금테’라는 작품은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알 수 없었고 ‘소통’은 작가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분명하지만 사람들을 윽박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사용하고 있는 어휘도 조금은 어렵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작품 전제를 관통하는 것은 고향과 전쟁이다. 작가의 말에서 보면 작품 속의 ‘고향은 단순히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회복 되어야 할 우리네 인간의 본향을 의미’한다고 한다. 적가가 전쟁을 이야기하고 가족을 이야기하는 것은 겪어 본 자, 잃어 본 자의 절규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전쟁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굴절되는지 잘 알고 가족을 잃어 본 자가 가지는 슬픔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작가는 더 가족의 소중함에 집착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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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랑 나랑 함께 살아요! 그림책 보물창고 48
낸시 코펠트 지음, 신형건 옮김, 트리샤 투사 그림 / 보물창고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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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이혼했다. 나는 양쪽 집을 오가며 산다. 엄마가 있을 땐 아빠가 없고, 아빠가 있을 땐 엄마가 없다. 둘이 다 필요할 때도 많은데 일은 그렇게 되어 버렸다. 다행히 나에게는 프레드(강아지)가 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내가 무엇을 하든 프레드는 항상 내 곁에 있다. 나는 프레드와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논다. 내가 행복하면 프레드도 행복하다. 프레드는 내 친구다. 그러나 엄마 아빠에게 나와 함께 있는 프레드는 그냥 프레드일 뿐이다. 프레드로 인하여 오는 불편함에 엄마, 아빠는 ‘더 이상은 못 참아!’,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어!’하고 말을 한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에 대한 아이의 반응

“(프레드로 인하여 곤란하게 해 드려서)죄송해요. 하지만 프레드는 엄마나 아빠랑 함께 살지 않아도 돼요. 프레드는 나랑 살 거니까요!“

띠용~~~~~  

 

엄마, 아빠는 본인들이 헤어지기로 했으니까 헤어진 것이지만 나는 프레드와 헤어질 생각이 없어요. 내가 엄마 아빠가 따로 사는 것에 뭐라고 하지 않았듯이 나와 프레드 사이의 일은 전적으로 우리 둘의 문제예요. 아빠는 프레드와 함께 살고 싶지 않으면 함께 살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내 친구 프레드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함께 했습니다. 나는 프레드와 헤어질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곳이 어디든 내가 가는 곳이면 프레드도 갑니다.  

 

아이는 여전히 엄마, 아빠 집을 오갑니다. 아이가 있는 곳엔 프레드가 있습니다. 프레드는 여전합니다. 그러나 엄마, 아빠가 프레드로 인하여 겪었던 불편함은 많이 줄었습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내가 프레드를 좀 더 이해하고 배려 해준 덕분이죠.  


어느 땐 난 엄마랑 살아요. 어느 땐 난 아빠랑 살아요. 프레드랑 나랑 함께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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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조선을 그리다 푸른도서관 31
박지숙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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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펼쳐 처음 읽는데 어딘가 서 읽은 기억이 난다. 어디지?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김홍도, 무동을 그리다.>에서 읽었구나. 그땐 동화집 속의 중편 형태로 봤던 것 같은데 이제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제목이 약간 바뀌었네!’ 생각하면서 작품의 앞뒤를 살펴보니 김홍도의 그림과 삶을 연작형태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홍도, 무동을 그리다>의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 작품을 읽었을 때의 상황(그때 큰아이가 일본어 자격검정 시험을 볼 때 아이를 기다리며 겨울의 어느 날 추운 운동장에서 걸으며 책을 읽었었다.) 과 작품이 썩 괜찮은 느낌만은 기억을 하고 있다.

<김홍도 조선을 그리다>는 총 다섯 작품 연작 형태로 하나의 작품집을 꾸미고 있다.

‘김홍도 무동을 그리다.’에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도 받고 있으며 자기 그림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김홍도에게 ‘헌 그림이나 그리고 있다, 껍데기다.’라는 광대 아이의 놀림을 받고 광대 주베에 함부로 입놀림을 한다고 책하면서도 그 아이가 왜 그런 말을 할까 곱씹어 생각하는 김홍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천지개벽 서당에서’는 조선이라는 시대가 품고 있는 신분이라는 것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천지개벽 서당은 뜻있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드물게 평민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곳이었다. 양반과 평민이 한자리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경계는 존재했었다. 중인 신분인 홍도는 양반과 평민사이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어정쩡한 신분적 위치였고 잠시 머물다 갈 곳 정도로 여겼기에 생활태도 또한 어정쩡했다. 그러나 과거 노비였지만 속량되어 평민이 된 차돌이의 행동을 보면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게 된다. 적당히 주변의 눈치나 보던 김홍도가 자기 판단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책임을 질줄 아는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도깨비 놀음’에서는 경현당 수작도를 그리게 되었을 때 이야기다. 함께 그림을 그릴 사람을 도화서에서 추천을 했는데 김홍도는 그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화원들의 단점을 들어가면서 부족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과는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며 내쳤다. 차라리 혼자 모든 것을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믿지 못했기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줄 몰랐다. 때문에 혼자 바빴다. 내쳐진 동료들은 욱하는 마음에 홍도를 해코지 하려했다. 그러나 김홍도에게 그림을 구걸하다 거절과 업신여김을 당하던 노파는 필사적으로 홍도를 감싸며 보호하려했다. 노파에게 홍도는 큰일을 할 사람이었고, 자신의 손녀를 구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때문에 그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노파의 행동을 보면서 자기가 정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인간일까 고민하게 된다.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은 연풍현감으로 홍도가 가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오랜 가뭄으로 인하여 살림살이가 곤궁해져 일상적인 삶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빤히 보면서도 그들을 도울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을 내려다보아야만 하는 아픈 현실 앞에서 목민관으로서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고 다른 사람의 곤란함을 이용하여 제 뱃속을 채우려는 양반들의 이기적인 술수를 뻔히 보면서도 어찌 할 수 없는 현실에 애만 끓이는 인간적인 고뇌를 볼 수 있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길’은 김홍도가 늙어 병마와 싸우면서도 아들의 월사금 마련을 하기위하여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아들의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세 번이나 어진을 그렸고 천재화가라고 불렸던 화가가 모아 논 돈 한 푼 없이 늘그막에 병마와 싸우면서 아들의 월사금을 위하여 그림을 그려야한다는 현실이 슬펐다. 자신의 재능을 권력이나 부를 모으는데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의 예술관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책을 덮으면서 작가가 구현하고 싶었던 김홍도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 김홍도’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면 우쭐하고 자신의 재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모습도 작품에서는 분명 보인다. 그는 분명 그림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지만 단점도 많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흐르는 것은 김홍도는 자기반성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인간이다. 스스로를 돌보고 같은 실수를 두 번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의 결과물이 누군가의 창고에서 누군가의 재산을 늘리는 수단이 아닌 모두에게 위안이 될 그런 것이 되길 바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김홍도의 그림을 통하여 그의 마음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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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 폭력과 추방의 시대, 촛불의 민주주의를 다시 묻는다 당비의생각 2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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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은 길었고 치열했고 뜨거웠다고 기억 된다.
매일 밤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여들었다. 지난여름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오닌 사람들은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당면 문제인 교육문제와 광우병 소고기가 수입된다면 제일 먼저 단체 급식으로 제공될 것이고 그러면 자기들은 그대로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는 위기의식에서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먹을 것에 대한 안전성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시작은 그렇게 되었다고 들었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보면 다양한 이야기가 오간다. 사회 전반에 대한 불평,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언론은 주목하기 마련이고 언론의 보도전쟁에 집에 있던 다수는 촛불시위에 참가 하지 않고 집에 있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누군가 ‘당신은 왜 그렇고 있소? 당신도 당신에게도 해당 되는 일 아니요. 당장 촛불 들고 광화문으로 오시오.’ 할 것만 같았다. 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의 외침을 정부는 불평, 불만에 다른 화로 인식을 했다. 얼마간은 화를 내게 했고 얼마간은 화를 부추기기도 했다. 그리곤 기다렸다는 듯 강경진압. 그리고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난여름에 광화문을 밝혔던 촛불집회를 돌아보자는 의미에서 나온 책이다.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들었던 생각은 그 많은 사람들의 그 외침을 정부는 모르쇠 했다는 것이다. 국가의 힘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듣고 배웠는데 그들은 국민이 아니었나? 그들이 말하는 국민과 내가 알고 있는 국민이 다른지 궁금했다. 법이 전하는 의무를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정부는 국민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지 화가 났다.  

촛불집회에서 우리가 보여주었던 비폭력은 우리의 강력한 무기인 동시에 아킬레스건이었다는 주장에는 상당히 공감이 갔다. 스스로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지 않을 것을 안 정부는 사람들의 화를 부추기고 이간질 시키면서 강경무력진압의 시기를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 1년.

촛불시위는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펼쳐 보여주었다. 일부의 사람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문제점을 이야기 해 본적은 있지만 이렇게 광범위하게 우리 안의 이야기를 해 본적이 없다. 표면적으로 우리의 행동은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왜, 어째서?’ 라는 질문을 가지고 돌아 온 사람들에게 ‘여기가 끝인가? 우리는 과연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는가?’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을 할까?

나는 촛불집회에 모였던 다수 중 절반 이상이 생각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리라고 믿는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내면에 어떤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과거의 경험을 돌아보며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생각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에게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묻는다면 그들에게서 우리가 들을 말은 단 하나다. “나는 아직 촛불을 끄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의 촛불은 더 활활 타고 있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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