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발.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 책을 다 매듭을 짓지 못하고 반납하다.  잠시 짬이나 들른 미술관은 미국미술 300년을 전시하고 있다. 나름 규모있는 기획전시라 둘러보며 그림을 담는다. 미국헌법의 기초나 연방제의 구상은 인디언의 것에서 나왔다고 한다. 부족의 운영원리도 뿌리깊은 민주주의 전통에 연유한다고 한다. 박홍규교수의 책이 나왔는지도 몰랐는데 적잖이 놀라고 있다. 운디드니란 책도 언급되고 있다. 19세기 미국은 수많은 실험 공동체를 운영하기도 한다. 작지만 그림 사이에서 그 흔적을 읽으려 애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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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이 흙발로 집안을 뛰어다녀도 어른들은 꾸중하지 않고, 공부하라는 말도 하지 않으며, 특히 체벌이 금지된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그들의 으뜸 신조다. 소로가 "각자가 듣는 음악에 맞춰 소신을 가지고 걷게 하라"고 한 말이 인디언 문화의 핵심적 가치관이다. 각자는 모든 면에서 서로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개인인 동시에 단체의 일원으로 창조된다 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들은 다수의 필요가 개인의 필요를 능가할 수는 있지만 창조의 일차적 목적이 다수의 요구보다 우선하므로 개인과 민족 사이의 균형이 가능하다 고 본다. 민족은 개인을 그 울타리 안에 포함시키거나 배제할 수 있지만 누구에게도 특정한 생각과 행동을 강요할 수 없다.

 

꽃잎 한잎. 

 

 박홍규교수의 인디언아나키즘을 읽고 있다가 덜컥 생각이 턱에 걸려버린다. 각자는 개인인 동시에 단체의 일원으로 창조된다.  개인은 모임의 일원으로 그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다. 어떻게 창조될 수 있을까? 낯선 이 문구에 생각이 걸려 넘어진다. 자꾸 그 생각턱을 돌이켜본다. 모임의 성원으로 창조된다.  다음 밑줄을 더 새겨본다. 다수의 필요가 개인의 필요를 능가할 수 있다. 하지만 창조의 일차적 목적이 다수의 요구보다 우선한다. 새겨보니 창조가 목적이다. 다수의 필요가 일차적 목적이 아니라 창조가 제일 앞자리를 차지한다. 모임의 일원이 아니라 모임에서 창조의 장으로서 시공간이 생겨난 것이라 해석해본다.  모임, 단체의 일원으로 개인은 창조의 시공간이 별도로 만들어져 특별하고 특이한 생각과 행동을 보장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렇게 다시 새겨도 고정관념은 늘 단체의 성원, 단체의 구성원의 위계와 관행에 짓눌려버릴 것이다. 일상에서 개인과 모임, 단체의 간극에 창조란 몸말이 불쑥 씨앗처럼 피어날 수 있을까?  모임, 단체에서 개인은 구성되고 대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다.

 

국가로 발전되기 이전의 대부분의 비정주 수렵 채집민 소집단 사회와 촌락사회에서는 오늘날 같으면 소수의 특권층만이 누리는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보통사람들이 대부분 누리고 있었다. 사내들은 어느 날 어떤 일을 얼마나 할 것인가, 아니면 일을 할 것인가 하지 말 것인가를 스스로 정했다. 여자들도 남자들에게 예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혼자 매일 할 일과 일의 속도를 정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할 일을 할 뿐 어디서 언제 해야 한다는 것을 남이 정하는 일이 없었다. 비켜서서 재어 보고 헤아리는 간부나 감독이나 우두머리 따위는 없었다......남녀 누구에게나 자연의 혜택을 평등하게 나누어 가질 권리가 있었다. 지대도 세금도 공물도 없었으니 그것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일은 없었다.

 

 

꽃잎 두잎.

 

"매일 할 일과 일의 속도를 정했다" 오늘 삼성경제보고서를 보니 힐링이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 근로자들의 상태가 정상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사전조처를 취해야 된다는 말씀이었다. 힐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힐링이 과잉인 시대다. 소프트한 치료만을 발설하거나, 사후 약방문 격이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어떤 일을 얼마나 할 것인가, 아니면 일을 할 것인가 하지말 것이가를 스스로 정했다."  로망일까? 그리고 다시 나에게 되뇌여본다. '일을 할 것인가 하지 말 것인가' 정신병은 사회의 구조를 시간의 뒷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나타난다. 부적응의 농도차이를 보이며 드러난다. 마음의 상처와 병들은 개인의 강도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틀과 뼈대를 고치지 않고서는 치료의 한계를 드러낸다. "혼자 매일 할 일과 일의 속도"를 정할 수 있는 구조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힐링을 원하지 않는다. 잔치가 그리워지고 기쁨을 서로 나누고 싶은 축제가 기다려지고 설레일 것이다.  세상은 남는 것에 경도되어 너무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닌가? 정상적이 일의 궤도란 무엇일까? 몸에 영혼은 붙어있어야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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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발.  메모장 흔적을 살펴보니 지난해 장미꽃 필 무렵이다. 나 - 나너- 나너나 - 우리 - 모임 - 맘 - 뫔 - --  또 다시 닿는 순환을 끄적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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