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먼저 써본다. 대선과 사회운동, 소멸과 탄생, 선거와 사회운동.....키워드들은 하나같이 어색하다.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 결국 제목을 쓰지 못한다. 가까운 지인의 상과 상가에서 만나는 사람들. 드문드문 정황을 듣다가 어찌하지도 못하고 속얘기들을 전하게 된다.

이번 선거에서 사회운동세력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있다면 가장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다르니 틀리다‘고 하는 부류들이 극우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그 극은 반대편과 그리 잘 연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르니 다르다‘가 아니라 ‘다르니 틀리다‘라는 것이 자칭진보세력에게도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치면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헌데 그 보다 더 아무 생각없는 것은 무엇일까? '다르니 틀리다'라고 해서 밥 한끼, 식사 한번 나눈다라는 것은 황송한 일인데다가, 도통 우리모임의 자장만 안중에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삶의 동선에서 일년에 한번도 겹치지 않는, 마음의 동선에서 삼년에 한번도 나누어지지 않는 비진지함들을 곁들인다면 더욱 더 그렇지 아니한가.

 이것도 그렇다고 치자. 선거국면때나 지금 대선에서처럼 서로 인지도 못하면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제도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할 듯이 선거라고 해서 올인하는 모습들이 더 가관은 아닌가? 제도 정치가 모든 것을 소화해낼 것처럼 흠뻑 빠져서, 사회운동이라는 것이 서로 인력이나 있는 것인지? 인지하려고 조차 하지 않은 모습은 어떻게 생각해야하는 것일까? 늘 그래왔으니 그래야 된다고, 다 정책이나 전략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정책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용이 있을까? 또 '다르니 틀리다'로 또 다시 수렴되면서 앙금을 곁들여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도정치의 신화는 이리 굳건한 것인가? 서로 서로 다른 캠프로 활동의 축이 이어지면서 수렴되는 모습들을 보면 제도가 소화시키지 못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또 다시 도드라질 것이다. 이렇게 과도한 책임감과 과다한 알림욕구가 해소되지 않을 경우 어떤 책임들을 지려고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기도 하다.

중력이나 서로인력, 서로자장이 이렇게 제도정치, 선거안에만 있는 것이 바람직하기는 한 것일까? 스스로 한 말들에 발목이 잡혀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제도 밖'을 의식하지도, 무게 중심을 옮기려고도 하지 않는 일이 가장 뼈아픈 것은 아닐까? 또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문제가 생기면 서로 인력도 중력도 잃은 채로 여기저기 난파하거나 난파당한 뒤, 여기저기 스스로 피는 수많은 주체와 운동의 꽃들로 힘을 받고 또 몰려다니다가 또 지지부진해지고, 닻을 어떻게 어디에 내려야 하는지 조차 느끼지 않으려는 것은 아닐까?

될 수 있게 하는 것보다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훨씬 쉽다. 그래서 되지 못하게 하는 감정들을 꿰어서 선동해대기가 제일 쉽다. 스스로 하고, 이것저것 가려내어 되게하고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하지만 그 방향은 멈출 수가 없다. 멈추는 순간, 절반의 포기가 아니라 전부의 포기이기 때문이다. 가장 뼈 아픈 것은 사회운동세력의 자장조차 만들려는 흔적이 사라진 것이 가장 아쉽다. 아니다 스스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조차 지난 겨울을 겪어내고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 더 뼈아프다. 제도정치의 환상에 올인하는 모습은 지나친 낙관만 만들어내어 만일과 만약을 수습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좌냐 우냐 어이없는 선별의 강박은 상하의 파고를 파고들면서 생각하려는 노력도, 운동을 다른 결로 이끌어가려는 배아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다. 아마 십중팔구 좌우의 방향키로는 가긴 가겠지만, 불어오고 몰아쳐오는 상하의 쓰나미를 끈질기게 예상조차 하지 않으려는 관성이 된서리를 맞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대체 어디에 스스로 있는 것인지 가늠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정신차려야 할 것은 퇴행하는 지지자분들만이 아닐 것이다. 그 손가락은 고스란히 안으로 향해야 할지도 모른다.  좌우의 좌표가 아니라 상하의 좌표와 그 물결의 결을 체득하면서 균형을 잡아가는 것일게다. 그렇게 되려면 어떡해야하는 것인가?

볕뉘.

0. ‘왔다‘과 ‘온다‘라는 깃발은 든 이들. ‘올 것이다‘라는 깃발을 든 이들. 나는 이들이 사회운동세력이 아닐 것이라고 본다. 미래를 가져왔고 온다고 말하는 이들을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그보다 지금 바스라지는 것, 바스라지고 있는 것, 바스라질 것에 대한 지독한 관찰력을 가진이들을 믿을 것이다. 사회활동이 이 방향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자체가 사회의 저울이 한 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 나는 이 과도함에 놀란다. 그런데 스스로 몸담고 있고 담았다는 분들에게서 이 균형감각을 보기가 무척 어렵다. 제도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정확히 제 위치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 어정쩡함들을 더 보아주기가 안스럽다.

2. 촛불은 수많은 주체를 발굴해주었다. 상식과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이 좌우의 논리보다 형평과 안전에 대한 상하의 감수성으로 우리를 구해내었고, 앞길을 열어주었다. 좌우의 단선으로 이들을 꽃피울 수 없다. 좌우상하의 그물안에서만 서로 꽃피울 수 있다.

3. 모임은 이기적일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 균열과 경계의 틈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주는 것, 아니 물러나 주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선거-제도만능의 우리 고정관념으로는 상하의 파고를 넘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모임들 간의 중력이나 인력이 있다면, 그 장을 인지하려는 마음들이 있다면 다시 한번 복기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4. 아끼는 선배의 마지막이 마련한 자리, 반가운 얼굴들이 스치듯이 지나갈 정도로 취했다. 청년들과 모임들 사이사이 ‘관계-내-존재‘의 말들을 듣다보니 말도 아낄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몇 분에게 조금 깊은 소회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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