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는 이야기를 하려는 열망이다/이야기하는 이는 물 긷는 장치에 묶인 낙타처럼 계속 원을 그리고 돌면서 부지런하게 비극을 길어 올리고, 매번 다시 이야기할 때마다 그 때의 감정도 되살아난다. 서사가 없었더라면 희미해졌을 감정이 생생하게 유지되고, 과거에 있었던 일과 거의 관련이 없고 지금과는 더욱더 관련이 없는 감정이 서사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밑줄은 감정의 생성때문에 긋다. 이야기가 감정을 되살리고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고 말이다. 새로운 서사는 그렇게 새로운 감정을 융기하게 하고 번지게 하는 것이다. 더구나 통찰과 맞닿아 있다면 시간과 속도를 그리 걱정할 일이 못될 것 같다.) 39

자아라는 것 역시 만들어지는 것, 당신의 삶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자, 모든 이로 하여금 예술가가 되게 하는 어떤 작업이다. 늘 무언가 되어 가는 이 끝없는 과정은 당신이 종말을 맞이할 때 비로소 끝나며, 심지어 그 후에도 그 과정의 결과는 계속 살아남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아라는 작은 우주와 그 자아가 반향을 일으키는 더 큰 세계의 작은 신이 된다. (몽테뉴는 ‘내 과제는 내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직업이며 유일한 소명이다‘라고 하였다. 예술에서도 최고의 예술은 자기 보존의 예술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85

작가의 재능이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이며,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또한 다른 삶의 머릿 속에서, ㅁㅐ우 친밀하지만, 지극히 외롭기도 한 그 행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한 시인은 ‘고독이 발바닥 굳은 살처럼 ㄷㅏ져졌다/아프지 않게 생의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외로움이 밖으로 향하고 있다면 고독은 안으로 아래로 향한다. 중심과 관련된 행위인 것이다. 외로움은 끊임없이 부여잡고자 하는 구심성을 ㄱㅏ진 욕망이지만 고독은 가득차오르는 순간 밖으로 향하는 원심성으로 번진다.) 96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능력보다 침묵하는 능력을 가졌으면 삶이 훨씬 더 윤택해졌을 것이라고 한다. 침묵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로 글쓰기는 권장할 만하다. 결과가 아니라 아직 말이 되지 않는 나의 사유의 근육을 키우는 일만으로도 고독은 빛이 ㄴㅏ는 일이고, 글쓰기라는 행위자체가 현실을 거스르는 의미있는 일이다.) 100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들은 아주 희미하고, 예측할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탄생한다. ( 약한연결의 일본작가는 SNS의 성격이 같은 부류의 같은 사람들만의 깊이를 추구하는 강한연결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관점과 다른 생각을 갖게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자신을 ㅂㅏ꾸는 것은 사소하고 다른 시공간을 통한 약한 연결들이 자신을 침식하고 돌아보게 만든다고 한다. 삶이라는 것이 ㄱㅖ획적이고 목적지향일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자유이겠지만, 스스로를 작품으로 만들기에는 너무도 협소한 고정관념일 것이다. 우연한 일들로 우리는 바뀌어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106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나병과 고통)/ 당사자를 당신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의 고통을 당신의 몸이나 가슴, 혹은 머리에 새기고, 그다음엔 ㅁㅏ치 그 고통이 자신의 것인 양 반응한다.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이러한 동일시는 ㅇㅐ정 어린 관심과 지지를 통해 더 큰 자아라는 지도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51, 158 ( 한센병에 대한 통찰이 이 책 가운데 가장 끌리기도 하였는데, 혼자 궁금해하던 것 가운데 사람들이 정치적 참여를 하는 과정은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인식이 전제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들이 숙성된 뒤에서나 있을 수 있다는 진단때문에 이 대목을 더 ㅅㅐ기게 된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의 맹점을 인식하되, 자신을 벗어나거나 구조를 의문시하지 않는 경우도 ㄷㅐ부분이다. 인식은 나아가지 못하고 맴돈다. 그런 ㅅㅏ람들이 안타깝게도 대부분이다. 문제를 인식하기에 성숙하다고 보아야 ㅎㅏ지만, 이면을 살피려고 ㅎㅏ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다. 전체로 확장하려하지 않고 보고싶은 것만 보게되는 이분법의 아류에 머무는 인식은 ㅇㅣ렇게 따끔한 사유 속에 성숙으로 나아갔으면 싶다.)

정신의 무감각 – 스스로 냉담해짐으로써 살아남으려는 전략. 이것은 “비인간화”의 한 측면이자 실패한 복구과정이다. 이런 무감각은 자아의 경계를 수축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감정이입은 그 경계를 확장한다. 161 (얼마나 많은 냉담이 지금여기 공존하는가. 끊임없이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벌레취급하는 그들의 정신승리를 목도하는 것은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시간에 무감각하며 자신만 옳다는 반지성주의의 표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것조차 과분한 일인지도 모른다.)

10-20년 전부터 화가들의 관심은 대상에서 과정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당연한 결과로 빛의 예술, 동작의 예술, 체제에 ㄷㅐ한 간섭의 예술, 행동과 지각을 자극하는 예술이 등장했다. 나의 친구 루시는 이 변화를 ‘미술 대상의 비실물화‘라고 칭했다. 283

감정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살짝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정으로 타인의 현실적 존재를 알아보는 일이며, 바로 이것이 감정이입을 탄생시키는 상상적 도약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들어가 느끼다 286 ( 한 장소에 지나치게 머무르면 자신 조차 제대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관성을 갖고 보고싶은 것만 보게 만든다. 그래서 늘 여기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시공간의 이동이 그러하며 일박의 공간이동은 미처 보지 못했던 관계들을 헤아리게 만든다. ‘관성의 착각‘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고정관계에 우리는 중독되어 있다. 그래서 스스로, 외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을 밀어내는 연습들이 필요하다. 주기를 갖고...)

우리는 정상적인 것과 미친 것, 좋은 것과 파괴적인 것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그 사이에 마치 뚜렷한 경계가 있다는 듯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수천 가지 방식으로 서로를 취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그 덕분에 즐거움을 얻고, 누군가는 범죄를 저지르고 악몽을 꾼다. 302 (이분법은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이래로 버리지 않는 인식법이다. 여전히 그 방법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지식체계를 구성해나간다. 하지만 2의 N승만큼 봐야하는 것들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야할 것이다. 전체의 절반의 절반은 횟수를 거듭하면서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사유를 ㄱㅓ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전체를 향해서....또 ㅎㅏ나는 총체를 가정하면서 ㄴㅐ려와야할 것이다. 여전히 흑백이 횡행하는 세상이기에 말이다.)

볕뉘.

0. 고독에 대한 시리즈 가운데 한권을 주말에 읽다. 맨스플레인에 대한 선입견때문이었을까, 선입견과 달리 수려한 글쓰기와 깊이에 매료되어 몰입하였다. 돌아오는 길, [어둠 속의 희망]도 구해 읽었는데, 십여년의 시차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하고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작품으로 풀어내는 모습이 놀랍다.

1. 이야기의 힘, 고독, 글쓰기의 힘, 그리고 연대에 대한 부제도 잘 어울린다. 정작 사이글을 읽을 때는 딴 생각이 난다. 그래서 붙잡아 두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