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문화가 어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거나, 주류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주류 세력 내에 누구 하나가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해줘야 한다. 마이너리티들의 힘만으로는 주류로 들어가는 그 장벽을 돌파할 수 없다. 혁명을 꿈끈다면 직접 혁명가가 되지 않고도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트로이의 목마가 되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 후원을 ㅎㅏ거나, 권력을 잡아 힘으로 지원해주면 된다. 인디밴드 문화를 살리고는 싶지만 그렇게 살 수 없다면 돈이나 권력을 얻은 후 인디밴드의 공연을 마음껏 후원해주면 된다. 물론 돈이나 권력만으로는 안된다.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덧붙여져야 한다. 56

리듬앤블루스는 흑인 거주 지역 안에서도 하위문화였다. 이 하위문화는 절대 공식화될 수 없는 문화로, 티브이에 나오지도 않았고 어디서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철저히 흑인 거주 지역 안에서의 문화였고, 심지어 이름조차 없었다. ㅇㅣ 리듬앤블루스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1949년 빌보드 차트였다. 68

빌보드는 음반 유통 통계 잡지이기 때문에 누구를 상대로 팔든 팔리는 숫자들을 전국적으로 집계했다. 그 이전까지 흑인 음악은 레이스 뮤직으로 분류했는데, 그 이름을 조금 폼 나게 다시 만들려고 했다. 악기 편성을 보니 재즈였고, 곡은 좀 빨랐다. 그래서 재즈에서 ‘리듬‘을 가져오고, 보컬은 블루스 보컬이므로 ‘리듬앤블루스‘로 이름을 붙여 분류하기 ㅅㅣ작했다. 이 음악을 1950년대 백인 중산층의 10대들이 몰래 사들고 와서 즐겼다. 68

그것은 마치 1992년 서울북공고 야간 1학년 중퇴자인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했을 때 한 달 만에 전국의 10대들이 그들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몰아주었던 것과 같았다. 만약 서태지가 세상을 떠난 신해철처럼 서강대 중퇴만 했었어도 절대로 그렇게 팔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서울북공고 야간 1학년 중퇴자라는 것이 중요했다. 낙오자 ㅇㅏ닌 낙오자였던 10대들이 ㅈㅏ신들의 한 맺힘을 스스로는 능력이 없어서 못 풀었지만 서태지가 자신들 대신 풀어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69

“통장에 입금된 여덟자리 숫자를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한달에 35만원씩만 쓰던 그녀가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숫자들은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 권여선 안녕주정뱅이 ‘ㅇㅣ모‘ 가운데서

“나는 점점 비인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아무도 나를 주체로 여기지 않아요. 그걸 받아들이는 게 아직도 때로는 분하고 힘이 들어요. 하지만 가끔은 여전히 명랑한 주체인 양 거울을 보고 명령합니다. 내 안의 장님이여, 시체여, 진군하라.” 같은 책 ‘역광‘ 가운데서

볕뉘. ‘편의점 인간‘ 이란 소설에서 보통 평균적삶(이미 그런 것은 현실에서 희귀함에도 가족을 이루고, 결혼을 하고, 안정적인 정규직 취업자의 삶)이 의식하고 뱉어내는 일상이 편의점 알바로 살아가는 (안정적인) 삶과 부딪히는 부분을 생생하게 묘사해낸다.

권여선의 소설 안녕, 주정뱅이는 모든 단편이 술과 연관되어 있다. 삶에 배여있는 피치 못하는 가혹한 삶의 일부로 묘사되어 있다. 그 이모는 맏딸로 가족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는 이모인데, 돌연 모든 관계를 절연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낸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아무도 나를 주체로 여기지 않아요”라는 대목처럼 우리들의 사고는 중산층의 평균적인 삶(별반 부러울 것도 없는 삶?)과 사고에 단단히 묶여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 당당한 삶이라고 가정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살아내고 있는 삶들에 목소리를 줄 수 없는 것일까?

공부해라, 취직해라, 결혼해라, 건강해라 해라 해라체의 무한 강권의 세상의 파열은 어디쯤에 서성이고 있을까? 많이 받지 않고, 많이 벌지 않고, 하고 싶은 것에 시간을 많이 쓸 수 있는 삶들. 그것이 더 당당하고 더 색깔있는 삶들이라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 삶들에 대한 사유까지 차단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위축된 것이 아니라 외려 명절마다 왜 그렇게 삶이 다양하지 못하고 얽매여 사느냐고 핀잔을 받아야 하는 것이 기존 고정관념의 괴롭기 그지없는 국정교과서의 삶이라면, 왜 다른 해석과 ㄷㅏ른 평가를 받아야 하는 ㄷㅏ른 삶이 수면위로 떠오르지 못해야 되는가? 국정교과서의 삶이 낳는 숱한 해악을 목도하면서도 우리는 왜 다른 삶들을 목청껏 외치지 못하는 것일까?

삶의 단위를 왜 평생으로만 볼까? 한 5년쯤 먹고사는 ㅅㅏㄹㅁ의 연대나 같ㅇㅣ 따로 사는 삶. 그래 너무 ㄱㅣ획하는 생각일 ㄱㅓㅅ이다. 다음에 더 생각해보기로 ㅎㅏ자. 앞의 글에서 트로이의 목마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재능을 보는 안목에 더 끌렸다. 마이너리티가 주류가 되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이 ㅇㅏ니라 안목들일 것이다. 세상에 끌려가고 지나간 것들을 뒤늦게 혁명이었다고 호명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세상을 끌고 갈 수도 있다는 안목의 혁신들이 ㄷㅓ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러면 재능이라는 것 ㄱㅏ운데 ㅎㅏ나로 살ㅇㅏ가는 천의 결, 만의 삶결이 다 다른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착상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되고 싶은 ㅅㅏㄹㅁ이 ㅇㅏ니라 살고 시ㅍ은 사ㄹ아낸 삶들이 서로 만나야 ㅎㅏ는 ㄱㅓㅅ은 아닐까. 안목을 ㄷㅏ르게 키워가야 ㅎㅏ는 것은 ㅇㅏ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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