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의 시간을 위하여

 

쓰는 자에게 파토스만이 아니라 방법론이 필요하다. 발상은 단순하다. 쓴 자와 읽은 자가 만나는 것이다.....서로에게 말을 걸기 위해 모인다...모이면 누가 어떤 고민으로 왔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서너명이 되더라도 적은 수로 깊게 대화하면 될 것이다. 56

 

사회학자의 용어는 분명 분노에서 시작되었을 텐데 왜 체계적 연구 끝에 분노는 탕진되고 마는 것일까... ...그저 맞는 이야기로 끝난다. 무엇보다 인간에 관한 고민이라면서 왜 사람이 빠져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결국 학술용어라는 그들의 말은 왜 상황에 다가가기보다 상황의 복잡함을 가리거나 상황과의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는 데 자주 동원되는 것일까. 45

 

말은 내려다보는 말이 아니라 뛰어드는 말, 만지작거리는 말이 아니라 얽혀드는 말이어야 한다. 옳음을 선양하기보다 그 옳음이 소식되는 이유를 파고드는 것이 중요하다. 현실은 복잡하다. 그렇다면 현실의 복잡함을 정돈하기에 앞서 복잡의 복잡을 사고해야 한다. 현실은 음영이 져 있다. 45

 

겪고 쓴 보다 읽고 쓴 의 비중이 늘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어디서 발화하고 있으며 어떤 표정으로 쓰고 있으며 누구에게 가닿으려 하는지가 잘 보이지가 않는다. 물론 겪다와 읽다를 쉽게 가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기성의 관렴을 현실에 들이밀기는 해도 관념 자체가 현실 속에서 부침을 겪고 성장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기성의 관념을 여과 없이 자신의 현실에 적용하다 보니 현실 이해가 엷어진다. 즉 해당 언설읮 징후로만 현실의 일부 면모가 포착되는 것이다. 45

 

잡지현장이란 직접적 대결이 벌어지는 소위 투쟁의 현장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을 포함해 말의 움직임이 있는 곳이 이 잡지의 현장이지 않겠는가. 말이 튀어나온다. 뻗어간다. 막혀 있다. 고여 있다. 격투한다. 공전한다. 그리고 위기에 처해 있다. 바로 말의 소재들이다....생동하는 말들로 뛰어들어 말을 길어올려 그 말을 세계에 밀어넣어 기존의 말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 아직 드러나지 않는 지평을 더듬어가는 것이 자기인식이자 사회적 자각이지 않겠는가 46

 

이 잡지는 (대부분의 잡지들은) 아직 논쟁을 가져보지 못했다. 왜일까. 역사가 짧은 탓만은 아닐 것이다. 호흡이 짧은 단절적 기획, 내적 관계성을 형성하려는 의지가 결핍된 집필, 평에서 그쳐버리는 독해가 이유일 것이다. 47

 

논쟁의 사고에는 이긴다/진다말고도 보다 섬세한 감각이 요구된다. 비판은 무엇을 기준 삼느냐에 따라 생산성이 달라진다. ...논쟁의 생산성은 기존 입장에 대한 두둔이나 거부만으로 회수되지 않을 논의의 공간을 논쟁의 상황에서 어떻게 마련해낼 수 있을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역사감각을 견지한 비평성이 관건이다. 49

 

어떤 사상이 보편적인 까닭은 그것이 뛰어나게 개성적이기 때문이다. 사상이란 한 존재가 범주적 진리가 아닌 개체의 진실을 되도록 온전히 끄집어낼 때 형상화된다. 그것이 그 존재를 떠나서도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다른 존재에 자신의 고민으로서 엉기기 때문이다. 51

 

잡지는 아무래도 책에 비해 엷고 어수선하지 않은가. 해당 사안을 붙들고 갈 게 아니라면, 잡지의 강점은 기동성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동성을 중시해 그때마다의 정치적 사회적 대립에 밀착해버리면, 잡지는 오히려 자신이 역동성을 상실하고 만다....나는 잡지의 운동을 사람 간 이어짐으로, 잡지가 쌓아가는 시간은 잡지가 열어가는 어떤 공간과 관련된다고 사고하고 싶다. 55

 

볕뉘. 리오타르의 책3장은 왜 말을 하는가로 끝나고 있다. 무엇인가 다른 말을 하는 것. 벙어리가 말문이 트이는 것. 새롭게 시작하는 그것이다. 그 말들을 명료하게 뱉어내기 시작하는 것. 그로 현실의 질곡은 명명할 수 있는 것이 되어간다. 지식인들의 고요는 이상하리만큼 크고 깊다.  벙어리임을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말은 많지만 현실의 음영을 깊게 들여다보지 않고, 그저 판에 박힌 말들일뿐이다.

 

어쩌면 무서움에 가깝다. 일본 지식인들이 개인을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사유하거나 행동하는 것처럼 바뀔까 우려스럽다. 논쟁도 없다. 우리에 맞는 철학이나 사유로 말걸고 고민을 섞지 않는다. 그 숱한 당위들만 어깨에 견장처럼 달고 머리는 없는 채로 나다닌다.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아주 가까이도 아주 멀리도 매 한가지다.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래도 공명하는 지인의 발견은 감사하다. 방법도 문제인식도 그러하다. 만날 날만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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