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투쟁에 관해 한 가지 더 일러둘 말이 있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그것을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지 말게. 이것이 많은 사람이 빠지는 인간관계의 함정이지 122
‘일의 과제’부터 생각해보세. 어떤 일이든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해낼 수는 없네. 예를 들어 평소에 나는 책을 내기 위해 이 서재에서 원고를 집필하며 하루를 보내지. 집필은 누구에게 맡길 수 없는 자기 완결적인 작업이야. 하지만 책을 내고 파는 일은 편집자와 북 디자이너, 인쇄업자, 그리고 유통업자와 서점 직원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하다네. 타인과 협력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어. 128 ‘교우의 과제’, ‘사랑의 과제’를 더해서 ‘인생의 과제’라고 부르네. 127
‘소유의 심리학’에서 ‘사용의 심리학’으로 - ‘무엇이 주어지는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140
적극적으로 공헌한다? 그게 무슨 뜻이죠? ‘인생의 과제’에 직면하는 걸세. 즉 일, 교우, 사랑이라는 인간관계의 과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만약 자네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공동체에 공헌하겠다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을 걸세. 모든 타인이 ‘나를 위해 무언가 해주는 사람’이니 굳이 내가 나서서 행동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자네도 나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야. 내 발로 인간관계의 과제에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네. ‘이 사람은 내개 무엇을 해줄까?’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그것이 공동체에 공헌하는 길일세. 215-216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일세. 216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말고 243 다른 사람과, 한 명이라도 좋으니 수평관계를 맺을 것.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걸세. 244
결국 공동체 감각이 필요하지. 구체적으로는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고, 공동체 감각을 기르는 것. 이에 필요한 것이 ‘자기 수용’과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라네. 259 진정한 나는 100점짜리야라는 말이 자기긍정인 반면에 60점짜리 자신을 그대로 60점으로 받아들이고, “100점에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라고 방법을 찾는 것이 자기수용일세 260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해야하네. 그래 교환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것. 있는 그대로의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낸다. 그것이 자기수용이야. 261
다른 사람을 믿을 때 조건을 일절 달지 않는 걸세. 비록 신용할 수 있을 만큼의 객관적 근거가 없더라도 믿는다. 담보가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무조건 믿는다. 그것이 신뢰라네. 264 신뢰의 반대말은 회의라네. 반대로 자네가 인간관계에 ‘회의’를 품고 있다고 하지. 남을 의심하고, 친구를 의심하고, 가족과 연인을 의심하며 살고 있다고 말이야. 거기에서 어떤 관계가 싹틀 수 있을까? 자네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 상대방은 바로 알아채지. “이 사람은 나를 신뢰하지 않는구나”라고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네. 거기에서 어떤 발전적인 관계가 만들어지겠나? 우리는 조건 없는 신뢰를 가져야 하네. 그래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지 265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네. 268
타자공헌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희생이 아니라네. 오히려 아들러는 타인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사람을 보고 ‘사회에 지나치게 적응한 사람’이라며 경종을 울리기도 했지. 떠올려보게. 우리는 자신의 존재나 행동이 공동체에 유익하다고 생각했을 때에만, 다시 말해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질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고 말했었네. 즉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인 셈이지. 271-272 친구인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 공헌하려는 것. 그것이 ‘타자공헌’일세. 271
그러면 왜 그 순간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걸까? 가족을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그렇지 않으면 “왜 나만?”, “어째서 다들 돕지 않는 거야?”라는 억울함만 생기겠지. 다른 사람을 ‘적’으로 간주한 채로 하는 공헌은 어쩌면 위선일지 몰라. 그런데 다른 사람이 ‘친구’라면 어떠한 공헌도 위선이 아니라네. 자네가 자꾸 위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공동체 감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276
자네가 극장 무대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그때 극장 전체에 불이 켜져 있으면 객석 구석구석까지 잘 보일 거야. 하지만 자네에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바로 앞줄조차 보이지 않게 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네.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 과거와 미래가 보이겠지. 아니,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 하지만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되네. 307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라네.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고,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서 뭔가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거지. 자네는 지금까지 ‘지금, 여기’를 외면하고 있지도 않은 과거와 미래에만 빛을 비춰왔어. 자신의 인생에 더없이 소중한 찰나에 엄청난 거짓말을 했던 거야. 313
볕뉘. 정체성이란 있는 것일까? 나만이 아니라 '나-너'도 그러하다. '나'가 있다는 강박은 서양학문의 디딤돌이자 지금까지의 성과일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나의 자유'만 밀어부치는 사유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유의 폭을 '나'가 없다라고 넓힌다고 손해볼 것은 없지 않은가. 빅토리아시대는 남녀구분은 물론 직업적 위계가 자리잡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유의미한 효과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규격화된 틀은 예측을 쉽게할 수 있게도 한다. 하지만 찰나의 반복과 안정성이란 것이 희미해지는 지금은 또 다른 시야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나' 혼자만 망망대해에 떠있다는 느낌은 어쩌면 그렇게 돌고돌아 너를 강렬히 원하고 있다는 갈구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은 아닐까? 같이 곁들여 볼 책들이 많은 것 같다. 개인심리학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와 파장을 더 생각해본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