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도 잘살고 신분이 귀했지만 이름이 닳아 없어져 버린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으며 오직 평범하지 않은 사람만이 거론될 뿐입니다. 대체로 문왕은 갇힌 몸이 되어 <<주역>>을 풀이했고 중니(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당하여 <<춘추>>를 지었습니다.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으며, 좌구(좌구명)는 실명하여 그의 <<국어>>가 남겨졌습니다. 손자는 발이 잘리고 나서 <<손자병법>>을 지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되어 세상에 <<여람(여씨춘추)>>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한비는 진에 갇혀 <세난><고분> 두 편을 지었으며, <<시경>> 삼백 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현이 발분하여 지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좌구는 눈이 없고 손자는 발이 잘려 결국 세상에서 쓸모가 없게 되었지만, 물러나 서책을 논하여 그들의 울분을 펼치고 문장을 세상에 전해 주어 스스로를 드러냈습니다. 359-360

 

덕이란 인성의 근본이며, 악이란 덕행의 꽃이며, 쇠붙이, , , 대나무는 음악의 도구이다. 시는 그 뜻을 말한 것이고, 노래는 그 소리를 읊은 것이며, 춤은 그 모습을 움직인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마음에 근본을 두고 난 다음에 악의 기운이 그것에 따른다. 이 때문에 감정이 깊으면 문채가 밝아지고, 기운이 성해지면 변화가 신묘하고, 온화함이 마음 속에 쌓이면 영화로움이 바깥으로 피어나니, 악만은 거짓으로 만들 수 없다. 악이란 마음의 움직임이며, 소리란 음악의 형상이며, 문채와 절주는 소리의 수식이다. 83-84

 

악이란 (인간의) 내심에서 움직이며, 예란 (인간의) 바깥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는 겸손을 위주로 하고, 악은 풍요로움을 위주로 한다. 예는 겸손함으로써 나아가며 나아가는 것으로 꾸밈을 삼는다. 악은 풍요로움으로써 절제하며 절제하는 것으로 꾸밈을 삼는다. 예가 겸손함만을 따지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침체되고 말 것이며, 악이 풍요로움만을 따지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방종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예는 자기 분발을 요구하고, 악은 반성을 요구한다. 예가 자기 분발에 이르면 즐겁고, 악이 반성에 이르면 편안해진다. 예의 자기 분발과 악의 반성은 이치가 한가지이다.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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