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018

   1000  겉멋 / 덜가진 자의 문화; 일터 동료와 이야길 나누다. 맞벌이를 하는데 어*이집을 운영하여 주말 쉴틈도 없고, 가사일 아닌 가사일 덕분에 김치담그는 일, 세탁, 운전 등등 하지 않은 일이 없는 것 같다.  쥐꼬리 만한 월급? 용꼬리만한 월급? 이 표현이 맞겠다. 주변의 수입규모는 부모님<친구들<사회단체실무자<누나-매형<우리=막내<동생네 학력 *졸<@퇴<대##졸<*졸-전*대<*졸.  몇몇 친구들은 준실직상태.

어쩌면 나는 편하게 가사분담을 이야기하며 설겆이 한 이야기를 하며,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일자리와 상대적으로 나은 밥벌이의 운을 맞아 편하게 흔적을 남기는 것은 아닌지? 내가 글을 깨우치기전 일터로 몰려나와 살고 있다면, 사고를 만나 편치 않게 움직인다면?  불필요한 가정을 차치하고라도 어려운 여건하에 맞벌이를 하게 되면 가사분담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안되는 것이 아니다. 돈 역시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지를 수는 없는 것이다.  빠듯하게 돌아가는 살림의 쳇바퀴에서 그 문화 속엔 생활에 룸펜기질이 베여있지 않고, 특별한 광적 사치에 중독되어 있지 않다면 일상은 늘 가사분담과 돈쓰임새나 몸쓰임새, 하여야 할 역할은 선명하다. 베인 어려움을 삮여내는 농과 익살을 갖지 않곤 버티기 힘들다.  술 한잔 사더라도 큰 인심쓰고 허름한 구멍가게 탁자나 허름한 술집에 한잔 목축이거나...문제는 세상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지만... ...

하지만 식자?들은 이들의 가사분담과 품앗이와 삶을 살아가는 지혜, 사회적 무의식엔 커다란 관심이 없는 듯하다. 무슨 무슨 사조나 사상에 관심이 있는 듯. 그들의 자생성엔 더 망가질 때를 기다리는지 무감각한 것은 아닐까?  조금 가지고 있는 사회에선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몸으로 가지고 있는 그들의 문화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오히려 소자본가나 자산가의 현란한 몸짓에 온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여유와 소외된 자를 위한 변주마저 없다면 얼마나 씁쓸할까? 시대의 현란한 변화에 조응해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문화자본의 선취와 저변이 넓어지고, 그만큼 상식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것은 아닌가? 자본주의의 현란한 아편만 매일 맞지 않는다면... ....

어쩌면 세상은 겉멋에 익숙해 속멋이나 진정성엔 관심이 없거나, 음식의 맛을 보지 못하고 목으로 넘기는 급급함에 끌려가는 것은 아닐까?


맑스주의 향연 앞부분, 맑스주의 휴머니즘, 경제철학수고 청년맑스를 보다. 일의 발견: 실직과 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차별이라한다. 전혀 다른 세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직방치는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기본권을 뺏는 것은 아닐까? 실직은 그냥 교통사고 신문기사처럼 둔감하다.

051026 청년 맑스에서 어떻게 하다 이렇게 과도하게 분화했을까? 100년이란 세월이 짧을수도 있겠지만 사상 - 정치의 흐름이 전도될 수 있었을까? 너무 홀린 것은 아닐까? 어찌 그토록 사상의 갈래치기가 되지 않고 일방적 흐름이 있었던 것일까? 동시대 타 사상가의 목소리에 그토록 귀기울수 없었던 것일까? 사상의 다양성, 분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또 다시 과도한 통합이론이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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