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의 영화 독재자에 나오는, 비행기를 타고 구름 속을 날아가던 주인공이 기체가 상하 거꾸로 뒤집혀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장면을 언급한다. 실은 인간이 이러한 “거꾸로 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지금은 일상적인 상태이며, 현대란 “인간과 사회의 관계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도착되어 있는 시대”이외에 다름 아니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국가나 다양한 조직의 ‘내측’에 속하여, 그 내부에만 침투하는 이데올로기나 ‘상식’에 따라 처음부터 일정한 ‘이미지’를 갖고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인간에게 남겨져 있는 길은 어디까지나 ‘내측’에 머물러 있음을 자각하면서, 바깥과의 ‘경계’ 선상에 지속적으로 서 있는 것이다. -“경계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의 의미는, 내측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서로 ‘실감’을 공유하면서도, 부단히 ‘바깥’과의 소통을 유지하여 내측 이미지가 자기 누적에 의해 고정화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에 있다.” 184
분명 지식인이 살고 있던 세계는 관념적으로는 상당히 근대적이었지만, 그러한 관념의 세계는 일반국민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사상’과는 거리가 멀어서, 국민생활 그 자체의 근대화 수준과의 사이에는 심각한 불균형이 있었다. (중략)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대중’의 동향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자, 그러한 잠재적인 사회의식에 군부 파시즘이 불을 붙여 확 타올랐던 것은 아닌가 73
도덕과 법률이 항상 외부적인 권위로서 강행되어, 한쪽에서는 엄격한 교법이, 다른 한쪽에서는 수치심 없는 회피 의식이 병행하여 존재하는 것. 비판적 정신의 적극적 의미가 인정되지 않기에, 한편으로는 권력은 점점 폐쇄적으로 되고, 다른 한편 비판은 점점 음성적 내지는 방관적으로 되는 것. 이른바 관존민비, 또 관료조직 내에서 보이는, 아래를 향해서는 ‘팽창’하고 위를 향해서는 ‘수축’하는 권력. 사물에 대한 경신. 종래의 동양맹신에서 서양맹신으로의 비약 등등 89
마루야마가 말하는 ‘근대 내셔널리즘’은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와 산업혁명 이후의 영국에 나타난 국민의식을 전형으로 하는 것이다. 또 스위스나 미국의 예에서 보이듯이 영토나 언어나 문화의 공유는 그것의 필수조건이 아니다.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보편적인 정치적, 도덕적 이념’을 ‘민족적 자긍심’의 내실로 삼아, ‘공통의 정치제도’하에 사는 것을 서로의 ‘귀속 의식’의 핵심에 둔다. 그리고 독립된 개인이 모여서 이루어내는 ‘자발적인 인민의 의지’가 그 유대를 끊임없이 확인하며, 데모크라시 제도를 통해 인민 스스로가 정치의 결정 주체가 되는 것을 필수조건으로 한다. 91
‘근대적인 것’의 지표로 설정된 것은, 그때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왔던 정치의 세계와 도덕의 세계와의 사이에 균열이 생겨 ‘공적’ 영역에 고유한 논리가 인정되는 동시에, ‘사적’ 영역에서의 개인의 활동이 다양한 것으로 해방되는 것이다. 99
“비록 나는 무력합니다만, 전후 끊임없이 생각해온 것은 일본이라는 상황 속에서 리버럴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행동으로 리버럴하다는 것을 실증해가는 데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자유에 관해서는 볼테르의 말,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것을 말할 권리는 죽는다해도 옹호하겠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자유라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 생각을 달리 하는 자유다.”라는 정의를 전후의 마루야마는 즐겨 입에 담곤 했다. 115
자주 얼굴을 마주하던 무렵의 마루야마는 종종 ‘학문적 사색’이 무르익게 되면 곧장 집을 나와 걸어서 3,4분 거리의 다케우치 집으로 달려가서는, “그 상념의 피력과 검증”에 열을 올렸다. 120
근대일본에서 국가가 “윤리적 실체로서 가치내용의 독점적 결정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진리나 도덕에 대하여 국가가 중립을 지키는 유럽 근대국가와는 달리 국가가 인간의 내면에 무한히 개입하고, 또 반대로 ‘사적 이해’가 국가권력을 쉽게 움직인다. 마루야마의 조수논문이 그려낸 공사 영역을 나누는 근대국가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보다 상위자에게 순종하는 ‘권위에 대한 의존성’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군인이나 관료나 정치가 그리고 황조황종의 유훈에 따라 통치하는 천황에게까지 침투해 있는 것이다. 138
중세에는 신이, 근대에는 인간성이 담당하고 있던, 여러 다양한 영역을 관철하는 가치의 중심이 없어지고 회의가 만연하여, 다양한 가치관의 모순과 충돌로 번민하게 된 시대, 계류점을 잃어버린 마음속 심연의 ‘에너지’가 불안정하게 요동치면서, 사람들을 격렬하게 움직여간다. 그것이 니체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그 현대이다. 149
사람들이 정보의 그물 속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상에 물들어가는 것은 정부에 의한 교묘한 선전 때문만은 아니다. 후에 [정치학 사전]에 마루야마가 쓴 항목 ‘정치적 무관심’에 따르면, 매스미디어나 영화,연극,스포츠와 같은 대중오락 또한 사람들의 관심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치화’의 작용을 돕게 된다. 153
만약 경험적 현실로서 눈에 비치는 세계가 전부가 되어버려서, 그것을 초월한 눈에 보이지 않는 권위-신이라도 이성이라도 ‘주의’라도 좋다. 여하튼 보이지 않는 권위에 의해 자신이 구속되어 있다는 감각이 없어지면, 결국에는 보이는 권위에-이것 또한 정치권력이든 여론이든 평판이든-끌려다니게 된다는 것이 나의 비합리적인 확신인 것이다. 156
그렇기는 해도, 나는 이번 문제 등을 통해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느꼈다. 따라서 실제로 나 자신, 요양소 ‘밖’의 사람에 대해서는 어엿한 주인으로서 말하고 있지만, 일단 장기요양자나 중증환자 앞에 서게 되면, 나 같은 사람의 어설픈 ‘동정’으로는 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내면에는 아무래도 파고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며, 그러한 정신세계에는 밖에서는 도저히 체험할 수 없는 리듬과 기복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요양자로서 하는 내 발언 또한 공허하게 느껴지게 된다. 163
현대에 이르러 정치기구는 복잡해지고 국제세계의 동향이 사람들의 생활에 곧바로 영향을 미치게 됨에 따라, 누가 결정을 하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정책이 결정되고 있다고 느끼고 무력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무관심의 실체이며, 그러한 ‘체념과 절망’으로부터 정치에 대한 ‘초조함과 울분’까지의 거리는 한걸음도 되지 않는다. 그것을 간파한 ‘정치 지도자’가 미디어를 이용한 선전을 통해 반대 세력이나 특정 외국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게 되면, 사람들은 그 강렬한 자극에 흥분하여 “자아를 포기하고 권위에 대해 맹목적으로 귀의”해간다 166
아마추어에 기반한 데모크라시 –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소집단 속에서 평소부터 정치나 사회나 문화와 관련된 문제를 토의함으로써 “자주적인 비판력과 적극적인 공공정신”을 배양하는 것에 한정되어간다. 그러한 기초 위에, 일상 생활 사이사이에 정부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비직업적 정치가의 정치활동”이 중요하게 된다. 167
‘정치적 리얼리즘’은 현상을 움직이기 어려운 기성사실의 축적으로 보지 않고, 항상 변화할 수 있는 것, 개량할 수 있는 것이라 보는 자세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뜻하지 않은 현상에 직면해서는 ‘적의 음모’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상황인식이 잘못되었는지를 성찰하고, 결과에 깨끗이 책임을 지는 태도. 현실을 “일반적 추상적인 명제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 다양한 측면을 구분하여 적절한 선택을 행하는 사고력. 정체에 ‘베스트’를 기대하다 격심한 실망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것은 어디까지나 “덜 나쁜 것을 선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각오로 임하는 것. 그리고 어느 정치세력을 지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지금까지의 세력 분포에 얽매이지 말고 “전체 상황에 대한 판단”에 따라 유연하게 결정해가는 것. 이와 같은 사고법을 일상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훈련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169
안보반대운동에 대해, “에너지만 있을 뿐, 질서 형성적 힘이라는 것이 혼돈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단지 형식에 대한 반발에만 머물고” 말 가능성을 마루야마는 지적한다. 그리고 창밖의 데모대가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칼 마르크스의 말, “혁명 정신이 절정을 지난 후엔 장시간의 숙취가 밀려온다”를 읊조렸던 것이다. ‘현대’ 대중사회의 상황에 대한 암울한 불안감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일어서는 모습을 보아도, 혹은 그것을 목도했기 때문에 더욱 증폭되어갔다. 171
정치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매일 제기하는 산문적인 요구”에 응하는 “본래부터 보수적인 것”이라고 강조하고, 과격한 행동에 의한 급진적인 변혁에 대한 동경을 신랄하게 비판하게 된다. “정치학이란 영구히 완벽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일종의 전통 사회를 연구하여 다음에는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좋을지를 분간하는 기술이다”라는 영국의 마이클 오크쇼트의 말을 발췌하고 있다. 172
어느 토픽에 대해서 열풍과도 같이 한 방향으로 쏠리는(반동적이건, 자칭 혁명적이건) 정신적 풍조가 형성되면, 놀랄 만한 순응주의가 인텔리 세계조차 지배한다는 점에서도, 도대체 전후 일본은 ‘개인 독립의 기상’이라는 면에서 얼마나 진보한 것인지, 오히려 텔레비전 주간지 문화의 획일성이 그러한 경향에 박차를 가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178
전통은 “우리들이 주체적으로 인류의 과거유산으로부터 선택”하여 우리의 피와 살로 소화해내야 하는 것인 이상, 외래문화라는 것은 그것을 전통으로부터 배제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185
인간의 지적 작용의 근본을 이루며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의 학습과는 관련이 없는 ‘서민의 지혜’, ‘생활의 지혜’에 해당하는 “예지wisdom”이며, ‘이성적인 앎의 작용’으로서의 지성이 그 뒤를 잇는다. 그러나 현대의 정보사회는 이 네 가지 앎의 순위를 완전히 역전시켜 “정보최상 예지최하”의 상태에 빠져 있다. 예스 노로 대답하는 단순한 퀴즈나 실용서의 소재가 될 만한 정보의 단편이나 학교 수재들의 지식들만이 편중되어 세상에 넘쳐나고, ‘지성’과 “예지”는 극히 메말라가고 있다. 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