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겹침과 공유공간, 그리고 그 자장

 

 

공유, 공동체 다 지나간 말이다. 그것이 가능이나 하겠는가 말이다. 사무실도 구하기 힘들고 전전하는데 그것도 공유공간을 갖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다 쓸데없는 소리다. 공동도 아니고, 공동과 체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붙여서 공동체라? 지금 이 시기에 말이 되는가? 될 수 있나 말이다. 공동체라고 한다면 따로 농사짓고 외따로 떨어져서 활동하자는 소작활동을 말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가? 농촌이라구? 아니다. 도시다. 도시여야 한다.

 

 

1. 도시여야 하지만 도시가 문제다. - 도시의 삶은 섞이지 않는다. 늘 보던 사람들, 늘 정해진 일상의 패턴으로만 간다. 장애인과 노인, 청년과 주부,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삶이 겹치지 않는다. 절실하지 못하고 애틋하지 못하다. 애환을 기저에 담아두지 못한다. 만남은 얇고 일회성이다. 대학이 직업학교가 되어서 과와 과가 단과대학과 단과대학이 만나지 못하듯, 일상과 삶의 아주 작은 부분도 섞을 수 없다. 모임과 모임도 삶을 우려낼 수 없다. 밥이라도 먹고 시간이라도 낼 수 있어야 아주 조금 삶을 모임과 단체에 건넬 수 있다. 바쁘고, 지친 아픔, 그 강도와 농도의 깃발을 흔들 수 없다. 흔들어도 알아줄 수 없다. 다른 삶을 살아본 적도 없으므로 그렇게 삶은 서로 스친다. 맞닿지 않는다.


도시의 삶은 섞이지 않아야 한다. 공간은 모두 열릴 필요가 없다. 숟가락 숫자까지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공간, 탐색의 공간, 사색의 시공간 도시여야만 보장받는다. 밀도높은 과도한 시선에서 나를 유지하면서 너로 다가설 수 있다. 만나지 않고 만날 수 없고 끼리끼리만의 담만 쌓인 일상은 부질없다. 뒤섞기고 섞여 아픔까지 맞닿아 쓸린 상처가 아파야 아마 만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위와 가치를 논하는 사귐보다 처절한 고통을 끄집어내는 것, 아니 그 체념을 내놓고 기댈 수 있을 때야만 만남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 우리는 알되 서로 너무 모른다.

 

 

2. 민중의 집 하자는 거야. 그래 민중의집이라도 해야 한다. - 일상이 겹치지 않으면 생각도 겹치지 않는다. 겹치고 다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념과 가치, 신념은 독자생활을 해왔다. 가치와 신념의 자장은 숙연하게는 하지만 그 이상을 넘을 수 없다. 생각과 생각이 만나는 접점은 설득에서 만나지 못한다. 논쟁의 뒤안길이나 그 자장이 옅어질 때 은은하게 스며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와 너가 가까이 있을수록 생각과 생각은 만나지 못한다.  또 다른 너로 매개되거나, 나에게서 바래 멀어진 생각들이어야 조금 이견에 섞일 수 있다. 나만, 너만은 너무도 오래 써먹었던 자긍이자 자만이다. 기획은 싫어도 만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숙성된 생각의 씨앗들이 발화되는 시점은 늘 만남이란 양분과 삶과 격정의 근력을 갖게 된 이후의 일이다. 같은 시공간을 다르게 점유하고 살아내지 못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지금이 허망한 것처럼 앞으로도 허황되다. 다른 시간과 생각을 삭혀내지 못하고 모아내지 못한다. 역사와 맥락은 담기지도 못한다. 그래서 집착한다. 밥이라도 먹어야하고 차라도 마셔야하고 같이 강좌도 듣고 논쟁도 아프게 해내야 한다. 삶의 선술집이 필요한거다. 싸우면 싸울 수록 아옹다옹하는 사이일수록 말이다.  일상의 점유지대가 있는 편이 없는 편보다 낫다.

 

 

3. 뭘 하자는거야. 많이 해보지 않았는가? 서로 얼굴 한번 쳐다보지 않는데 뭘 하자고 말인가? - 유행에 쫓기지 말자. 유행은 만드는 편이 낫다. 책을 읽어내고, 또 같은 책을 읽고, 또 다른 토론을 해보자고 한다. 진도도 나가지 않는 텍스트를 보고 또 봐야한다고 한다. 그짓을 또 다시 말인가. 그럴 일은 없어야 한다. 이념도 가치도 연연해하지 말자. 가치도 이념도 연연한 꼴이 지금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않았는가. 또 설득시켜야 하는 것이 남았는가. 설득당할 사람들과 설득당한 삶들은 없는데. 그렇게 자신이 없는가. 그것만 비우면 멋진 사람아닌가.  내것과 나의가족에만 머문 적이 없는 사람아닌가. 멋과 맛. 만날 사람들은 내것과 나의가족만 챙기려는 분들이다. 그들의 삶을 탐하면 안되겠는가. 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충분히 멋진데... ...

 

 

 

볕뉘.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가 - 어젯밤 방바닥에 놓인 책들을 추리다가 책이 들어왔다. 어스름도 더 짙은 새벽 책을 들추인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통과할 수도 있고 몸이 덜 사용될 수도 있다. 터널이나 숲속, 지옥과 천국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거친 후에 나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독후 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라고 서두와 말미에 정희진은 말한다. 

 

독후 감의 한쪽을 펼쳤다.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 '~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나는 누구라는 정체성과 그것을 추동시키는 무엇이 있다는 발상이다. '좌파'를 삶의 부분적 노선이 아니라 존재 증명서(정체성)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더러있다. 이 질문은 처음부터 우문이다. 우답을 불러오는 노동없는 고민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묻는다.

 

"'답'은 의미를 추구하는 방식에 있다. 의미는 기존에 주어진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찾아야 할 대상이다. 그것도 중단없이 찾아 헤매야 한다. " 이어서 말한다.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문제라고 한다.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지가 궁금한가? 무지로 산다. 이는 여성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한다. 거듭 말하지만,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현존하는 것이 진리일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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