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 아닌 금기들
'진짜 없는 사람들은 말을 잘 안해요'
말도 못하는 복지의 사각지대를 발굴해서라도 부여잡을 수 있다면 좋겠다.
문득 바보같은 얘기를 해본다. 현실의 삶에는 담들이 많다. 벌지 못하는 것도 태반인데 버는 것 쓰는 것을 얘기해야 된다라고 한다면 정신나간 소리일까? 담 넘어에서 그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으로 움직임도 오히려 잔잔해지고 점점 움츠려 드는 것은 아닐까? 점점 공포에 짓눌려 그저 동물적인 반응을 하고 마는 것이 지금의 짐작도 못하는 삶일텐데? 어떤 놈들이 잡고 해쳐먹어도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는데 무슨 말을 믿으라고... .., 사탕발림보다 정작 눈으로 믿음의 기준은 나아졌느냐 말았느냐인데... ... 가치와 이념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콧방귀나 낄 수 있는 소리인가? 사기꾼이 넘쳐나는 세상에, 그 말잘했던 놈들의 사기에 넘어가자마자 허망하여 현실을 깨달은 것이 한두번이 아닌데 이념과 가치를 믿으라고? 그래서 발등 찍힌 것이 숱한데 무엇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일까? 푸어의 족쇄를 어떻게 하면 벗겨낼 수 있을까도 걱정인데 수입과 지출을 말해야 한다고 말하니 제정신인가?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않는 노동의 빗장은 풀릴 수 없는 것일까? 노동의 권리와 댓가를 반드시 얘기해야하는 관문은 만들 수 없는 것일까? 통계치로 보는 획일화되고 표준화된 쇼윈도우 안의 삶이 아니라 살림살이의 굴곡을 서로 느끼고 나눌 수는 없는 것인지? 얼마나 허접하고 알량한 씀씀이인지? 얼마나 엄한데 돈을 쳐바르는지, 서로 덜컥거리기나 한다면...고만고만한 아파트 끼리의 삶이 아니라 건너건너 짐작할 수 없는 삶들 사이로....짐작할 수 없는 삶들도 얘기 나누지 않으면 안된다면?
비참의 건너편을 건넬 수는 없는 것일까? 내 가족, 내 삶에서 벗어나는 제 3지대의 회계나 운영은 불가능한가? 활동가의 삶을 보장하는 곳간은? 활동가를 위한 적립금을 부가가치세로 거둘 수 있거나 쿠폰처럼 적립할 수는 없는 것일까? 더 양적으로 질적으로 여가같은 부러움을 또 다른 계정에 넣을 수는 없는 것일까? 소꼽놀이 같지만 행복의 회계 - 관료, 빤한 일의 행정이 아니라 다른 무정형의 시간들을 대차대조표에 넣는 일은 불가능한가? 자본주의가 근면 검소를 바탕으로 신의 용서를 받고 섬길 수 있었다면, 애초 그 수지타산의 대차대조표는 그래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안달하는 이들의 저변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야 아마 초심을 잃은 자본가의 자본주의도 그 뿌리에서 흔들리는 것은 아닐까?
그러그러한 삶들의 일상에 저당잡혀 아무 일도 저지르지 못하는 쳇바퀴를 혼자 탈출할 수 없다. 경착륙이 아니라 같이 연착륙하는 문화의 잔뿌리...문화의 힘은 없는 것일까? 혈연의 끈도 해결하지 못하고 어쩌지 못하는데 가족 너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정말 순진한 생각일까? 돈의 동선, 시간의 동선, 아니면 즐거움의 동선들을 차변과 대변에 또박또박 기록해 또 다른 신이 굽어 살펴주신다면?
노동권을 일상으로 가져오는 일, 허망한 미래의 불안에 저당잡힌 재산들, 짜투리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공유의 제3지대를 만들어보는 일, 여가와 시간, 활동을 시험하는 일들, 같이 얇고 길게 사는 것에 대한 기획들...연결망을 가급적이면 시간단위로 매매와 적립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일(원고료 적립....무형의 활동에 대한 보상...여가에 대한 또 다른 생각씨들...)
가족에게만 기대어 살 수 없다. 좀더 다른 삶으로 가는 징검다리들이 놓여졌으면 좋겠다. 현실이 가능하지 않더라도 共생각으로라도...한걸음...
뱀발. 봄비치곤 비가 지랄처럼 내린다. 맘에 찍어 둔 꽃잎 다 흩날릴까 두렵다. 그래도 봄은 빗물처럼 차고 넘치다니....휑한 바람소리에도 지레 마음이 짓눌린다. 그대여 내 마음을 받아주게. 매화향기 동봉하며 부질없는 생각을 보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