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 생산은 종종 주체를 위한 객체(대상)의 생산으로 이해되지만, 사실 삶정치적 생산의 궁극적 핵심은 주체성 자체의 생산이다. 바로 이 지형에서 우리의 윤리적 정치적 기획이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윤리적 생산이 주체성의 생산이라는 변화하는 토대-주체성의 생산은 고정된 가치들과 주체들을 늘 변형시킨다.-위에 수립될 수 있을까? 질 들뢰즈는 미셸푸코의 장치라는 개념에 대해 성찰하면서 우리는 장치에 속하고 장치 안에서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가 장치 안에서 행동하려면 윤리적 지평이 정체성에서 생성으로 재정향되어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 우리의 존재가 아니라 생성 과정 속에있는 우리의 존재, 즉 타자, 우리의 타자 되기이다. 20

 

이 책에서 특별히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는 두 개념은 가난사랑이다. 가난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는 첫째로 전통적인 계급 구분을 문제 삼고 우리로 하여금 계급 구성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신선한 눈으로 연구하게 하며 임금관계의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광범한 생산 활동들을 보게 만드는 건강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둘째, 이렇게 보았을 때 빈자는 결핍이 아닌 가능성에 의해서 정의된다. 빈자, 이주자, 불안정노동자들은 종종 배제된 것으로 간주되지만, 실제로는 삶정치적 생산의 전지구적 리듬 속에 완전히 들어와 있다. 경제적 통계를 통해서 가난의 조건을 부정적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빈자들이 생성하는 삶형태, 언어, 운동, 혁신능력 등을 파악할 수 없다. 우리의 과제는 빈자의 생산성과 가능성을 힘으로 전환시키는 방법들을 찾는 것이 될 것이다.  21


소크라테스는 향연에서 그의 사랑의 교사인 디오티마를 따라서 사랑은 가난과 발명에서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는 그녀가 가르쳐준 것을 정밀하게 다듬을 의도로, 사랑이 아름다움과 부를 달성하고, 그리하여 욕망을 충족시킬 이상적 영역을 향하는 본성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22

 

 

우리의 전제와 유사한 전제에서 출발하는 장-뤽 낭시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스피노자식으로 쓰는 것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허무주의의 현상학을 전복하고 다중의 생산성과 창조성을 핵심으로 하는 과정을 열어젖히기를 바란다..우리는 사건을 정의하고자 할 뿐 아니라 대초원을 불사를 불씨를 포착하고자 한다.  25

 

 


 

 

인간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를 따지는 것이 생산적이지 못한 이유는, 정치적 인간학의 분석을 어떤 종류의 것이든 불변적인 것에 입각시킨다면 그 결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는 데 있기도 하다..문제는 인간 본성을 정의하느냐가 아니라 인간 본성이 무엇이 될 수 있는냐이다. 인간 본성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인간 본성이 늘 변형될 수 있고 또 실제로 변형되고 있다는 것이다. 277

 

아무도 혼자서는 스스로를 지키고 삶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할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에 고독에 대한 공포가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히 시민적 상태를 열망한다.또한 인간이 시민적 상태를 완전히 해체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스피노자는 긍정적이고 누적적인 전진으로 상태를 제시한다. 자유와 공통적인 것을 향한 노력이 삶의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다음에 욕망이 공통적인 것의 구축을 가동시킨다. 마지막으로 사랑이 사회를 형성하는 공통적인 제도들을 공고히 한다. 이러한 순차적 과정에서 인간 본성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다. 279


그에게 악은 변질된 사랑, 부패되어 사랑의 기능을 방해하는 사랑이다 그렇다면 무지 공포, 미신을 단지 지성의 결여로 생각하지 말고 지성의 힘이 자기파괴적이 된 것으로, 그리고 마찬가지로 신체의 힘이 왜곡되고 봉쇄된 것으로 생각하자. 그리고 사랑이 궁극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창출하는 힘이기에 악은 공통적인 것의 해체 혹은 실로 그 부패인 것이다. 280

 


왜 따로 사람들이 노예상태가 자신들의 구원인 양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지, 왜 빈자가 독재자를 지지하고 노동계급이 우익정당에 표를 주는지..왜 학대받은 배우자와 아이들이 학대자를 보호하는 지...그러한 상황은 분명 무지 공포 미신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을 허위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충분한 변형의 도구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피억압자에게 진실을 제공하고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를 가르치는 것은 사태를 변화시키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변질된 사랑과 공통적인 것의 부패한 형태들에 강하게 중독된다. 슬프게도 그들은 종종 이것 말고는 사랑과 공통적인 것의 사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구체적으로 어떤 사랑이 여기서 변질되었는가? 어떤 공통적인 것의 사례가 부패되었는가? 281

 

 

고통은 공통의 언어적 경험을 구축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궁극적으로 공통의 삶형태를 제도화하지 않고서는 소통될 수 없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고독과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고통은-둘 모두 존재의 결핍을 나타낸다-우리를 공통적인 것으로 밀어붙인다. 힘과 사랑이 한데 모여 존재의 부패 및 그것이 가져오는 비참과 싸울 무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282

 

사랑은 항상 힘의 사용을 포함한다는 것,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의 행동 자체가 힘의 발휘라는 것이다. 사랑은 천사일 수 있으나, 그냥 천사가 아니라 무장한 천사이다. 사랑의 구성적 힘과 공통적인 것을 창출하는 능력이 존재의 생산, 실재의 생산에 관여하는 존재론적 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함축한다는 것을 보았다. 283

 

악은 사랑에서 파생되기 때문에 우리는 외적 봉쇄에 한정되지 않고 그 내적 메커니즘에 접근한다. 사랑은 악에 맞선 투쟁이 벌어지는 전쟁터이다. 더욱이, 사랑의 우선성은 이 싸움에서 우리가 우세한 힘을 가졌음을 나타낸다. 만일 악이 우선적이라면 우리는 악에 대해서 무력할 것이다. 우리는 제국이 악을 제한하고 죽음의 접근을 막아주기를 믿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악은 사랑에서 파생되기에 악의 힘은 필연적으로 사랑에 못 미친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통해 행동하면서 악과 싸울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정치는 차악의 지배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뱀발. 서문에 밟힌 밑줄을 따라가 훑어본다. 가난과 사랑에 대한 시 한편이 더 절절할 수 있겠다 생각해보지만, 꼬투리를 삼아 따라가본다. 더 보게, 더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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