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
그 애는
우리, 라는 말을 저 멀리 밀쳐놓았다
죽지 못해 사는 그 애의 하루하루가
죽음을 능가하고 있었다
풍경이 되어가는 폭력들 속에서
그 애는 운 좋게 살아남았고
어떻게 미워할 것인가에 골몰해 있었다
그 애는 미워할 힘이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번번이
질 나쁜 이방인이 되어 함께 밥을 먹었다
그 애는 계란말이를 입안에 가득 넣었다
내가 좋아하는 부추김치는 손도 대지 않았다
어떤 울먹임이 이젠 전생을 능가해버려요
당신 기침이 당신 몸을 능가하는 것처럼요
그랬니 .....
그랬구나 ......
우리는 무뚝뚝하게 흰밥을 떠
미역국에다 퐁당퐁당 떨어뜨렸다
그 애는
두 발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했다
잘못 살아온 날들과 더 잘못 살게 될 날들 사이에서
잠시 죽어 있을 때마다
그 애의 숟가락에 생선 살을 올려주며 말했다
우리, 라는 말을 가장 나중에 쓰는
마지막 사람이 되렴
내가 조금씩 그 애를 이해할수록
그 애는 조금씩 망가진다고 했다
기도가 상해버린다고
여행자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
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우주 어딘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에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를 굽는 생활처럼 태연하게
잘 지냅니까,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는 낯선 땅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
오랜 두려움뿐이다.
두려움에 집중하다 보면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이
실은 자신의 피폐를 통역하려 했다는 것을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쫓으면서
나는 알게 된다
아파요, 살고 싶어요, 감기약이 필요해요,
살고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나는 되기로 한다.
더러워진 채로 잠드는 발과
더러워진 채로 악수를 하는 손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했던 사람이
불구가 되어간 곳을 유적지라 부른다
커다란 석상에 표정을 새기던 노예들은
무언가를 알아도 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 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연두가 되는 고통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 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
나뭇잎 구멍에 눈을 대고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뭇잎 한 장에서 격투의 내력이 읽힌다
벌레에겐 그게 긍지였겠지
거긴 나뭇잎의 궁지였으니까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준다
물조리개를 들 때에는 어김없이
산타클로스의 표정을 짓는다
보여요? 벌레들이 전부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시간이 여위어간다
아픔이 유순해진다
내가 알던 흉터들이 짙어간다
초록 옆에 파랑이 있다면
무지개, 라고 말하듯이
파랑 옆에 보라가 있다면
멍, 이라고 말해야 한다.
행복보다 더 행복한 걸 궁지라고 부르는 시간
신비보다 더 신비한 걸 흉터라고 부르는 시간
벌레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든 네게서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뱀발. 슬픔이 흥건해진다. 흉터나 궁지가 간직하고 있는 것들, 두려움에 어쩌지 못하는 삶들, 그애의 하루하루... ...주말 시집을 펼쳐든다. 파랑옆에 보라가 있다면 그건 멍이다. 슬픔이 지나가는 자리들을 되새겨 본다. 슬픔이 맺힌다. 이슬처럼... ... 연두가 된다. 등 뒤의 햇살이 따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