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언 " 자신의 행복은 공동체의 행복을 늘리는 행위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의 개인적 행복은 주변 모든 사람의 행복을 늘리고 확장하려는 노력에 비례해서 그렇게 될 수 있다." 40
초기 사회주의는 우리 시대에 걸맞게 부활해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막다른 골목 앞에 멈춰선 우리에게 '가보지 않은 많은 길들'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틈이다. 없어서는 안 될 자유의 틈이다. 44
'사회 권력'에 '경제 권력' '국가권력'이 종속돼야 한다.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소유되고 '사회권력'의 행사를 통해 상이한 사회적 목적을 위한 자원의 배분과 사용이 실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주의다. 135
일리치는 마르크스, 엥겔스가 자본주의 아래서 발전한 생산력이 혁명 이후 고스란히 노동 대중의 사회적 역량으로 전환되리라 낙관한 반면, 산업이 발전할수록 근본적 독점이 나타나므로 산업 조직이 어떤 소유 형태를 취하든(사적소유든 국가 소유든) 이들 조직에 대한 개인의 종속은 쉽게 극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산업 조직에 응축된 사회적 능력을 대중의 역량으로 되돌리기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기술관료의 권력은 좀처럼 해체되지 않을 테고 민중의 삶의 자율성도 계속 제약될 거라는 진단이었다. 141
앙드레 고르 ' 자본주의의 생산력은 자본주의의 논리와 필요와 관련해서만 발전한다. 이 발전은 사회주의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내지 못할 뿐 아니라 나아가 사회주의가 생겨나는 데 장애가 된다. 자본주의가 발전시킨 생산력에는 자본주의의 본성이 너무 깊이 각인되어 그 생산력은 사회적 합리성에 따라 경영될 수도 작동될 수도 없다. 비록 사회주의가 존재하더라도, 이때의 생산력은 다시 해체되거나 변질될 것이다. 현재의 생산력에 맞춰 사고한다면 사회주의적 합리성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일, 심지어 그것을 개략적으로 생각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 프로레타리아여, 안녕에서 143
스물다섯살의 청년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에 주목하면서 염두에 둔 것은 생산력 발전 따위가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야말로 "시민사회의 계급이 아니면서 시민사회의 한 계급"이라는 사실이었다....꼭 필요한 존재이면서도 시민사회의 이해관계에 통합돼 있지 않았다. 이점이 주목되었다. 152
그람시는, 자본의 지배에 대중의 생활이 끼워 맞춰진 바로 그 지점에서 대중들 스스로(적어도 그 중요한 일부가)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기로 결단하는 것이 출발점이라 보았다.....노동자계급은 혁명적이다. 그러나 혁명적이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다...주체가 없다면 발명이라도 해야 한다. 159-160
Why not Socialiam?(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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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소주제로 읽은 것들을 정리하고 있던 차. 읽었던 책들이 묶여진다 싶다. 러셀, 앙드레 고르, 초기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겹친다. 교조주의에 넘어설 마음들이 있다면 활발하고 다양한 논의도 가능하리라 싶다. 하지만 정해진 커리를 갖고 공부하는 곳들이 쉽게 가지고 있는 틀을 놓으려고 할지는 역시 의문이다. 가타리와 머레이북친으로부터 거꾸로 가고 있다. 욕망과 다시읽기, 겹쳐읽기도 괜찮을 듯하다. 발명을 하려면... 아무튼 활발한 논의와 생각씨앗들이 오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마음만 먼저 건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