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 진심으로 우리에게 소통이 가능하려면, 삶 자체가 비슷해야 한다. 다른 삶을 사는 이는 외국인 같다. 삶만이 우리를 연결할 수 있다. (김소연, 사이시옷의 세계에서)
뱀발 하나. 대한민국이라는 섬나라는 삶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섬들은 삶이 절대 겹치지 않는다. 같은 아파트, 빌라, 주택, 투룸, 원룸... ... 섬의 색깔마다 섬의 온도와 습도, 밀도가 있다. 식물원처럼 그렇게 갇혀 산다. 그래서 다른 삶을 모른다. 진보라고 말하지만 이 역시 너무 작은 섬의 하나일 뿐이다. 다른 섬의 삶을 조망만하지 살아내지 않는다. 그래서 권력을 얻고 제도안을 섬기게 되면 어느 순간 제도곁과 밖의 다른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으므로, 정책도 정치도 아픔이나 느낌이 없다. 선거는 그렇게 자주오는지 변한 것이 없다. 배껴온 것이므로 다른 삶 속에서는 생명력이 없다. 삶의 수준이 등락을 거듭함에도 다른 소득분위가 닥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삶만이 우리를 연결할 수 있다. 하우스푸어, 교육푸어,,,모두가 피해자인 이 섬나라에서는 소득분위의 비교와 삶의 겹침과, 다른 삶을 살아내는 삶진보만이 푸어족 천지인 이 나라에 답을 줄 수 있다. 연금에 덜 연연해하며, 자신의 소득을 비정규직, 여전히 대물림되는 달동네의 삶과 아이들의 다른 삶을 전망해줄 수 있다. 진보가 삶의 시공간에서 다른 온도-습도-밀도의 다른 맛을 보여줘야만 바꾸어질 수 있다.
밀도와 온도, 습도 - 책을 읽을 때면 으레 이 세 가지를 기준으로 문장을 측정하는 버릇이 있었다. 밀도 높은 문장을 가장 좋아했고, 습도가 낮은 건조한 문장을 신뢰했고, 온도가 지나치게 높거나 지나치게 낮은 문장에서 풍기는 과잉을 부러워했다. 하고 싶은 말이 차고 넘칠 때, 그것을 집약하려는 집중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문장의 높은 밀도는 글쓴이의 경지를 실감할 수 있어 좋았다. 따듯한 문장을 가장 꺼려했다. 따듯한 문장은 삶을 달관한 듯한 깨달음과 위로로 포장되어 있기가 십상이다 위선에 가깝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삶과 손쉽게 화해해버렸다는 의미에서 패배자의 모습과 비슷한 뒷맛이 남는다. 사랑을 겪기보다는 사랑을 포장하려는, 그래서 환심을 쉽게 사려는 얇은 상술도 보인다... 따듯한 문장은 인기 품목이 된지 오래됐다. 그러나 이런 위로는 어딘가 삶과 유리돼 있다...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고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고귀한 경험들은 따뜻한 온도의 문장이 아니라 밀도 높은 문장만이 감당할 수가 있다. 대개는 밀도 높은 문장을 골치 아파한다. 제레 질리기도 한다. 그러나 문장은 탱탱한 타이어처럼 단단해야 한다. 밀도 높은 문장을 읽고 났을 때에야 우리 영혼은 탄성이 회복된다. 바닥에 부딪칠수록 더 큰 반동으로 솟구쳐 우리의 영혼을 더 높은 곳까지 더 먼 곳까지 데려다준다...밀도 높은 문장에 어느 정도 거부감을 느낀다면, 아마도 생기 잃은 자기 삶을 외면하는 중이리라. 맨 처음 나는, 열렬하게 들끓는 문장으로 시를 쓰고 싶었다. 문장의 온도를 내 능력의 최대치로 높이고 싶었다. 밀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랬으므로, 습도는 최대한 낮은 문장을 쓸 수밖에 없었다. 습도를 버릴수록 표독함이 배어 나왔고, 그 표독함을 기뻐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표독함만으로는 불가능해지기 시작했다. 표현해보지 않았던 것을 표현해보기 위해 나는 문장에 온도를 보태보기도 하고 습도를 보태보기 했다. 따듯한 문장도 아니고 축축한 문장도 아닌 채로, 온도와 습도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지 여전히 궁리에 빠져 있다. 이 궁리를 나는 '식물원의 문장'이라 명명해본다.(김소연, 시옷의 세계에서 부분요약)
뱀발 둘. 얼굴이 빨개졌다.
뱀발 셋. 우연히 책상 한켠에 두고 낭독하던 책이 마음에 들어 책장을 넘겼다. 본적이 없는 듯한 문구가 들어왔다. 소통. 그래 그래서 우린 가까이 있지만 알 수 없던거야.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거야. 그리고 문장론은 저자가 추운 겨울 친구와 동물원에 가서 동물구경은 하지 못하고, 식물원에서 따뜻하고 좋던 기억을 문장론으로 되새겨 내었다. 뭔가 부족했는데, 세가지 구슬로 다루어내는 솜씨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