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운동
[끝없는벌판] [무엇이나를만들었는가][바리데기][머구리] - 태어나고 삶의 바닥에서 생존을 위해 짐승만도 못한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허다한 것이 현실이다. 최소한의 윤리라는 것 조차 사치일 수 있는 환경에서 눈꼬리만한 권한을 가지고 휘두르고 삶을 유린한다. 삶의 밑절미까지 영혼을 지워져 없애려는 듯 말이다. 먹고 살기위해, 몸을 팔고 현실에 허우적거리 그 기본적인 착취의 시스템은 백년전이나 이백년전이나 가까운 곳, 지금의 현실에서 별반 변한 것이 없다. 먹고살만큼만 가진자의 논리와 먹이사슬구조는 더 예리한 칼날을 머금고 있다. 현실은 관광처럼 여행객처럼 표피만 들여보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그 삶과 밥의 고리의 파장을 살피려는 명민함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 목줄을 죄고 흔들고 그것에 시종이 되어 같이 흔들리는 고깃덩이를 그대로 봐야 한다. 보려고 할 수록, 보이지 않을수록 캐내야 한다.
한마디의 따듯한 말, 따듯한 식사, 한번만이라도 왜 사는지 물어주는 세상. 시선이 낮고 아래로 번져야 하는지 몸으로 말한다. 누스바움은 운, 운명에 대해서 말한다. 우연히 좋은 환경에 처한 것, 우연히 자산가의 그늘아래 있다는 것. 우연히 좋은 일터에 있다는 사실도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 하지만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여야 하며, 주변에 보이지 않는 삶의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 그 고리를 뼈아프게 되새기는 일들... ..
[낯선것과조우][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 지금 여기에 대해 좀더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게한다. 나의 자족적인 시선이 아니라 좀더 다른 시선으로 조망을 입체적으로 할 수 있게 말이다.
이탁오 한마리의 개/박열 개새끼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공자를 존경했지만 공자에게 어떤 존경할 만한 점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어오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오호라! 나는 오늘에서야 우리 공자를 이해했고 더 이상 예전처럼 따라 짖지는 않게 되었다. 예전의 난쟁이가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다.”<‘속분서’ 중 ‘성교소인’(聖敎小引)>
나는 개새끼로소이다/하늘을 보고 짖는/달을 보고 짖는/보잘것 없는 나는/개새끼로소이다/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나도 그의 다리에다/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뱀발. 주말 짬짬 책을 보았다. 가네코후미코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이완우의 [머구리] [낯선 것과의 조우]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읽다가 걸려 남긴다. 김훈의 [개]가 인간이 인간이 될 때까지 짖겠다는 그래도 인간미가 있는 개라면. 이탁오의 개와 이탁오에서 빌려온 듯한 박열의 개**은 처절하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와 우리의 시선을 가질 수 있을까? 그저 관광객의 시선으로만, 쇼핑하듯 그저 보기만 하고 살피지도 헤아릴지도 모르는 사유의 밑바닥이 몹시 부끄러워지는 주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