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죽지 말아야 할 삶, 신도 도덕도 의지도 버린다. 철학하는 뇌과학에 기댄다.  카뮈의 [이방인]의 첫대목은 뫼르소의 한마디로 시작한다. 태양 빛이 너무 고와 총을 겨누었다. 삶은 부조리하다고 한 카뮈의 삶은 어떠했지. 카뮈는 연극과 소설, 하고 싶은 일을 가지고 논 것은 아닌가.  삶을 신에 기대지도 않고 신념과 관념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폴 새가드는 두 아들을 남긴 아내를 잃고 이 책을 썼다. 젊은 날 한권의 책에서 시작한 관심사는 철학, 심리학, 신경과학 들까지 속속들이 꿴다. 철학만을 기대지 않는다. 종교에 기대지 않는다. 사실을 매개로한 연구의 집적물로서  욕구, 욕망의 체현하게 된 뇌과학으로 철학이 넘겨짚던 사유를 복기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욕구는 관계, 능력, 자율로 대별된다. 우울에 침잠하거나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자신의 가진 능력을 확장하고자 하며, 스스로 주도하고자 하기 마련이다. 삶이라는 예술은 이런 추상적인 욕구와 욕망을 일상에서 사랑, 일, 놀이로 현실화시킬 수 있다. 우정과 관계의 확장시키고 하는 사랑. 좀더 넓고 몸에 배이면 강한 일들을 하고 싶어한다. 놀이처럼 타성에 젖지 않고 만들어가는 주도성들을 철학이란 당위로 말하지 않는다. 전두엽, 후두엽, 측두엽, 뇌간의 변화와 동향의 뇌과학으로 짚어낸다.

 

사랑과 일, 놀이의 결합이란 삶은 요원한가? 사람은 본디 그러하다. 그런데도 세상은 일로만 타율로만, 관계도 없는 고독하게 살아지는 존재로 삶을 대부분 마감한다. 생애주기에 따라 색깔이 다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놀이-사랑의 그물망은 살아가는 삶의 공감의 자장을 넓고 깊고 진하게 만든다는 것이 폴의 결론이다.

 

지금 여기의 세상은 낭떨어지다. 조금만 삐끗하면 자살과 죽음의 강으로 추락한다. 야생의 공간. 무자비함의 시공간. 신이 만든 세상. 구원하기 위해 시련을 주는 것이 아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종교에 귀의한다고 세상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철학의 기름기를 빼고 현실의 알맹이를 들여다본다. 겉넘고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가능한 과학의 토대로 말한다. 삶은 사랑하면서 하고싶은 일을 놀이처럼 해야 서로 공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본능에 충실한 토대를 근거로 관계를 만들고, 능력이란 재미를 담뿍 맛보며 서로의 삶공간을 열어주는 방법으로 새롭게 시작할 근거를 가질 수 있다.

 

"오늘 연애를 한다. 어쩌면 그 일을...함께...세상을 만든다." 라면서 삶의 부조리를 물리칠 희망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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