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연히 엠비씨 백분토론을 보다 말았습니다.

 2004년 10대늬우스를 매개로 2:2로 결전을 벌이는 듯 보였습니다. 앞의 진모인사가 이야길 하길 "감성"마저 메말라버린 세상이라며 비정규직을 비롯하여 사회적인 문제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안으로 치부되는 현실을 개탄을 하더군요.

 저도 그렇게 메말라가는 사람 가운데 한사람일터이고, 세상살이 가운데 내 편안함을 위해 애써 감성따윈 멸시하는 듯합니다. 여간해서 느끼기도 힘들지만, 세상 속도의 변화에 비례해 혼자 무덤덤해져가는 속력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사소한 이해관계라도 걸리면, 얼굴 보지 않을 사람이라면 아무런 감정없이 절연을 합니다. 일터의 동료가 떠나가도 무덤덤, 누가 저 세상으로 가도 제 건강 걱정을 할 뿐 이제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몸 한몸 추스리기도 힘든데?'라는 빌미로. 옆의 비정규직원이 생노가다를 하더라도, 일당으로 고용되어 연배높으신 분이 일을 하더라도 '고용되었으니?'하며 일을 시킬 뿐입니다.

 어쩌면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킨다는 것이 큰 죄라도 되는 것처럼 혼자 상황에 따라 변하는 다중의 성격을 갖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까운 지인이 당혹스런 일을 당하더라도 어쩌면 시대에 맞게 재단을 하고 처신을 하여야 속편할 지 모르겠지만, 가끔 여러상황이 겹치면 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한 안식을 위해 주변으로 손길이 뻗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하듯 일주일치 모아 고해성사를 하듯 끊임없이 혼자 안위를 꿈꾸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옆에사람이 일자리를 잃든 말든, 내 일이 아니면, 더 이상 속 끓이기 싫어 마음의 쇳문을 닫으려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퇴화된 '감성'을  다시 꺼내는 것이 어쩌면 세상물정 몰라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을 빌미삼아 스스로 다중인격인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납니다.

 가엾고 안스럽고, 안타깝고, 보듬고 싶은 것은 표식은 없지만 돈처럼 똑같이 보이지 않고 흐르겠죠. 내눈을 가린다고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닐테고, 애써 모른 척해도 결국 내 성격만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속도를 점점 높이면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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