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카테고리 오손도손
글쓴이 여울마당 등록일 2003-10-01 오후 3:50:58
"우리는 인터넷에서 함께 달린다 - RunDiary"  

너무 오랜만에 관심이 몸으로 돌아온지 한해가 지난 것 같다. 가을맞이 겸 몸생각을 되돌아본다.

일이라는 것을 핑계로, 만남이란 것을 핑계로 몸을 학대?하기 시작하자. 몸은 보란 듯이 반항을 해온 것 같다. 살이라는 것으로 보답하구. 틈실한 아랫배를 만들고, 얼굴을 동글동글 그렇게 학대에 대한 보상?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갖춰왔던 것 같다.

"어~ 이상하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다 나이들어서 그럴테지! 왜 이렇게 졸리지?" 요렇게 학대로 출발한 지방의 세계는 몸에 자신만의 영역을 넓히려 배로, 얼굴로, 머리도 두들긴다. "피곤한거야 어쩔 수 없어. 다 나이탓이지. 얼마나 힘든데. 그냥 쉬면 다 되는거야. 어릴 때 못 먹은 한들이 있으니, 공원에서, 어디에서 많이많이 먹어둬."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어떻게 알아. 그냥 편하게 살어." "음식은 남기면 안되는거야. 깨끗이 비워." 조렇게 유혹의 손길은 지방의 침범영역을 자꾸만 넓혀 왔던 것 같다... ...


기가 막힌 세상, 기가 차 말이 안 나오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지만,“기운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 좋은 기운이든 나쁜 기운이든 요즈음 기운이 점점 뻗치는 달림 덕을 톡톡히 보고 있어 혼자 기운에 대한 생각을 입가에 달아본다.

기운이 있다. 없다라고 컴퓨터 논리회로처럼 회색톤으로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기운이 얼마나 있는 것 같아라고 콕 찝을 수도 없는 것이고. 암튼 기운이라는 말에 대해 새삼스럽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 일년쯤 몸생각을 한뒤로 기운이 보름달이 되듯 점점 차 오르는 것 같아 기분이 참 좋다. 때에 따라 몸을 학대해 기운이 멋대로고 죽을 맛이고 조절이 불가능할 때도 있었지만, 또 하나의 생각은 기운도 조절되는구나. 가학성 학대정신에서 벗어나 적정한 상태로 몸을 사랑하게 되면, 기운이 알맞게 찬 상태에서 생활하는 묘미를 느낄 수 있구나. 이렇게 기운 찬 생활을 조절하는 것도 고수의 세계이겠으나, 달림 가운데 “런하이”처럼 생활의 “기운하이”의 고조감을 유지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사랑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또한 자기 몸에 맞는 운동이 다를 수 밖에 없지만 달리기도 다른 운동에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애틋함을 가져다 주는 것 같다. 속도감의 세계에서 자연과 더불어 한몸이 될 수 있음은 전신운동이 몸을 원초적인 자연속의 본능으로 되돌려 놓아 제일 편하게 받아 들일 수 있을 것 같고, 반응도 실제상황과 유사하여 다른 운동에 비교하지 못할 실제감이 베여 있는 것 같아. 짱! 이라 여긴다. 내 몸에 잘 맞는 닮은 꼴이라는 생각이 굳혀진다.

몸을 사랑한 연유로 또한 그 몸이 일상에서 기운 업의 상태로 응답함에 새삼 감사할 따름이다.

행여 몸을 사랑하기 위해 시작한 달림이 몸이 감당못하는 속도와 또 다른 경쟁에 사로잡힌다면 이 또한 새롭게 몸을 학대하는 것이 아닐까? 운동선수는 몸이 좋은 것이 아니라 늘 몸의 학대의 벼랑에 놓아두고 자신을 저울질 하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기운을 차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나쁜 기운을 끊임없이 주입할 수 있음에 몸을 곤욕스럽게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생활인들의 달리기는 한발 떨어져 관조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는 것 같다. 몸을 사랑하고 발달시킨만큼 “각근지구력이 늘었으니 좀더 멀리 뛰어보세요. 내일 하루가 즐거울 것입니다.”라고 얘긴 못하지만 “이번에 조금 속도 내주셔도 됩니다.”라고 애정의 목소리로 응답하지 않을까? “하루 기분 끝내줬습니다. 일하는 맛이 정말 꿀맛입니다.”

돈과 경쟁, 속도에 사로잡힌 세상에 살고 있듯이 몸생각으로 시작한 달리기에 이 세상의 범주를 굳이 이식시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 런다식구들이 몸과 달림을 정말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해시계, 노랑나비님 같은 연배의 진정한 고수의 경지를 누릴 수 있길 바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즐달 고수의 세계에 다가가고자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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