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더와 애니는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는 부부. 이들은 젊은 시절 건물을 폭파하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되어 평생 FBI에 쫓긴다. 이들 부부에게는 대니와 해리라는 두 아들이 있다. 대니와 해리는 추적을 피해다니는 부모님 때문에 수십차례 학교를 옮겨야 하고 그래서 친구를 사귀기도 쉽지 않다.

대니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어서 항상 종이로 된 건반을 가지고 다니며 연습을 하는데 학교 음악 선생님의 눈에 띄어 그 집에 가서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선생님의 딸 로나를 만나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된다.

대니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선생님은 줄리어드 음대에 응시하라고 조언을 하고 대니는 부모님 몰래 시험을 봐서 합격한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항상 도망다녀야 하는 가족과 헤어져야 한다. 처음에 완강하게 반대하던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대니를 자유롭게 떠나보낸다.(시놉시스)

 

 *동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만든다. 제목도 그러하고, 마지막 장면의 대니를 놓는 장면도 그러하다. [허공에의 질주]란 제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뒷끝이 찜찜한 것 같다. 대니의 친구 로나의 방문에 밥말리의 사진이 걸려있고, 동생 해리는 늘 해맑고 명랑이 찌를 듯하다. 그리고 도피 가족의 관계는 긴장이 흐르지만 쿨하다.

삶에 붙어 있는 것 말고 원하는 것만 빼내고자 한다면, 끊임없는 유토피아가 저기에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삶은 어떤가? 아더와 애니는 저기를 사는가? 여기를 사는가? 이상이 있고, 이념이 있고, 만약 혁명이 있다면, 발라내는 혁명이 아니라 춤추는 혁명이란 것이 존재할까?

**도, ***도 무엇을 상정하지 않는다. 다만 진실을 대면하려 한다. 앎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저기를 상정하기란 더 더구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상정한 저리로 여기를 재단하는 일은 더 더욱 위험하다. 그리고 그 직접적인 대면이 머리 속에 있지 않다. 끊임없이 삶이 자신을 관통하게 하게 한다. 그런데 현실을 대면하기란 쉬운 일인가? 현실을 똑빠로 보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고통을 느끼기란 얼마나 가슴저미는 일인가? 고통을 연대하기란 하물며...  

뱀발. 며칠 전 피로연 뒤풀이에서 소개받는 책이 맴돈다. 그 과정에 대면하게 되는 사실이 맴돈다. [레인보우]란 영화와 [진화의 무지개]란 그리고 상식처럼 알고있는 진실들이란 얼마나 맹랑한가? ...진실의 바닥을 대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는 제시할 만한 전략을 지니고 있지 않다. 나는 어떠한 처방의 가능성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현재와 과거를 파악하기 위해 생각해낸 개념들에 맞아떨어지도록 미래의 윤곽을 그리는 방식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수도자나 시인이 죽음에 관해 명상하다가 현재의 절절한 살아있음을 감사하는 마음에 충만하여 '향수'하듯이 우리는 젠더의 서글픈 상실을 맞닥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우리가 경제적 중성자의 이중의 속박을 엄격하고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경제적인 섹스가 가져다주는 안락을 거부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는 한, 현대를 살아가는 생생한 삶의 기술은 회복할 수 없으리라 본다. 그러한 삶에 대한 꿈을 이루고자 한다면 감상을 배제하고 경악할 만한 진상들을 직시해야 한다. [젠더] 책 말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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